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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5장. 멀리 가기 위해 휴식을 취한다(3)
“으음!”
방진보가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로 담호의 얼굴이었다.
“형!”
“괜찮으냐?”
“어떻게 된 거죠?”
“쓰러졌었다.”
“제가요?”
방진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고열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은 있지만,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다.”
“형! 고마워요.”
방진보는 본능적으로 담호가 자신을 치료해 준 것을 알았다.
담호는 무덤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쉬고 있거라.”
“예!”
담호는 방진보를 방 안에 홀로 둔 채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어떤가?”
밖에 있던 금관천의 물음에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금관천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담호를 바라보는 금관천의 얼굴엔 경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홍린괴어를 잡아 오랬는데 담호는 내단을 가져왔다. 비록 무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금관천이지만, 내단을 형성할 정도라면 보통의 영물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홍린괴어도 잡기가 힘든데 하물며 내단을 가진 홍린괴어라면 어떨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담호는 그런 홍린괴어를 잡은 남자였다. 그의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난 존재였다.
“이제 쉬게나. 진보에겐 내가 죽을 가져다주겠네.”
금관천의 손에는 죽이 든 쟁반이 들려 있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금관천이 진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담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초원을 향해 걸어갔다.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십이 년 동안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왔던 담호에겐 홍린괴어를 잡는 여정은 그리 힘들 것도, 대단할 것도 없었다.
담호가 초원 위에 불쑥 솟아 있는 평평한 바위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흑귀가 다가왔다.
먼 길을 다녀왔지만 흑귀 역시 지친 기색이 하나 없어 보였다. 담호는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끝없이 펼쳐진 창공에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화산에서 보았던 구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화산이 어딘지 모르게 정적이라면, 이곳은 역동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담호가 문득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구름을 잡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담호는 공허한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이젠 흐릿한 흔적만 남은 상처에 고정되었다.
홍린괴어를 잡기 위해 스스로 베었던 상처다. 내공을 주입하고 나서야 겨우 만들 수 있었던 상처가 어느새 아물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몰랐다. 상처가 나도 빠르게 아물고, 나중에는 상처도 거의 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육체의 단련 때문인지, 아니면 지하 공동에서 살기 위해 먹었던 이끼와 괴어의 조화 때문인지는 담호도 알 수 없었다.
그때는 며칠씩 고열에 시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생사의 고비를 수십 번이나 넘나들면서도 담호는 악착같이 살아났다. 그리고 고비를 넘을 때마다 조금씩 더 강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오랫동안 홀로 격리되어 있던 탓인지 선과 악에 대한 경계도 모호해졌다. 이곳까지 오는 그 짧은 여정동안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런데도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인간인가?’
담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겨우 여기까지 오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방진보를 데리고 중원을 횡단하면 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여야 하는지.
화산에 있을 때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행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었다.
푸르르!
그때 흑귀가 심심한지 담호의 얼굴에 뜨거운 콧김을 뿜었다. 덕분에 담호는 쓸데없는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담호가 상체를 일으킬 때였다.
초원 저 멀리서 엄청난 양의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먼지구름은 매우 빠른 속도로 담호가 있는 목마장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담호가 안력을 끌어올려 먼지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엄청난 수의 말들이 보였다.
말들 주위로 마찬가지로 말을 탄 사람들이 경계를 서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말들이 대열을 이탈하지 못하게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대지가 진동을 일으켰다.
그때 진동을 느꼈는지 금관천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돌아오는구나.”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분명 환희의 빛이었다.
겨우내 목마장을 떠나 있던 자식들과 말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홀로 목마장을 지키던 금관천이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아버지!”
행렬의 선두에 있던 이가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왔다. 그는 잡 털 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를 탄 중년인이었다.
금관천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중광아!”
“하하하!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금중광이 말에서 뛰어 내리자마자 금관천을 꽉 껴안았다. 금관천은 눈을 감고 아들의 온기를 느꼈다.
“고생 많이 했다. 몸은 어떻느냐?”
“건강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처와 아이들은?”
“곧 도착할 겁니다. 그들 모두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단다.”
금관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해후를 즐기던 금중광의 시선이 곁에 있는 담호를 향했다.
“이분은?”
“혼자 적적할 때 찾아오신 손님이시다. 일행이 아프셔서 잠시 이곳에 머물고 있지.”
“그렇습니까?”
금중광이 담호를 향해 다가와 먼저 포권을 취했다.
“나는 이곳 금마장(金馬場)의 소장주인 금중광이라 하네. 아버님의 손님이라면 나의 손님이나 마찬가지. 푹 쉬었다 가시게.”
“고맙소!”
“고맙긴! 하하하! 오늘은 아주 즐거운 날일세. 자네도 오늘을 즐기게.”
금중광이 호방하게 웃었다.
그는 생긴 것만큼이나 호방한 성격을 가진 듯했다.
“아버님!”
“할아버지.”
그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가족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금중광의 처로 보이는 차분한 인상의 여인이 금관천에게 인사를 했고, 의젓해 보이는 청년과 겨우 대엿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도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래! 너희들도 왔구나.”
“할아버지. 혜아도 왔어요.”
“어이쿠! 내 새끼!”
금관천이 손녀를 품에 안았다. 그런 그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해후였다. 그가 겨우내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담호는 일가족이 해후를 즐기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감정이 없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그의 옛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에게도 저렇게 행복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너무나 짧게 끝이 났다.
담호는 그렇게 일상의 평화란 것이 얼마나 어이없이 사라질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담호는 부디 저 일가에게 그런 일이 다가오지 않길 빌었다.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자는 혼자만으로도 족하니까.
금중광 일가의 뒤를 이어 엄청난 수의 말과 인부 들이 목마장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왔구나.”
“장주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더욱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장주님.”
인부들이 금관천을 보며 인사를 해 왔다. 금관천은 미소로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 주었다.
비록 일 년 중 절반밖에 함께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고 지내온 사이였다. 이제는 고용 관계를 떠나 형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 잘생긴 녀석은 뭡니까? 아버님이 구하신 겁니까?”
금중광의 시선은 바로 흑귀를 향해 있었다.
금관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분 대협이 타고 오신 말이다.”
“멋진 녀석이군요. 아무래도 대완구의 혈통이 섞인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같다.”
대완구, 서역 대완국이 원산지인 말이었다. 천리마라고 불리는 이 대완구를 다른 말로는 한혈마라고 불렀다. 그 옛날 관우가 타던 적토마도 이 대완구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런 녀석의 씨앗을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금중광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떠올랐다.
목마장은 말을 팔아 수익을 얻는다. 당연히 혈통이 좋을수록 비싼 값을 받고 수익성이 높아진다.
대대로 이곳에서 목마장을 했지만 담호가 타고 온 말만큼 좋은 말을 키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금중광이 담호를 향해 다가갔다.
“대협!”
“…….”
“혹시 이곳에 계시는 동안 우리 말과 저 말의 교미를 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가는 확실히 치르겠습니다.”
담호의 눈빛이 순간 일렁였다.
너무나 강렬한 그의 눈빛에 금중광이 움찔해서 물러났다.
‘무슨 눈빛이…….’
금중광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눈치챘다. 자신도 모르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담호의 시선이 금중광의 등 뒤에 있는 금관천을 향했다.
방진보가 아플 때 아무런 대가 없이 머물게 해 주고 보살펴 준 이였다.
“놈이 원한다면.”
“절……대 강제로는 교미시키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흑귀라는 말을 보살피겠습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금중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관천이 담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네! 쉽지 않은 부탁이었을 텐데.”
담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저씨!”
그때 누군가 담호의 손을 잡았다.
낯선 온기에 담호가 고개를 내려다보니 금관천의 손녀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난히도 눈이 큰 아이, 금소혜였다.
“아저씨, 아저씨!”
금소혜가 큰 눈을 끔뻑이며 담호를 연신 불렀다.
“소혜야, 손님한테 예의를 차려야지. 그러면 안 돼.”
당황한 어미가 금소혜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금소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렸다.
“소혜도 저 말을 타 보면 안 돼요?”
금소혜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흑귀였다.
수많은 말 가운데서도 유독 돋보이는 흑귀였다. 수백 마리의 말이 흑귀의 기세에 질려 근처에는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멋있어!’
태어나서 말과 함께 자란 금소혜였다.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말을 보는 눈은 어른 못지않았다.
그런 금소혜의 눈에 비친 흑귀는 너무나 멋있었다.
담호가 금소혜를 빤히 바라봤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금소혜의 크고 검은 눈.
천하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호였지만 이상하게도 금소혜의 두 눈은 마주 보기가 힘이 들었다.
담호가 고개를 돌려 흑귀를 바라봤다.
흑귀는 여전히 오연하게 서 있었다. 수많은 말들이 오직 흑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중에…….”
“아저씨?”
담호는 금소혜의 손을 놓았다.
아직도 짙은 혈향이 배어 있는 손이었다. 그 때문에 방진보도 앓았지 않던가.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금소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멀어지는 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