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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9화 (4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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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8장. 인간의 목숨보다 값비싼 정의는 없다(3)

정문의 소요가 잠들어 있던 서천산장을 깨웠다.

댕댕댕!

비상종이 울리고 수많은 무인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저, 정문 쪽에 적의 습격입니다.”

“혈린살막인가?”

무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분노한 얼굴로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적의 정체를 알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적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릴 정도로 그들은 무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화악!

갑자기 전방에서 뜨거운 광풍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살기와 열기가 범벅이 된 뜨거운 바람은 그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쾅쾅!

“으아악!”

“사, 살려 줘!”

굉음과 비명이 한데 섞여 새벽하늘에 울려 퍼졌다.

“무, 무슨?”

뒤쪽에 있던 무인들이 눈을 부릅떴다.

단 한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폭주하는 들소처럼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검은 장포의 남자. 그리고 그를 덮쳐 가는 수많은 무인들.

어둠을 가르는 수많은 칼날들. 날카롭게 휘몰아치는 검기와 검풍.

그 모든 것이 단 한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돌진을 저지하기 위해.

‘막을 수 있다.’

‘놈도 인간이야. 칼에 베이면 놈도 상처가 생길 거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의 희망은 바닥에 떨어진 질그릇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쾅!

악마의 뇌성이 울려 퍼지면 여지없이 누군가 부서져 날아갔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와 함께.

질 좋은 강철을 수백, 수천 번 두들겨서 정련한 무기들도 남자의 주먹 앞에서는 썩은 수수깡이나 다름없었다.

“크윽!”

“무, 무슨?”

순식간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피바다 속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담호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정문을 돌파해 본채를 돌파할 때까지 담호가 펼친 수법은 오직 충보와 파성추뿐이었다.

그 외엔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의 주먹질도 필요 없었다. 일격에 한 목숨이 사라졌으니까.

담호의 전신이 피로 물들었다. 그중에 자신의 피는 없었다. 그가 뒤집어쓴 피는 누군가의 생명이었다.

피칠갑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빛이 일렁였다. 유난히도 검은 담호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달려들던 무인의 손과 발이 굳었다.

맹세코 무인은 단 한 번도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의 눈빛이 이럴까? 하지만 무인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의식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콰직!

무인의 몸이 담벼락에 처박혔다. 그의 몸 위로 부서진 담벼락이 덮쳤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서천산장의 내당주 조등명이 외쳤다.

“너, 너는 누구냐? 대체 서천산장에서 왜 이런 살육을 자행한단 말이냐?”

처절한 그의 외침이 통했는지 담호가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조등명을 향했다.

“네가 장주인가?”

“자, 장주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으시다.”

“그럼 불러와.”

“장주님은 네가 부른다고 함부로 오시는 분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여도?”

“무슨?”

“그러면 나오겠지?”

“대체 서천산장과 무슨 원한을 졌다고 이러는 거냐?”

“그러는 너희들은 왜 상인들을 납치했지?”

“서, 설마 그 때문에?”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조등명이 눈을 감았다.

언젠가 이런 일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고, 원한이 쌓이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조등명은 어쩌면 오늘이 그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구나.’

그때 담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알겠지? 그럼 장주를 불러와.”

“아까도 말했지만 장주는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

“어디에 있지?”

담호의 질문에 조등명이 자신도 모르게 박격달봉을 바라보았다. 담호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기에 있단 말이지?”

어둠 속에서 담호의 눈이 번뜩였다. 그 순간 조등명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아, 아니다. 장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다.”

“…….”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담호의 발걸음이 박격달봉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어이, 거기 멈추시지.”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그냥 가려고?”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거친 살기가 서천산장을 뒤덮었다. 동시에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머리와 수염도 제대로 정돈하지 않은 남자들. 마치 낭인과 같은 행색을 한 이가 이백여 명이 넘었다. 한눈에 봐도 서천산장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어슬렁 걸어 나왔다.

칠 척의 거구에 어깨에 거대한 방천화극을 걸친 남자의 전신에서는 보기만 해도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박력이 줄기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담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러자 우두머리 남자가 씨익 웃었다.

“대단한 놈이구만. 서천산장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어.”

“너는 누구지?”

“나? 사평강이라고 한다.”

“사평강?”

“그래!”

스스로를 사평강이라고 밝힌 남자가 히죽 웃었다. 그의 주위로 낭인 행색의 무인들이 어슬렁거리면서 몰려들었다.

이백여 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니 그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평강이 자신의 주위에 몰려든 남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놈 덕분에 오랜만에 혈사풍 전체가 모이는군.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혈사풍?”

“그래! 한때 그런 이름으로 불렸었지. 그리고 네놈을 피 모래로 만들어 줄 이름이기도 하지.”

한때 사막의 공포라 불렸던 혈사풍.

서천산장과 은하성이 나서서 멸망시켰다는 그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도 서천산장 내부에.

서천산장의 가장 큰 비밀이 드러나고 있었다.

혈사풍으로 신강성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후 서천산장이 나서서 수습함으로써 민심과 권력을 얻었다.

혈사풍은 서천산장의 숨겨진 검이었다. 자칫 세상에 알려졌다가는 주인도 벨 수 있는 양날의 검. 그래서 은하성은 이제까지 혈사풍을 꼭꼭 숨겨 두었던 것이다.

담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관심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단 하나 박격달봉이었다. 그곳에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있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사평강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혀를 찼다.

“큿! 이렇게 무시를 당해 보기는 처음이군.”

“대형! 너무 오래 쉬었다니까. 그러니 이런 어린 새끼한테도 무시를 당하지.”

“차라리 잘됐지. 이번 기회에 혈사풍의 무서움을 다시 알려 주자고.”

혈사풍의 무인들이 각자 떠들어 댔다.

그들은 담호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자기들끼리 웃으며 할 말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전신에서는 살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에 같은 편인 서천산장의 무인들마저 주춤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저 도살자들이 움직이다니.’

‘서천산장이 피바람에 휩쓸리겠구나.’

비록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지만 혈사풍을 막기 위해 나섰었다. 그곳에서 혈사풍이 만들어 낸 처참한 현장을 직접 목도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그렇게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처참한 참극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담호가 더 무서웠다.

조등명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저들이 과연 저 악마를 막을 수 있을까?’

조등명은 제발 혈사풍이 담호를 막아 주길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혈사풍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혈사풍은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담호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몸은 조금씩 이동해 포위 진용을 완성하고 있었다.

원형으로 담호를 포위한 형태.

혼천참마진(混天斬魔陣).

소수의 정예 무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법(陣法)이었다.

혼천참마진의 특징은 이백여 명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며 연환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혈사풍을 이끄는 사평강조차도 과연 쓸 일이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던 진법이지만,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 같았다.

겉으로는 담호를 비하했지만, 그가 보통의 무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인 한 명이 서천산장을 초토화한 것도 모자라 이런 공포심을 심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혈사풍 무인들이 혼천참마진을 펼치기 위한 최적의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다 짖었으면 덤벼.”

담호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개 취급하는 담호의 음성에 혈사풍 무인들이 분노의 빛을 드러냈다. 특히 사평강의 분노는 대단했다.

“혼천참마진 개진(開陣). 놈을 천참만륙한다.”

“명(命)!”

이때까지 웃고 떠들던 혈사풍 무인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일제히 움직였다.

혼천참마진은 단순한 합격진이 아니었다. 하늘과 땅의 현묘한 이치를 담았기에 개개인의 능력과 위력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담호의 전신에 가공할 압력이 가중됐다.

뿌드득!

어깨를 짓누르는 태산 같은 기운에 담호의 양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어마어마한 압력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주변의 물체들이 우지끈거리며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단단한 돌멩이가 잘게 부서지고, 화려하던 조경수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한가운데 담호가 있었다.

위이잉!

마치 톱니바퀴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혼천참마진이 담호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횡으로, 종으로…….

그들의 복잡한 움직임이 담호의 시선을 현혹시켰다.

검이 불쑥 튀어나와 숨통을 노리고, 날카로운 도가 팔다리를 향해 날아왔다.

“형!”

뒤늦게 달려온 방진보가 그 광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무공을 모르는 방진보가 보기엔 금방이라도 담호의 몸이 갈가리 찢겨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담호가 움직였다.

쾅!

“크헉!”

굉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튕겨져 나가는 혈사풍의 무인. 그의 상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담호의 팔뚝을 타고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생명이 또다시 담호에 의해 사라졌다. 그래도 담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난 괴물이 된 것인가?’

담호의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상관없었다.

인간이 아니어도, 괴물이 되었어도.

애초부터 그가 선택한 인생이 아니었다.

이렇게 괴물이 되길 원하진 않았지만, 괴물의 길을 걷게 된 것에 대한 후회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팟!

그가 대지를 박찼다.

담호를 향해 네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이백 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합공을 하고 있었지만, 한 번에 직접적으로 그를 공격할 수 있는 이의 수는 겨우 너덧 명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혼천참마진이라는 절세의 진법이라도 그 수는 크게 늘지 않는다.

최대한 잡아 봐야 여섯 명. 그러니까 한 번에 여섯 명씩만 상대하면 된다.

이백 명을 여섯 명으로 나누면 서른네 번. 겨우 서른네 번만 싸우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담호의 셈법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콰앙!

충보에 이은 파성추 한 방에 또다시 누군가 짓이겨져 튕겨 나갔다. 거의 동시에 대여섯 명의 무인들이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나.”

혼천참마진의 제일선이 붕괴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제이선이 담호를 향해 공격해 왔다.

여섯 방위에서 날아오는 여섯 개의 칼날.

피할 곳도 없었고, 막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잡았다."

“놈!”

여섯 무인들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오르는 순간 담호의 몸이 기묘하게 굽었다.

마치 풍뎅이의 등처럼 변한 그의 몸체에 여섯 줄기 도격이 격중했다. 도격을 날린 무인들은 이 한 수에 담호의 몸이 산산이 찢겨 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티티팅!

그 순간 미약한 소성과 함께 그들의 믿음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담호의 육체에 부딪친 날카로운 도가 어처구니없게도 사선으로 빗겨 나갔기 때문이다.

금구자(金龟子).

사마귀의 날카로운 앞발 공격을 막던 풍뎅이의 둥근 몸체에서 영감을 얻은 담호만의 방호기공이었다.

암혼심공과 극한까지 단련된 육체의 조화가 이뤄 낸 기적이었다.

무인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오르는 순간 강력한 풍압이 그들을 덮쳐 왔다.

콰쾅!

재앙과도 같은 일격이 그들의 전신에 격중 했다.

순식간에 고깃덩이가 되어 나뒹구는 여섯 명의 무인들.

“둘!”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나직했지만 너무나 또렷하게 사람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 녀석!”

사평강이 눈을 치뜨는 순간 담호의 음성이 다시 전장에 울려 퍼졌다.

“세 번째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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