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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8장. 인간의 목숨보다 값비싼 정의는 없다(1)
“제기랄!”
조혈산이 이빨을 힘껏 깨물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담호에게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상대는 상식을 벗어난 괴물, 무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
조혈산이 몸을 뒤로 날렸다.
이렇게 된 이상 심옥을 잡아가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이 사실을 은하성에게 알려야 했다.
조혈산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슈슈슈슈!
순간 그의 양손에서 수십 개의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금전표(金錢鏢), 일명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암기였다.
동전처럼 생겼지만 그 절삭력과 관통력은 여느 암기보다 더 뛰어났다. 당연히 살상력 또한 비할 수 없었다.
조혈산은 금전표의 달인이었고, 이를 이용해서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는 이 한 수로 담호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라고 해도 놈은 절름발이. 경공을 펼치면 절대로 나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조혈산은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뒤돌아서 달려갔다.
공력을 끌어 올려 최대한의 속도로 경공을 펼치려 할 때였다.
위이잉!
등 뒤에서 갑자기 벌떼 수만 마리가 일제히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가 울리더니 감당할 수 없는 살기가 해일처럼 몰려와 그를 덮쳤다.
덥썩!
살기뿐만이 아니었다.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크윽!”
목을 옥죄어 오는 가공할 힘에 조혈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담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담호의 손은 강철 집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혈산이 내공을 끌어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뭍에 올라온 문어처럼 전신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몸이 팩 돌아갔다.
바로 눈앞에 담호의 얼굴이 있었다. 마치 석상을 깎아 놓은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이.
하지만 조혈산은 느낄 수 있었다. 담호의 살기를.
깊게 침잠된 깊은 눈동자가 일렁이며 광포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조혈산은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조혈산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전 공력을 실어 날렸던 금전표는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담호의 전신에는 그 어떤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조혈산은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사, 살려…….”
그 순간 담호가 손을 번쩍 치켜 올렸다. 조혈산의 몸도 덩달아 허공으로 떠올랐다.
공중에 뜬 조혈산의 다리가 버둥거리는 순간 담호의 손이 대지를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콰앙!
조혈산의 동체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목초지에 균열이 가고 조혈산의 몸이 바닥 깊숙이 박혔다.
“크헉!”
조혈산이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엄청난 충격에 전신이 해체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번쩍 들렸다. 그리고 다시 대지를 향해 내리꽂혔다.
쾅!
“으헉!”
조혈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쾅! 쾅!
담호는 계속해서 조혈산의 몸을 바닥에 처박았다. 그때마다 더욱 깊은 구덩이가 패였고, 조혈산은 혈인이 되어 갔다.
“끄으으! 살려…….”
조혈산은 애원했다.
하지만 담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 어떤 말도 없었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웠다.
제발 어떤 말이라도 해 줬으면. 차라리 죽고 싶냐고 물어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담호는 조혈산의 목을 움켜쥔 손을 다시 번쩍 치켜들 뿐이었다.
“제, 제발…….”
쿠와앙!
조혈산의 몸이 다시 한 번 구덩이에 처박혔다.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더 큰 굉음이 울려 퍼졌다는 것이고, 조혈산의 움직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끄으으!”
조혈산의 목을 비집고 가냘픈 피리 소리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하게 이어지던 숨소리가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담호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조혈산이 처박힌 웅덩이에 피가 고였다. 조혈산은 그렇게 자신이 흘린 핏물 속에 잠겨 숨을 거뒀다.
담호가 뒤돌아섰다.
“흐끅!”
순간 금소혜가 딸꾹질을 했다.
금소혜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 모두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담호의 모습에서 지옥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담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 무서운 서천산장의 무인들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었다. 감히 그의 시선조차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담호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단 한 명 방진보를 제외하고.
목마장 안에 질식할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담호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자신과 저들은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거듭된 고난에 인간성이 마모되고 어딘가 결여된 자신과 달리 저들의 감수성은 평범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이 만들어 낸 지옥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저들이 정상이었다.
자신이 비정상이었다. 그래서 원망하지 않았다.
담호의 시선이 심옥을 향했다.
심옥의 반응 또한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제아무리 무공을 익혔어도 그녀는 여자였다. 단 한 번도 이렇게 눈앞에서 지옥도가 펼쳐질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담호가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심옥은 담호가 두려웠다. 이 핏빛 지옥도를 연출한 담호가 미치도록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두 눈을 부릅뜨고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가 마침내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이곳으로 도주했지?”
먼지 가득한 광산에서 갓 올라온 듯 거칠게 갈라지고 탁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더욱 귀에 거슬렸지만, 감히 듣기 싫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조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이곳에서 말을 구해야 했으니까.”
“저들이 너를 따라올 줄 몰랐나?”
“…….”
심옥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담호의 눈빛이 거칠게 일렁였다.
“그럼 이런 일이 일어날 줄도 알고 있었겠군?”
“말했잖아요. 어쩔 수 없었다고. 나에겐 강호의 평화와 대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대의라? 그게 저들의 목숨보다 중요한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저들의 죽음으로 강호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면 그리 억울한 것은 아닐 거예요. 제발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서천산장의 야욕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 순간 담호의 커다란 손바닥이 심옥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꺄악!”
뜻밖의 일격에 심옥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녀의 뺨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심옥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엄청난 충격에 사물이 두세 개로 겹쳐 보였다.
“아!”
문득 입안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입안에 핏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침을 뱉자 부러진 이빨이 섞여 나왔다.
“어떻게?”
심옥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빨이 부러졌다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겐 더 큰 충격이었다.
자신은 결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담호가 그런 심옥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저들에게 사과부터 했어야 했다.”
“하지만 강호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었다구요.”
심옥이 변명처럼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담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들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정도로 강호는 대단한 곳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을……”
심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담호의 말은 그녀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호가 뒤돌아섰다. 더 이상 심옥과 대화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담호의 시선이 방진보를 향했다.
“가자.”
“예!”
방진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 담호였지만 이상하게 이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타인의 죽음 위에 존재하는 자.
어쩌면 그게 담호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진보가 목초지 한쪽에 있던 자신의 말을 끌고 와 짐을 실었다. 그사이 흑귀가 담호에게 다가왔다. 말없는 미물이었지만 담호가 떠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이다.
금마장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망연히 지켜봤다. 누구 한 명 감히 그들에게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담호가 흑귀 등에 올라탔다. 방진보도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말을 걸지 못했다.
담호가 흑귀에 탄 채 금관천에게 다가갔다.
“대, 대인…….”
금관천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전처럼 편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았어도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런 지옥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신경이 굵지 않았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소.”
“저는…….”
금관천의 시선이 무인들의 시선을 향했다. 그의 눈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들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중원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강에서 서천산장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서천산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깟 목마장 하나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담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대인?”
금관천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담호는 어느새 흑귀에 탄 채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담호와 흑귀의 뒷모습뿐이었다.
방진보가 서둘러 담호의 뒤를 따라붙었다.
“오빠.”
금소혜가 방진보를 불렀다.
눈물로 얼룩진 금소혜의 모습이 방진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남고 싶었지만, 담호를 따라가야 했다.
“나중에 꼭 들를게.”
“꼭 와야 해.”
금소혜가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었다.
“응!”
방진보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담호를 따랐다.
담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방진보가 물었다.
“그런데 형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대로 중원으로 가는 건가요?”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서천산장으로 간다.”
담호의 시선이 서쪽 하늘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