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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8화 (4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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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8장. 인간의 목숨보다 값비싼 정의는 없다(2)

“장주님.”

밤의 정적을 깨는 다급한 목소리에 은하성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오너라.”

그러자 다급히 문이 열리고 얼굴이 붉게 상기된 무인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장주님.”

“무슨 일이냐?”

“찾았습니다.”

“찾아? 뭐…….”

은하성이 질문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수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혈마의 유진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은하성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불끈 쥔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툭 튀어나왔다.

“물건은?”

“혈마총 근처에 있는 별원에 갖다놨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수하들이 가져올 겁니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그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격달봉으로 달려갔다. 경공을 펼쳤기에 혈마총이 있는 중턱까지 올라가는 덴 불과 한 시진이 걸리지 않았다.

박격달봉 중턱에 있는 별원은 은하성이 가끔 이용하는 곳으로 외인들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별원 안에는 혈마총을 감시하던 수하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 한가운데 커다란 궤짝이 있었다.

재질을 알수 없는 금속으로 만든 궤짝의 표면엔 승천하는 용의 문양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장주님!”

궤짝을 가지고 온 수하들이 은하성을 향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은하성은 그들을 본체만체 지나쳐 수레에 실린 궤짝을 향해 다가갔다.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혈마의 유진이.”

그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지난 몇 년 동안 오직 혈마의 유진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다. 수많은 이들을 납치해 와 강제로 노역을 시켰고,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 될 일도 수없이 자행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 냈다. 그야말로 집념의 승리였다.

손으로 궤짝을 쓸었다. 손끝에 우둘투둘한 문양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현묘한 기운.

은하성은 이 궤짝 안에 혈마의 유진이 있다고 확신했다.

“어디서 찾았느냐?”

“서쪽 구역에서 찾았습니다.”

“역시 그곳이었군.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인부들은?”

“일단은 혈마총에서 쉬게 하고 있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은하성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는 불길한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잘됐군.”

“그럼?”

“쓸데없는 흠집 따윈 남겨 둬서 좋을 게 없지. 날이 밝는 대로 정리해!”

“존명!”

수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혈마의 유진이 묻혀 있는 혈마총을 발굴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가는 서천산장은 신강의 패자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호의 공적이 되고 말 것이다.

“그 계집은 아직 잡지 못했나?”

“총관께서 직접 가셨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흠!”

은하성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총관 조혈산은 그가 가장 믿는 심복이었다. 하지만 왠지 불안했다.

“반드시 그 계집을 잡아야 해. 지금 이 시점에서 혈린살막이 개입하게 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니까. 만일을 대비해 그 녀석들을 대기시켜.”

“그 녀석들이라면?”

“알잖아.”

“아,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수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만큼 긴장을 했다는 증거였다.

은하성이 궤짝을 들었다. 커다란 바위만큼이나 무거웠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서 별원 내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등 뒤로 수하들의 시선이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은하성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 미소였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은하성이 궤짝을 내려놓았다.

우웅!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은하성은 느낄 수 있었다. 궤짝 안에서 느껴지는 강한 울림을.

울림은 분명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운명이다. 혈마의 유진은 애초부터 나에게 이어질 운명이었던 거야.”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은하성이 궤짝의 덮개를 열려 했다. 하지만 궤짝은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끈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궤짝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 하지만 은하성은 걱정하지 않았다.

혈마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 순간부터 혈마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했다.

그는 혈마에 대해 천하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혈마의 성격, 취향, 그리고 습관까지도.

“그는 피에 유난히 집착해서 혈마란 별호까지 얻었지. 그러니까 자신의 유진 또한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은 자에게 곱게 넘겨줄 리 없지.”

서걱!

은하성이 비수를 들어 자신의 손을 벴다. 비수가 그의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내며 피가 철철 흘렀다.

은하성은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를 궤짝으로 가져갔다.

주르륵!

피가 궤짝의 문양을 타고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치 피를 마시지 못해 환장한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흐흐! 그래, 마음껏 마시거라.”

은하성이 음소를 흘렸다.

피를 잔뜩 머금은 궤짝이 붉게 물들더니 갑자기 균열을 일으켰다. 균열은 급속도로 궤짝 전체로 번져 갔고, 이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안에 있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 낡아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책자 하나와 유난히도 붉은 구슬 하나였다.

“이건?”

은하성이 책자와 구슬을 양손에 쥐었다.

혈마진경(血魔眞經).

낡은 책자의 표지에는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드디어 혈마의 절학이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의 눈이 환희로 번들거렸다.

은하성이 급히 책자를 살폈다. 혈마의 절학이 분명했다. 은하성의 시선이 이번에는 손에 쥔 구슬로 향했다.

“그럼 이것은 당연히 영단이겠지?”

그는 생각보다 혈마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유진을 이을 자를 위해 내공을 증진시킬 영단까지 준비하다니.

은하성은 망설이지 않고 영단을 입에 넣었다. 침에 닿자마자 영단이 스르륵 녹아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들어갔다.

“으음!”

속에서 느껴지는 충만감에 은하성이 미소를 지을 때였다. 갑자기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불에 달궈진 칼로 배를 후벼 파는 듯한 고통에 은하성의 입이 떡 벌어졌다.

“끄으으!”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신음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뜨거운 불길이 은하성의 혈맥을 타고 전신을 휘돌았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기운에 은하성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방 안을 나뒹굴었다.

운공을 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머릿속에 피가 물렸다.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혈마, 이 개 같은 새끼야!”

고통을 참지 못한 은하성이 고래고래 혈마를 욕했다.

그는 혈마와 그의 조상들까지 싸잡아 욕했다. 그래도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으아악!”

그의 처절한 비명성이 별원에 울려 퍼졌다.

서천산장의 정문은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은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오직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서천산장을 향해 말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말 위에 타고 있는 뚱뚱한 소년 한 명.

“뭐지?”

무인들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방문객이 찾아오기엔 너무 이른 시각.

더군다나 며칠 전의 사건 때문에 오늘은 누구의 방문도 받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경비 무사들이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그러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말위에 타고 있는 뚱보 소년 뒤로 유난히도 검은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어둠이 아니라 검은 말과 검은 장포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 누구냐?”

무인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경계의 빛을 드러냈다. 무인들이 무기를 겨눴음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멈춰라.”

무인들이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낯선 방문객들이 서천산장의 정문 근처까지 다가온 후였다.

“여긴 외인이 함부로 접근할 곳이 아니다. 정체를 밝혀라.”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의 조장인 엽경이 앞으로 나섰다.

비록 정문을 지키지만 엽경의 무공은 서천산장 내에서도 제법 뛰어난 축에 속했다. 성격 또한 신중해서 어지간한 일에는 심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엽경의 심장은 미친 듯이 고동치고 있었고,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검은 말을 탄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그의 육체가 제멋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장주인 은하성에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압박감을 떨치기 위해 소리쳤다.

“누구냐고 물었다.”

“서천산장 맞나?”

검은 말을 탄 검은 옷의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 그런데 이상하게 공포스러웠다. 그 무감각함이,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그 눈빛이.

검은 말을 타고 있는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가 흑귀의 등에서 내렸다.

그가 발을 딛는 순간 엽경의 눈이 반짝였다.

‘절름발이?’

아주 살짝이긴 했지만 상대는 분명 발을 절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엽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곳은 서천산장이 분명하다. 외인이 함부로 찾아올 곳이 아니니 용무가 있으면 날이 밝은 후 다시 찾아와라.”

“장주는 안에 있나?

“장주님을 왜 찾느냐? 장주님은 너같이 정체가 불분명한 자를 만나지 않는다.”

“그래?”

담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 순간 정문의 무인들이 움찔했다.

‘무언가 일어난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거의 같은 순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의 시선은 담호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전신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담호에게서 시선을 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대의 몸에서 느껴지는 그 어떤 불길한 기운이 그들의 시선을 꽉 잡고 놓아 주지 않고 있었다.

담호가 잠시 서천산장을 바라보았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이 켜져 있어 불야성을 연상케 했다.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들 중에 서천산장의 주인도 섞여 있을 것이다.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오지 않겠다면 나오게 해 주지.”

“무슨?”

쾅!

그 순간 굉음이 울려 퍼지고 엽경의 몸이 뒤로 훌훌 날아갔다. 아득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엽경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내가 날아가는 거지?

그리고 이 고통은…….

콰앙!

그 순간 엽경의 몸이 정문과 부딪쳤다. 정문이 박살 나 부서지고, 엽경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됐다.

고깃덩이가 된 엽경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조, 조장님이…….”

“놈이 조장님을 죽였다. 공격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무인들이 담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수십 명이 단 한 명을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진보는 그 한 명을 걱정하지 않았다.

‘형!’

그 순간 담호가 움직였다.

콰쾅!

연이어 굉음이 터져 나오고 단 한 명을 목표로 공격해 오던 수십 명의 무인들이 피 떡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서천산장에 지옥도가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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