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41화 (41/500)

 41

41화 6장. 바람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어온다(1)

흔히들 명검(名劍)이니 보검(寶劍)이니 하는 말을 많이 쓴다. 경지에 오른 장인이 오랜 시간을 투자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검의 결과물이 흡족할 때 주로 쓰는 단어들이다.

명검이나 보검은 인간의 영역이었다. 장인의 노력 여하와 재료의 질에 따라 희박한 확률이나마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신검이기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귀물이었다. 인간의 집념과 하늘의 뜻, 그리고 시운(時運)이 깃들어 조화를 이루었을 때야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은하성의 손에 들려 있는 도는 가히 신도(神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예기를 흘리고 있었다.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뻗은 붉은 색 도신에서는 사위를 압도하는 살벌한 예기와 청명한 기운이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은하성의 눈에 격동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적성(赤星).

그가 어렵게 구한 도의 이름이었다.

베지 못할 것이 없고, 그 예기만으로도 주인을 능히 일성의 패자로 만들 수 있다는 도중도(刀中刀)였다.

은하성은 적성을 구하기 위해 무려 오 년을 노력했었다. 그동안 그가 쏟아부은 노력과 재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런 정성과 노력이 통했는지 얼마 전 적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결국은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지이잉!

은하성이 손으로 도신을 훑자 적성이 스스로 울음을 토해 냈다. 청아한 도명(刀鳴)에 은하성이 잠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그 어느 것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은하성이 적성을 도갑에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장주님, 혈산입니다.”

문 너머에서 심복인 조혈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장주님.”

조혈산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 표정이 왠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인가?”

“호법께서…….”

“천생이 왜?”

“변을 당하신 듯합니다. 합밀 인근에서 시신을 발견했다는 급보입니다.”

“정말인가?”

은하성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경천생은 그가 가장 믿는 수하였다.

그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은하성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감히 천생을 죽인 자가.”

“아직 거기까지는…….”

조혈산이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은하성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그에 조혈산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주인의 분노 어린 표정이었다. 오 년 전에도 은하성은 저런 눈빛을 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목숨을 다쳤다.

“반드시 흉수를 찾아내. 필요하다면 그들을 움직여.”

“그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잖아?”

조혈산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만큼 은하성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섣불리 움직이면 혈린살막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넘어야 할 벽이야. 이미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상황이고. 망설일 이유가 없어.”

“알겠습니다.”

“꼭 이럴 때가 있지.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싶지만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휘청거릴 때가.”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적성을 얻었다는 기쁨 따윈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천생이 죽다니…….”

심옥과 흑노는 별채의 창가에 마주 앉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밤바람이 차갑네.”

“박격달봉을 타고 흐르는 바람 때문일 겁니다.”

“우리 혈린살막도 이렇게 시원한 곳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막주님한테 이쪽으로 옮기자고 건의해 보십시오.”

“그랬다간 내가 먼저 맞아 죽을걸.”

“하긴 막주님은 자식이라고 봐주는 분이 아니지요.”

“아들이라면 몰라도 딸한테 그러는 건 너무하는 거 아냐?”

“그게 막주님의 매력이시죠. 누구에게나 공평하시지 않습니까?”

“공평은 개뿔…….”

심옥이 투덜거렸다.

흑노는 그런 심옥을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치 철없는 손녀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손은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심옥이 찻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탁자 위에 글씨를 썼다.

[감시는?]

[천장에 하나, 창밖에 하나. 모두 둘입니다.]

흑노도 마찬가지로 찻물로 글씨를 써서 대답했다.

[해결할 수 있겠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심옥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훑었다. 그러자 탁자 위에 써져 있던 글씨들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흑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심옥을 바라봤다.

그는 심옥이 이번 임무를 맡게 된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옥은 임무를 자원했고, 막주는 허락했다. 자신의 후계자이니만큼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가 어떻게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심옥의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이제 그만 자야겠네.”

심옥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주무십시오, 아가씨.”

흑노도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별채에 불이 꺼졌다.

그제야 별채를 감시하던 자들이 잠시 긴장을 풀었다.

하루 종일 심옥과 흑노를 감시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별채에 처박혀 있을 뿐 특별히 이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감시자들이 그렇게 방심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목덜미 천주혈이 뜨끔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흑노가 쓰러지는 감시자의 몸을 사뿐히 안아 들어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흑노는 감시자를 조용히 누인 후 다른 감시자도 마저 제압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흑노가 모든 감시자를 제압하자 심옥이 별채를 빠져나왔다. 어느새 그녀는 검은 야행복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가자.”

심옥은 망설이지 않고 별채 뒤쪽의 담을 뛰어넘었다. 흑노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소리도 없이 서천산장을 빠져나와 박격달봉을 향했다.

별채에 있다고 외부의 움직임에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별채에 머무는 동안 서천산장에 상당한 양의 물자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산 밑이 아닌 산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산이라면 박격달봉밖에 없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산 위에서 물자가 내려올 일이 없었다. 일반적인 문파라면 말이다.

‘산자락에 무언가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것이 서천산장에 머문 기간 동안 심옥과 흑노가 내린 결론이었다.

두 사람은 경공을 펼쳐 산을 올랐다.

“이쪽입니다.”

흑노가 바닥에 난 흔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것은 마차의 바퀴 자국이었다.

“이곳까지 마차가 올라온단 말이야?”

심옥이 주위를 둘러봤다.

산 위로 최소 오백 장 이상은 올라왔다. 그 정도 높이라면 관도는커녕 오솔길도 닦기 쉽지 않았다. 하물며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있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런데 눈앞에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이뤄져 있었다. 비록 좁기는 하지만 마차가 지나갈 만한 길이 닦여 있었다.

서천산장은 이곳을 이용해 박격달봉에서 무언가를 들여왔다.

일단 짐작이 사실로 드러나자 두 사람은 더욱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박격달봉 중턱의 한 동굴이었다.

어른 몇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와도 될 만큼 큰 동굴이 은밀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는 무인들이 불을 밝힌 채 삼엄하게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아가씨, 이곳부터는 특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흑노나 조심해.”

“그럼…….”

흑노가 먼저 움직였다.

야행복을 입은 흑노는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빠르게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동굴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흑노가 지척에 도달하기 전까지도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도, 존재감도 없이 동굴의 입구까지 스며든 흑노가 섬전처럼 움직였다.

쉬쉬쉭!

그의 손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무인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그런 그들의 이마에는 반짝이는 동전이 꽂혀 있었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일수절혼(一手絶魂)이라는 별호에 걸맞은 암기술이었다.

흑노는 심옥이 알고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암기를 잘 사용하는 인물이었다. 어떤 이들은 흑노가 당문의 무인들에 뒤지지 않는 암기술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심옥은 흑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평소에 흑노를 편하게 대하는 심옥이었지만, 이때만큼은 군말 없이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동굴은 무척이나 넓었다. 벽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마차가 오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동굴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점점 좁아졌고, 더 어두워졌다. 마치 지옥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여긴 도대체?’

심옥이 침음성을 흘릴 때였다.

“아가씨!”

흑노의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심옥의 눈이 흑노를 좇았다. 그렇게 해서 눈에 들어온 광경에 그녀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흑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지하 공동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하 공동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무인들의 감시 아래 땅을 파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하 공동에서 노역을 한 듯 그들은 무척이나 피폐해 보였다. 삐쩍 마른 얼굴과 먼지가 가득 쌓인 어깨, 그리고 거친 숨소리.

“거기 빨리 움직이지 못해?”

“요령 부리지?”

그들이 조금이라도 쉴 만하면 무인들의 채찍이 날아왔다.

쫘아악!

“아악!”

채찍이 살을 파고드는 매서운 소리와 비명성이 동시에 지하 공동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매섭던지 노역을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굳었다. 그러자 가차 없이 채찍이 날아들었다.

“크악!”

또다시 비명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허둥지둥 다시 곡괭이질을 했다.

감시를 하는 무인들은 가차 없었다. 조금이라도 태만하다 싶으면 바로 채찍을 날렸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비명이 지하 공동 안에 울려 퍼졌다.

심옥의 눈에 비친 지하 공동은 지옥이었다.

“도대체 이 안에 뭐가 있기에?”

처음엔 금이라도 캐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부들은 곡괭이질만 할 뿐 딱히 금을 캐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동안 실종된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모두 이곳으로 잡혀 온 것 같군요.”

흑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서역과의 교역을 위해 가는 도중 실종을 당했다. 그들 중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혈린살막의 막주인 심수명은 그에 의문을 품었다.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고 서역과의 교역이 위축되면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혈린살막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서천산장이 사람들의 실종과 연관이 있다는 단서를 찾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천산장의 성장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심수명은 심옥과 흑노를 파견해 실상을 파헤치게 했다.

정말 서천산장이 사람들의 실종과 연관이 있다면 응징할 명분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역시 서천산장이 실종의 배후에 있었구나.”

“문제는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이런 짓을 벌였느냐는 겁니다.”

흑노가 들끓는 분노를 애써 억누를 때였다.

“참으로 말을 안 듣는 아이군. 그렇게 별채에만 머물라고 말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상상치도 못했던 음성이 그들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두 사람이 뒤돌아보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그는 바로 서천산장의 주인인 은하성이었다. 그의 등 뒤에는 심복인 조혈산과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심옥이 은하성을 노려보았다.

“대체 저들을 왜 잡아 온 건가요? 어찌 이리 천인공노할 짓을.”

“어쩔 수가 없었네. 혈마(血魔)의 유진을 찾아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거든.”

“혈마라니? 설마?”

순간 심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은하성이 미소 지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네. 이곳엔 백여 년 전 신강 전체를 피로 물들였던 혈마가 잠들어 있네.”

중원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강에서 혈마라는 이름은 죽음과 동일시되었다.

오죽했으면 마교가 그를 영입하려 했다는 소문이 있을까.

하지만 혈마는 무슨 이유에선지 마교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오직 신강에서만 활동했다.

당시 혈마에게 신강성의 수많은 문파들이 멸문당했다. 그 때문에 신강의 공적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수많은 무인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유유히 사라졌었다.

당시 혈마에 의해 죽은 신강 무인들의 수가 적어도 천은 훌쩍 넘는다 한다. 일개인에게 당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였다.

때문에 아직도 혈마라는 이름은 공포로 신강성 무인들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은하성이 심옥과 흑노를 향해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듣지 말아야 할 사실을 들었군.”

“겨우 혈마의 유진 때문에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건가요?”

“겨우라……. 이걸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스릉!

은하성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적성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신도도 될 수 있고, 요도도 될 수 있는 것이 적성이었다.

“그건?”

“신도 적성, 혈마의 애병이었지. 얼마 전 이곳 혈마총에서 찾아낼 수 있었네.”

적성을 쥔 은하성의 전신에서 섬뜩한 살기가 폭사해 나왔다. 심옥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살기였다.

순간 흑노가 심옥의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 도망가십시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