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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6화 (4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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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7장. 모래바람이 피를 부른다(3)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인부들을 상대로 살육을 벌이던 무인들의 전신이 움찔거렸다. 마치 그들의 심장이 상대의 발소리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조혈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둠을 헤치고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장포를 걸친 사내, 한쪽 다리를 살짝 끌면서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 꽂혀 있었다. 일대를 장악한 사내의 강력한 존재감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주르륵!

무인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그들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등 뒤로 혈구가 보였다. 금중광 부녀를 죽이려던 무인이었다. 그의 상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누구도 무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뇌음이 들린 후 혈구로 변한 무인의 시신을 보았을 뿐이다.

단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나타난 절름발이 사내가 무인을 죽였으리라는 것뿐이다. 방법이나 수법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오른 손등에 묻은 피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모두가 얼어붙었다. 서천산장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심옥, 금마장의 식구들까지도.

그때 절름발이 사내 등 뒤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금소혜 부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금소혜를 품에 안고 다독이는 이는 바로 방진보였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절름발이 남자와 방진보를 번갈아 보던 금소혜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으아앙! 오빠!”

금소혜의 울음소리가 목마장에 울려 퍼졌다.

장내를 지배하던, 질식할 것만 같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다. 그제야 무인들이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조혈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혈산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가득했다.

“이거 고인이 계신 것을 몰랐구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소?”

“…….”

검은 장포의 남자, 담호의 시선이 조혈산을 향했다.

굳게 다문 입술, 어둠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가라앉은 눈빛, 그리고 얼굴 전체에 내린 깊은 음영이 그의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조혈산은 그런 담호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담호의 거친 눈빛 앞에 마치 전신이 발기발기 찢겨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무슨 놈의 눈빛이…….’

담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조혈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혈산의 입술이 바싹바싹 탔다. 그는 어서 이 침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발 어떤 말이라도 하란 말이다.’

그의 간절한 염원이 통했는지 마침내 담호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우리는 서천산장의 무인들이오.”

조혈산이 급히 대답했다.

그는 담호가 서천산장을 알고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담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조혈산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조혈산은 강한 사람이었다.

겨우 상대의 분위기 따위에 압도당해 이렇게 식은땀이나 흘릴 위인이 아닌 것이다. 그랬다면 은하성의 심복이 되어 서천산장을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조혈산은 진심으로 담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담호에겐 여타 무인에겐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포악한 짐승처럼 상대를 압도하는 기백과 심혼을 갉아먹는 듯한 거친 살기.

조혈산이 이제까지 보아 온 그 어떤 무인도 담호처럼 사람의 심혼을 기저에서부터 흔들어 대지 못했다.

조혈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런 자와는 적이 되어선 안 돼.’

상대는 적으로 만들면 후환이 끝이 없을 존재였다.

조혈산이 급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저 여인을 잡으러 왔소. 그녀만 데려가겠소.”

담호의 시선이 심옥을 향했다.

심옥은 혈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지친 기색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는 언젠가 그녀를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심옥은 경황이 없어 담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조혈산이 말했다.

“그녀는 본장에 침입해 큰 죄를 저질렀소. 그녀만 데려가게 해 준다면 곱게 물러가겠소.”

“마음대로?”

“무슨 말이오?”

“멋대로 침입해 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놓고 제멋대로 물러나겠다는 건가?”

마치 지옥의 무저갱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거칠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담긴 거친 살기가 사람들의 심혼을 옥죄어 왔다.

“으으!”

몇몇 무인들이 앓는 듯한 신음성을 내뱉었다. 인부들은 심혼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어떤 이들은 바지춤을 똥오줌으로 지리고 있었다.

담호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가 보여 주는 기도와 모습은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조혈산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크윽! 결국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겠다는 것이오? 후회할 텐데.”

“그래?”

“우리는 서천산장의 무인들이오.”

“서천산장이 그렇게 대단한가?”

“이제 보니 미친놈이 분명하구나. 감히 서천산장을 무시하다니.”

결국 참다못한 조혈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담호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대로 계속해서 기가 밀렸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이상 우리를 방해하겠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더 이상의 경고는 없다.”

순간 어둠 속에서 담호의 눈빛이 무섭게 일렁였다.

“경고는 보통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거지. 그런데 너희들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군.”

“크윽! 쳐랏! 놈을 죽이란 말이다.”

조혈산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의 명령을 들은 무인들이 일제히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얼굴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절박함이었다. 지금 담호를 어쩌지 못하면 뒷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들을 필사적이게 만들었다.

담호를 향해 달려드는 수십 명의 무인들.

그들의 손에 들린 살기 어린 무기. 그리고 그들의 눈빛이 비수가 되어 담호를 찔러 왔다.

그때까지도 담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해요.”

심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담호가 대지를 박찼다.

쾅!

뒤이어 뇌성이 터지고 방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누군가 혈구로 변해 뒤로 날아갔다.

비명도 없었다.

인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처음 알았다.

“무슨?”

조혈산이 눈을 크게 치떴다.

절룩이는 왼쪽 다리로 대지를 박찬다. 순간 담호의 몸이 선이 되어 공기를 갈랐다.

뒤이어 터져 나오는 굉음.

콰앙!

이어 찾아오는 누군가의 죽음

혈구가 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무인은 조혈산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웃는 미소가 일품이던 공달천이 주검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공달천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떠올라 있는 것은 두려움과 의문이었다.

충보에 이은 파성추.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직선의 기예.

투로는 투박했고, 보법은 더욱 단순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담호의 일격을 피하지 못했다.

쾅!

굉음이 터져 나온 후엔 여지없이 누군가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렇게 죽음은 예고도 없이 그들에게 찾아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조혈산이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가 데려온 무인들은 서천산장에서도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무인들이었다. 결코 저런 단순한 투로에 당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조혈산처럼 멀리서 본다면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담호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하지만 직접 담호를 상대하는 무인들이 느끼는 압박감과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거대한 늪에 빠진 것처럼 전신이 무기력했다. 발은 천근 족쇄를 채운 것같이 무거웠고,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 줄기 선을 그으며 단 한 걸음에 공간을 단축해 오는 담호.

피하고 막을 여유가 없었다.

담호의 돌진은 그들이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들이 담호의 공격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파성추가 그들의 몸을 강타하고 있었다.

콰앙!

“크아악!”

마치 거대한 바위가 전신을 짓뭉개는 듯한 충격에 무인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래도 그는 비명이나 질렀지, 다른 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쾅쾅쾅!

마치 폭죽처럼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사방으로 혈구가 튕겨 나갔다. 죽음의 폭풍은 순식간에 서천산장의 무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으으!”

조혈산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의 눈빛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마침내 담호의 미친 질주가 멈췄다. 누군가 그를 멈춰 세운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죽일 자가 없기에 담호 스스로 멈춰 선 것이다.

담호의 전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죽인 자들의 피로 목욕을 한 것이다.

심옥이 그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미친…….”

그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심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우웩!”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담호가 방금 전 보여 준 모습은 그녀가 평생 보아 온 그 어떤 광경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 쉽게 죽일 수 있지?”

담호가 무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담호는 인간 도살자였다. 그것도 최소한의 힘을 이용해 최대한의 효율을 얻을 줄 아는 숙련된 전문가였다.

담호의 시선이 조혈산을 향했다.

금마장에 난입한 이들 중 살아남은 이는 그와 심옥뿐이었다.

“크윽!”

담호의 눈빛에 질린 조혈산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담호와의 거리는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담호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인들을 죽일 때 담호는 질풍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리를 절룩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절름발이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혈산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이 더욱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다, 다가오지 마라.”

조혈산의 음성이 절로 떨려나왔다. 하지만 담호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나, 난 서천산장의 총관이다. 나를 건드리면 서천산장에서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다.”

“서천산장이 그렇게 대단해?”

“그렇다. 서천산장이야말로 신강의 진정한 패자이다. 어디 그뿐인지 아느냐? 중원에도 서천산장의 힘이 미친다. 서천산장을 건드리면 중원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

“그렇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나를 보내다오. 그러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자신의 말이 통하는 듯하자 조혈산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 순간 심옥이 외쳤다.

“절대로 그냥 그를 보내선 안 돼요. 서천산장은 평원을 횡단하는 상인들을 납치해서 강제로 노역을 시키고 있어요.”

“저 계집이…….”

조혈산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심옥을 노려봤다. 하지만 심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강제로 붙잡혀 노역을 하고 있어요. 천산의 박격달봉에서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요.”

그녀는 그야말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반응을 제일 먼저 보인 이는 바로 방진보였다.

“그럴 수가…….”

방진보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아비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있었던 방진보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서천산장이 아비의 죽음과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담호도 마찬가지였다.

담호의 눈빛이 불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너희였군.”

그의 한마디가 조혈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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