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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7장. 모래바람이 피를 부른다(1)
“오늘로 망아지 다섯 마리가 더 늘었구먼. 경사야, 경사! 흐흐!”
“빌어먹을! 말들도 새끼를 가지는데 나는…….”
“대신 자네는 말 못지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잖은가? 자부심을 가지라고.”
“쓸데도 없는데 자부심은 무슨…….”
“하긴! 쓸데가 없구만. 역시 하늘은 공평해!”
“으하하! 그만 놀리게. 그러다가 춘생이가 울겠네.”
일을 끝낸 인부들이 한데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고 해 봐야 직접 담근 싸구려 곡주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즐거운 듯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웃고, 떠들고, 일상의 행복을 즐기고.
삶은 고되고 힘들지만,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고 있었다.
방진보도 그들 사이에 섞여 웃고 있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목마장 사람이 된 것처럼 적응을 했다.
사람들도 방진보를 좋아했다. 그가 해 주는 음식을 좋아했고,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특히 금소혜가 방진보를 좋아했다. 금소혜는 마치 병아리처럼 하루 종일 방진보의 뒤만 졸졸 따랐다.
방진보도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방진보의 얼굴엔 자연스럽게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인부 중 한 명이 진보를 불렀다.
“진보야.”
“예!”
“호남성으로 간다고 했지?”
“맞아요. 정확히는 동정호지만요.”
“힘들게 호남성으로 갈 게 뭐 있느냐? 그냥 이곳에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자.”
“예?”
“굳이 힘들게 호남성까지 갈 거 있느냐? 그냥 우리 함께 이곳에서 살자. 보기엔 척박해 보이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아. 물 좋고, 사람 좋고, 걱정할 거 없어. 단지 목초지를 찾아 유랑 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적응만 하면 그것도 할 만해.”
“맞아! 드넓은 초원에서 말들이 뛰어노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탁 트이지. 세상에서 복잡하게 살 거 없이 이곳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찾을 수 있어. 우리들처럼.”
다른 인부들까지 그에 동조해 떠들었다.
방진보는 잠시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이곳이 마음에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대로 평생을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장주인 금관천도 방진보를 극진히 아껴 주었고, 소혜도 친오빠처럼 따랐다. 아버지를 잃은 후 이런 행복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지금의 행복을 놓치기 싫었다. 하지만 왠지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방진보는 웃었다. 더욱 밝게 웃으려고 애를 썼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방진보의 행복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헤헤!”
방진보가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들어오자 담호가 보였다. 그는 침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왔느냐?”
“헤헤! 저 왔어요.”
방진보가 담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뭐하세요?”
“보고 있다.”
“뭘요?”
“그냥 모든 걸…….”
담호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모든 걸 본다니.”
방진보가 눈을 크게 뜨고 담호의 시선이 향한 창밖을 바라봤다.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객사였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목마장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와 그 위를 뛰어노는 말들, 그리고 사람들. 평상시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그런 풍경을 담호는 바라보고 있었다.
‘형의 눈엔 세상이 어떻게 비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담호가 어떤 생각으로, 또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진보야.”
“예! 형!”
“내일 떠날 거다.”
“벌써요?”
방진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담호가 그제야 방진보를 바라봤다.
“내키지 않는다면 넌 가지 않아도 좋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도 형하고 가야죠.”
“이곳에서의 삶도 나쁘진 않을 거다. 굳이 먼 길을 갈 필요 없어.”
방진보를 만난 후 담호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형?”
방진보의 치뜬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저를 버리고 가려고요?”
“버리는 게 아니다.”
“형!”
“이곳이 너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요.”
방진보가 고개를 힘껏 저었다. 그런 그의 뺨 위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짐을 주섬주섬 싸기 시작했다.
“저도 갈 거예요.”
“진보야.”
“형 따라가야죠. 말리지 마세요.”
담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확실히 알았다.
‘이곳의 평화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마치 수면 위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그 자신만 겉돌고 있었다. 이 세계는, 이 평화로운 세상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보내도 이곳에 자신이 있을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평화가 어울리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혼돈의 전장뿐.
담호의 혈관에 흐르는 피가, 본성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며칠은 그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떠나려 하는 것이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그리고 약속하셨잖아요. 천하제일루에 데려가 주기로.”
“그래!”
“그럼 약속 지키세요.”
“그래!”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지킬 것이다.
세상에 나와서 첫 번째로 한 약속이니까.
***
“목마장?”
심옥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달려와서 이곳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무작정 경공을 펼치다 보니 도착하게 된 것뿐.
“이곳에서 말을 구하면 돼.”
말을 구한 후 가욕관을 넘으면 적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다. 그런 후 혈린살막에 연락을 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겨우 적들의 추적을 늦췄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사실은 심옥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으로 확인한 서천산장의 전력은 그야말로 가공할 정도였다. 혈린살막의 전력으로도 감히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할 만큼.
특히 은하성의 무위는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흑노조차도 은하성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정도로.
그런 은하성이 혈마의 절학까지 얻는다면 신강에서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은하성과 서천산장을 막을 가능성이 있는 곳은 오직 혈린살막뿐이었다. 중원의 문파들은 중원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엔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해.”
간밤에 잔치라도 했는지 인부들이 목마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옥은 망설이지 않고 목마장의 목책을 뛰어넘었다. 목마장의 인부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심옥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심옥의 시선이 날카롭게 목마장을 훑었다.
그녀의 시야에 오롯이 서 있는 말 한 마리가 들어왔다. 목마장에 있는 수많은 말들 중 단연 돋보이는 존재감을 발산하는 검은 말.
어린 시절부터 말 등 위에서 살다시피 했던 심옥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검은 말이 명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말이라면?”
심옥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저 정도의 말이라면 하루에 능히 천 리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적들의 추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심옥은 지체하지 않고 검은 말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탁! 탁!
대지를 두어 번 박차는 것만으로 그녀의 몸은 벌써 검은 말 지척까지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심옥이란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지만, 검은 말은 미동조차 없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검은 말의 시선에 심옥은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말의 모습이 꼭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담을 넘어온 자신을 비웃는 듯했기 때문이다.
“대의를 위해서야.”
말을 내뱉고 나서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낱 미물에게 변명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자.”
심옥이 말의 고삐를 잡고 당겼다. 하지만 검은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심옥이 눈을 치켜뜨며 검은 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검은 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푸르르!
오히려 투레질을 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검은 말. 그에 심옥의 몸도 검은 말에 딸려 갔다.
심옥은 검은 말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러지 마. 신강의 운명이 달렸단 말이야.”
그녀가 애원했지만 검은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오만한 모습에 심옥은 기가 찼지만, 언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다시 검은 말의 고삐를 잡아끌려 할 때였다.
“누구시오?”
인부들 중 한 명이 그녀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그를 따라 다른 이들도 눈을 뜨고 있었다.
“이런!”
심옥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부가 검은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심옥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소리쳤다.
“도, 도둑이야.”
“도둑?”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인부들도 서둘러 일어났다.
졸지에 도둑으로 몰린 심옥이 이를 악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뻔뻔하게 나기기로 한 것이다.
심옥이 검은 말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그녀가 검은 말의 배를 다리로 찼다. 보통의 말들은 이러면 절로 달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탄 검은 말은 달랐다.
푸르르!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은 말은 바로 흑귀였다.
“빌어먹을 말 같으니라구.”
결국 심옥은 욕을 하면서 흑귀를 포기하고 다른 말을 찾았다.
“도둑이야.”
“말 도둑이 들었다.”
인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상처를 입었어도 그녀의 실력이라면 인부들은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말을 살 시간이 없어. 보상은 나중에.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야.’
그녀는 경공을 펼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말 등에 올라탔다. 흑귀보다 한참 떨어져 보이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가자.”
그녀가 말의 배를 박차려고 할 때였다.
“멈추시게.”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