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45화 (45/500)

 45

45화 7장. 모래바람이 피를 부른다(2)

세월의 흔적처럼 깊은 주름살이 인상적인 노인은 바로 금마장의 주인인 금관천이었다.

그가 심옥의 앞을 가로막은 채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소저는 뉘신데 함부로 남의 말을 훔치려는 것인가?”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비켜요.”

“그럴 수는 없네. 소저가 탄 말은 우리 만마장의 소중한 재산일세.”

“이 보상은 나중에 할게요. 신강의 안위가 달린 일이 우선이니 어서 비켜요.”

“허!”

금관천이 오히려 소리를 지르는 심옥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심옥이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급한 대로 있는 돈을 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모든 짐을 서천산장에 놓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돈도 그 안에 있었다.

지금 그녀는 완벽한 무일푼이었다.

“제길!”

결국 그녀는 값을 치르는 것을 포기하고 말을 달렸다.

도둑이라는 오명을 써도 어쩔 수 없었다. 보상은 나중에 하면 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심옥이 말의 배를 찼다. 그러자 놀란 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이쿠!”

놀란 금관천이 얼른 옆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말에 치일 뻔한 급박한 상황이었다.

“저, 저런?”

금관천이 겨우 상체만 일으켜 멀어지는 심옥과 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둑을 잡아라.”

인부들이 분분히 말 위에 올라탔다.

심옥의 날랜 몸놀림을 보고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금관천이 횡액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말은 그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두 눈 뜨고 말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한편 말을 달리는 심옥은 황당하고 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설마 자신이 말 도둑으로 몰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인부들이 원망스럽긴 했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해명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서 중원으로…….”

쉬익!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심옥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퍼억!

간발의 차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물체가 바닥에 박혔다.

살대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한지 아직도 꽁지깃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물체는 바로 화살이었다. 화살은 거의 반 이상 바닥까지 박혀 있는 상태였다.

“어디를 가려고 그럽니까?”

스산한 음성이 목마장에 울려 퍼졌다.

순간 심옥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벌써?’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결국은 저들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어둠의 장막을 헤치며 나타난 이들은 바로 서천산장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있는 이는 바로 조혈산이었다.

방금 전의 화살 역시 조혈산이 날린 것이었다. 조혈산이 들고 있던 활을 수하에게 넘겨준 후 심옥을 향해 다가왔다.

다그닥!

그가 타고 있는 말발굽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조혈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천산장은 그렇게 오고 싶을 때 마음대로 들어오고, 가고 싶다고 허락도 받지 않고 갈 수 있을 만큼 보잘것없는 곳이 아닙니다. 소막주.”

“크윽!”

“소막주 덕분에 본 산장이 꽤나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곳에 피해를 주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림없다. 내가 순순히 잡혀갈 것 같으냐?”

“쯧!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다니.”

“어차피 권주를 할 생각도 없었잖아?”

“적어도 세상엔 그렇게 알려지겠지요. 어차피 증인도 없을 텐데 무슨 상관있겠습니까?”

“흑노는 어떻게 됐지?”

“알고 싶으시면 순순히 저희를 따라오시지요.”

심옥이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 마.”

“쯧! 수하의 생사가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매정하시군요.”

조혈산이 혀를 찼다. 그런 그의 눈이 뱀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심옥은 애송이였다. 자신의 예측과 한 치도 다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조혈산이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소막주를 정중히 모시거라. 이대로 보내면 본장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질 테니.”

“존명!”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앞으로 나서서 심옥을 포위했다.

“이게 무슨?”

금관천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무인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수십 년이 넘게 말 장사를 하면서 사람 보는 안목을 키운 금관천이었다. 덕분에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 날카롭다고 자부했다.

그런 금관천의 눈에 비친 조혈산과 무인들은 살귀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에서 혈향이 짙게 느껴졌다.

수많은 이들의 주검 위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그의 주위로 인부들이 몰려왔다. 인부들 역시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것이다.

“자, 장주님.”

“모두 물러나거라. 조용히!”

금관천은 차분히 인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처럼 차분하지 못했다.

“챠앗!”

그 순간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심옥을 공격했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산하며 무기를 휘두르는 무인들을 보면서 금관천은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제발 조혈산이 자신과 인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금관천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조혈산의 시선이 인부들을 향했다.

“그나저나 보는 눈이 너무 많군.”

“우,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금관천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에 인부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혈산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좋은 처세술이야. 확실히 세상을 오래 살아서 그런지 눈치가 빠르군.”

“…….”

“그런데 어떡하나? 나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데. 특히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의 약속은 더더욱 믿지 않지.”

“그, 그건?”

조혈산의 시선이 심옥을 향했다.

심옥은 무인들에게 둘러싸여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전신이 피로 물든 그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당장이야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다. 조혈산이 그녀에게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그의 살기는 금관천과 목마장의 식구들을 향했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하필 재앙덩어리가 이곳을 찾아들었으니. 원래 세상이 그런 거야. 혼자만 잘살면 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지. 어떤 사람을 만나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기도 해. 너희들이 그런 경우야. 원망하려면 재앙을 몰고 온 저년을 원망해.”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말했잖아. 너희들의 죄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이유를 따져서 죽일 정도로 너희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쯧! 짜증 나는군. 이런 무지렁이들에게 일일이 대답해야 한다니.”

순간 조혈산의 등 뒤에 있던 무인들 중 일부가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금관천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모두 도망쳐!”

“우와악!”

인부들이 기겁해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를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따라붙었다.

스거억!

“으악!”

무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인부들이 죽어 나갔다.

목마장에 순식간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 웃고 떠들던 인부들에게 죽음의 손길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우, 우리가 왜?”

배가 길게 갈라진 인부의 눈에 억울한 빛이 떠올랐다.

요령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이제 어느 정도 살 만해졌는데,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살고 싶은데 복부를 부여잡은 손 사이로 자꾸만 내장이 흘러내렸다.

“흐윽, 흐윽! 들어가. 제발…….”

인부는 내장이 빠져나오지 않게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내장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후두둑!

바닥에 내장이 핏물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억울해!”

그것이 인부가 살아생전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동월!”

나이 든 인부가 그의 죽음을 보고 달려왔다. 유난히도 정이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다. 차마 그의 주검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쉬아악!

“아악!”

하지만 그는 죽은 인부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그보다 먼저 죽음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금관천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런 그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어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평생을 함께해 온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대대로 일궈 온 가업이 무너지고 있었다.

금관천은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어떻게?”

그때였다.

“할아버지!”

어린 소녀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금관천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소, 소혜야?”

금관천은 단숨에 목소리의 주인이 손녀 금소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돌리니 금소혜가 금중광과 함께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관천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도망가라! 소혜야.”

“할아버지!”

“어서!”

금관천의 처절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제야 금중광이 금소혜의 손을 붙잡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하지만 그들의 달음박질은 너무 느렸다.

금관천의 눈에는 너무 느려 답답하게 보였다.

서천산장의 무인 두 명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단숨에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이제 검이 휘둘러지면 저들의 목숨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사가 그런 거지.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어떤 시류를 타는 것이 중요한 거야. 불행히도 너희들이 탄 시류는 여기서 끝인 것 같군.”

조혈산이 혀를 차며 뒤돌아섰다.

한편 심옥도 금관천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목마장의 사람들을 구할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자신의 한 몸 보호하기도 급급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목마장을 찾아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심옥의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무공을 펼치면서 곁눈질로 금소혜 부녀를 바라보았다.

쉬악!

그들의 등 뒤로 사신의 검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곧 비명이 들려올 것을 알기에 심옥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쾅!

그 순간 대지를 향해 내리치는 뇌음(雷音)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륵! 쿵! 스륵! 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