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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8장. 인간의 목숨보다 값비싼 정의는 없다(4)
“흐흐!”
은하성의 입술을 비집고 기과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온몸에서 활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몸 안에서 활화산이 터진 것 같았다.
밤새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혈마가 남긴 영단에 담긴 힘은 실로 엄청나서 그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재구성했다.
강제로 근육과 뼈가 제멋대로 이동했다. 혈마의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적의 육체로 탈바꿈을 시켜 준 것이다.
대신 은하성은 지옥을 경험했다. 근육이 수십 차례나 찢겨 나갔다가 아물고, 뼈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전신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밤새 경험한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육체의 재구성과 엄청난 내공을 얻었다. 이만하면 어마어마하게 남는 장사였다.
“좋군!”
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전보다 키가 두 치는 더 커져 있었고, 어깨도 더 넓어져 있었다. 근육은 더욱 탄탄하면서도 유연해졌다.
은하성이 한쪽에 놓인 도를 집었다.
혈마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인 적성이었다.
우웅!
신도 적성이 그의 손에서 울었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는 커다란 도명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이제야 네가 나를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는구나.”
이전에도 적성은 도명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은하성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한 것처럼 큰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적성에서 느껴지는 힘 또한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도라는 명성에 어울릴 만큼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은하성은 몸과 도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에 도취되었다.
지금이라면 산이라도 부수고, 하늘이라도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강력한 열기가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몸이 근질거렸다.
이 욕구를 한시라도 빨리 풀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몸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마침 은하성은 그런 공간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하성이 거처를 나왔다. 그러자 심복이 다가왔다.
“장주님, 괜찮으십니까?”
“아주 좋다.”
그가 걸음을 옮겼다. 심복이 급히 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어디 가십니까?”
“혈마총.”
“그곳엔 왜?”
“혈마에게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그를 위한 제(祭) 정도는 올려 줘야지.”
은하성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 걷지 않아 거대한 지하 공동으로 통하는 입구가 나타났다. 그가 혈마총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린 혈마총의 입구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은하성은 바람에 실린 음습한 냄새를 맡았다.
“흐음! 좋군. 좋은 느낌이야.”
은하성이 혈마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백 번도 더 와 본 곳이었다. 때문에 그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장주님.”
혈마총을 지키고 있던 부하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여 그를 맞이했다. 그들 너머 수많은 인부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췌하고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한때는 커다란 꿈을 안고 서역으로 향했지만, 이제는 꿈도 꺾이고 정신에도 큰 상처를 입어 두 눈에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은하성이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그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비칠거리며 걸어 나왔다.
다 찢어진 검은 야행복을 입은 노인은 바로 심옥의 호위인 흑노였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혈마총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소? 은 장주.”
“하늘? 아직도 그런 것을 믿는 종자들이 남아 있었나?”
“혈린살막이 움직일 것이오. 그때가 돼서 후회하지 마시오.”
“글쎄! 누가 후회하게 될까?”
은하성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어린 그의 미소에 흑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전이라면 혈린살막이 껄끄러웠겠지. 하지만 혈마의 유진을 얻은 이상 나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혈린살막일지라도.”
“기어이 혈마의 유진을 찾아냈단 말이오?”
은하성이 대답 대신 적성을 꺼내 들었다.
우웅!
적성이 흘리는 도명이 요사스럽게 혈마총에 퍼져 나갔다. 적성을 쥔 은하성의 기도 또한 몇 배가 증폭되었다.
그런 은하성의 모습에 흑노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혈마는 자신의 후인을 위해 영단을 남겼지. 나는 그가 남긴 영단을 복용했고. 덕분에 이런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은하성이 잡혀 온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은하성을 바라봤지만 도망칠 공간은 없었다.
은하성이 그들 중 한 명을 바라봤다.
“사, 살려 주…….”
푸욱!
그 순간 은하성이 적성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끄으!”
가슴을 찔린 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은하성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은하성의 짙은 미소뿐이었다.
꿀렁!
그 순간 그의 가슴이 크게 요동을 쳤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가슴에 꽂힌 적성이 요동을 치는 것이다.
남자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전신의 핏기가 싹 사라지면서 얼음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저, 저?”
흑노가 눈을 부릅떴다.
남자가 창백해지는 만큼 적성이 더욱 붉게 빛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적성에 찔린 남자의 가슴에서는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적성이 남자의 피를 흡수하는 것이 분명했다.
“요, 요도(妖刀)구나.”
“혈마가 남긴 유산이야. 이렇게 타인의 피를 흡수함으로써 내공을 증폭시키는 효능이 있지.”
“미친!”
“혈마는 천재였어. 이런 마공과 마물을 만들어 내다니.”
은하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혈마가 남긴 영단을 복용한 후 절로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스스로 걷듯이, 어린 새가 본능적으로 날갯짓을 하듯이 말이다.
은하성이 적성을 뽑자 남자가 힘없이 쓰러졌다. 피를 모두 빨린 듯 남자의 시체는 푸석푸석했다.
“사, 살려 주시오!”
“죽고 싶지 않아.”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주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푸욱!
“크허헉!”
다시 누군가 적성의 제물이 되었다.
피를 모조리 빨린 남자가 목내이처럼 변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크윽!”
흑노는 그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이런 미친 짓을…….’
세상에 알려진 은하성은 혈사풍의 혈란을 잠재운 대협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잔인무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적성의 제물이 되어 쓰러졌다. 그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흐흐!”
반대로 은하성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의 눈은 살기로 번들거렸고, 이성은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광기에 잠식된 은하성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흑노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미친 짓을 멈추시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오?”
“왜? 내가 이들을 살려 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들도 사람이오.”
“그래서?”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흐흐! 아까부터 봐줬더니 주제 넘는 말만 하는군. 그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은하성이 살기로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들거리며 흑노에게 다가왔다. 은하성의 손에 들린 적성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흑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소주…….’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최후를 기다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절대로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은하성이 그런 흑노에게 적성을 찔러 넣으려 할 때였다.
쿠웅!
갑자기 나직한 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혈마총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성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설혹 인식한 자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그저 그런 소리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은하성은 달랐다.
쿠웅!
다시 한 번 공기를 타고 저 멀리서 소성이 들려왔다. 순간 은하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에겐 소음에 불과한 소성이 그의 심령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온다.’
혈마의 내공을 물려받은 그의 심령을 흔들 만큼 강렬한 무언가가.
은하성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알아보고 오너라.”
“존명!”
부하들이 대답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흑노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뒤돌아선 은하성의 등이 보였다.
잔뜩 경직된 은하성의 뒷모습만 봐도 무언가 경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흑노는 은하성의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쾅!
흑노의 귀에도 미약한 소성이 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워진 곳이었다.
쾅! 쾅!
소성이 울려 퍼지는 간격이 더욱 짧아졌다. 그리고 더욱 커졌다.
‘뭐냐?’
무언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흑노의 주름살 아래 자리한 눈동자가 떨렸다.
“뭐, 뭐야?”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의 얼굴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어렸다.
그들 중 몇 명이 참지 못하고 동혈 쪽으로 다가갈 때였다.
콰앙!
갑자기 굉음과 함께 무언가 동혈 안쪽으로 날아왔다.
“히엑!”
무인들이 기겁을 하며 양쪽으로 피했다. 동혈 바깥에서 날아온 물체는 지하 공동 벽에 부딪친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이건?”
서천산장의 무인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물체를 보고 기겁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져 있었지만, 그것은 방금 전 외부에서 일어난 상황을 파악하러 나간 동료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혈마총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심상치 않은 조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인부들은 물론이고, 서천산장의 무인들까지도.
오직 단 한 명 은하성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표정으로 동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하성이 다시 부하들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스륵! 쿵! 스륵! 쿵!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혈마총 안에 울려 퍼졌다.
무언가 바닥을 찍고, 다시 바닥을 끄는 소리였다.
평상시라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그런 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심장은 미친 듯이 고동치고 있었다.
사람의 심장을 불길하게 자극하는 소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벽에 부딪치면서 소리는 불길하게 증폭되고 사람들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그 순간 동혈 너머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자. 원래 검은색이었던 장포는 피에 물들어 붉은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지독한 혈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내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혈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다 아찔해져 왔다.
사내가 여전히 발을 끌면서 동혈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그의 정체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이는 바로 흑노였다.
서천산장에 오르기 전 객잔에서 만났던 사내.
“담호?”
그는 담호였다.
담호의 전신에서는 강렬한 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의 온몸을 뒤덮은 피가 열기에 증발되면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적이 찾아왔다. 담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한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담호의 시선이 혈마총 안을 훑었다.
강제로 잡혀 와 오랫동안 노역했던 사람들,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서천산장의 무인들, 그리고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흑노.
마지막으로 전신의 피를 모두 적성에게 빨린 채 목내이처럼 변한 시신들에게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단 한 번 훑어보았을 뿐이지만, 담호는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파악했다.
“네놈은 누구냐?”
그때 은하성의 목소리가 담호의 귓전에 울렸다.
스륵!
마침내 담호의 시선이 은하성을 향했다.
광기로 붉게 물든 두 눈과 한없이 깊이 침잠된 검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은하성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담호의 눈에서 본 것은 지옥의 무저갱과도 같이 끝을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이었다.
은하성은 단 한 번도 담호와 같은 눈빛을 한 자가 있을 거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제껏 수많은 이들을 만나 봤지만, 누구도 담호와 같은 눈빛을 한 자는 없었다.
우웅!
담호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적성이 미친 듯이 도명(刀鳴)을 흘려 대고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은하성을 빤히 바라봤다. 은하성도 지지 않고 담호를 노려보려 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담호의 눈빛에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담호의 눈빛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가래가 낀 것처럼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천산장의 장주 맞나?”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순간 담호의 눈에 어린 짙은 어둠이 일렁거렸다.
“드디어 만났군.”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은하성은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벼락을 맞은 듯 머리끝부터 발끝을 관통하는 한 줄기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 순간 담호가 움직였다.
그 어떤 대화도 없이 다짜고짜 달려드는 담호에게 반응해 은하성이 적성으로 전면을 가렸다.
“이런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