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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1장. 신강(新疆)에 혈성(血星)이 내려오다(1)
수백여 명의 무인들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검과 도, 그리고 창으로 중무장한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무인이 거대한 깃발을 들고 있었다.
혈린(血鱗)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는 거대한 삼각형의 깃발.
그들은 바로 혈린살막의 낭인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산하는 사십 대 중후반의 장년인이 있었다.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과 각진 턱, 그리고 강렬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그가 바로 혈린살막의 막주인 심수명이었다.
별호는 혈린귀도(血鱗鬼刀).
혈린살막이라는 이름도 그의 별호에서 따올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심수명의 곁에는 아리따운 소녀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심옥이었다.
‘아빠.’
그녀가 흘깃 심수명을 바라보았다.
심옥이 심수명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심옥과 흑노에게서 연락이 끊기자 심수명은 즉시 추적을 개시했고, 목마장에서 심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심옥은 서천산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심수명에게 자세히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심수명은 분노했다.
“감히 신강성에서 그따위 일을 저지르다니.”
심수명은 곧장 전력을 이끌고 서천산장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엣가시처럼 거치적거리던 서천산장이었다. 언제고 정리할 거라 생각해 왔기에 그의 결정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서천산장을 제압하면 신강성의 패자로 등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서천산장의 모습이 보였다.
심수명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꺼내 들며 외쳤다.
“적진이다. 이대로 단숨에 치고 올라간다.”
“존명!”
촤앙!
대답과 함께 혈린살막의 낭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이 속도를 높였다.
인마일체(人馬一體)의 진격은 혈린살막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술 각오로 거칠게 말을 달렸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들의 기대와 달리 서천산장의 정문을 너무나 쉽게 통과했다. 그 누구도 그들을 막아서지 않았던 것이다.
서천산장의 내부에 들어선 순간 심수명과 혈린살막의 낭인들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헉!”
“이게 무슨?”
낭인들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한 폭의 지옥도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지가 기형적으로 꺾인 채 숨을 거둔 사람, 안면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함몰된 시신. 어떤 이는 아예 상반신 전체가 날아가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전신의 뼈가 부서져 문어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있었다. 혈향이 어찌나 지독한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다 아찔해져 왔다.
혈린살막의 낭인들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런 지옥도를 직접 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는 혈린살막의 막주인 심수명조차도.
“이게 대체…….”
심수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혈린살막과 더불어 신강의 패자를 자처할 만한 곳이 바로 서천산장이었다. 때문에 심수명조차도 서천산장을 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강한 서천산장이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죽음뿐이었다.
그때였다.
“그 남자야. 그 남자가…….”
심옥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누구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자의 직감으로 이 학살을 누가 했는지 알아차렸다.
심수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라니?”
“여기에 생존자가 있습니다.”
그 순간 들려온 수하의 목소리가 심수명의 관심을 돌렸다. 그가 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으음!”
심수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생 수라장을 전전한 심수명이었다. 그런 그조차도 처음 보는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 남자가 벽에 처박혀 있었다. 사지가 처참하게 짓이겨진 채 가슴이 움푹 함몰된 남자. 부러진 갈비뼈가 살갗을 뚫고 튀어나와 있어 보기에도 처참했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그런 상처를 입고도 남자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다. 혈린살막의 낭인들은 그런 남자를 질렸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흐으!”
혈구로 변한 남자의 입에서 기괴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미약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심수명이 남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누군가?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남자가 겨우 눈을 뜨고 심수명을 바라봤다. 문득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흐으으! 심……수명, 혈린살막의 주……인이군.”
“나를 아는가?”
“모를…… 수가 없지. 그래도 내가 명색이 혈……사풍의 대주인데.”
“혈사풍의 대주? 역시 혈사풍은 서천산장이 만들어 낸 단체였군.”
심수명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짐작은 했던 내용이었지만, 직접 확인하니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흐흐! 악마가 찾아왔지.”
“악마?”
“그래! 놈은 악……마야.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
혈사풍의 대주 사평강의 몸이 푸들거렸다. 담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육체가 제 멋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놈에게 모조리 죽었어. 서천산장의 무인들도, 혈사풍도…….”
“악마라니?”
“흐으! 보면 알게 될 거야. 놈은……. 크흑!”
담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주르륵!
갑자기 사평강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찢겨져 나간 상처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섞여 내려 피눈물처럼 보였다.
갑자기 사평강이 경련을 일으키며 입에서 게거품을 뿜어냈다. 하지만 발작도 잠시, 이내 그의 몸이 잠잠해졌다. 절명한 것이다.
“으음!”
사평강의 죽음 앞에 심수명은 할 말을 잃었다.
혈린살막 낭인들의 어깨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혈사풍이라면 그래도 한때는 공포로 사막을 지배했던 이름이었다. 그런 혈사풍의 대주가 공포를 못 이겨 발작을 일으키다니.
심수명이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이 보였다.
호기롭게 서천산장으로 진격해 들어왔던 이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시선에 처음의 호기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서천산장 전체에 흐르는 죽음의 기운이 그들을 위축시킨 것이다.
‘좋지 않군.’
심수명이 이를 악물었다.
분위기가 최악으로 떨어졌다. 혈린살막의 전력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천산장 내에 흐르는 죽음의 분위기가 낭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혈마총으로 간다.”
“아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모두 출발해.”
“예!”
대답을 하는 혈린살막 낭인들의 목소리엔 맥이 빠져 있었다. 심수명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은하성의 목은 내가 직접 베어야 해. 그래야만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차릴 수 있어.’
서천산장을 초토화시킨 자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심수명은 자신의 무공을 믿었다.
혈린귀도라는 별호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수백 번의 치열한 생사투 끝에 얻은 빛나는 선물이었다. 그가 살아온 투쟁의 역사가 혈린귀도라는 별호에 담겨 있는 것이다.
“가자!”
심수명이 박격달봉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그 뒤를 심옥과 낭인들이 뒤따랐다.
“으음!”
심옥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박격달봉으로 오르는 길목에도 수많은 시신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신은 하나같이 참혹했다.
‘그 남자야. 그 남자가 분명해.’
말을 훔치기 위해 들어갔던 목마장에서 조우했던 사내. 그에게 뺨을 얻어맞고 이빨이 부러졌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전신이 떨려 왔다.
심옥이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애써 공포를 떨쳐 버리려 애를 썼다.
‘지금 내 곁엔 아빠도 있고, 혈린살막의 무인들도 있어. 굳이 그를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한 거였으니까.’
심옥은 애써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심수명을 따라 경공을 펼쳐 험준한 박격달봉을 올랐다. 그래도 한 번 와 본 곳이었기에 눈에 익었다.
심옥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으음!”
심수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높였다.
저 멀리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동혈이 보였다. 혈마총이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모두 조심하라.”
“예!”
“옥이는 내 뒤에 바싹 붙어 있거라.”
“알았어요.”
심옥이 심수명의 등 뒤로 바싹 붙었다.
평상시 그토록 든든하게 생각했던 심수명의 넓은 등이 보였다. 어떤 위험에서도 자신을 지켜 주던 든든한 방패 같은 등이 오늘은 어쩐지 좁게만 보였다.
‘별거 아냐. 내 착각일 뿐이야.’
심옥이 고개를 흔들 때였다.
쿵!
갑자기 동혈 전체에 강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어리는 그 순간 다시 한 번 동혈이 강한 진동을 일으켰다.
심수명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피부 위로 한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지하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만은 아니란 것을 심수명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기파라니.’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강력한 기운이 그의 피부를 자극하고 있었다.
심수명이 자신도 모르게 혈린도의 도병을 꽉 움켜잡을 때였다.
콰아앙!
갑자기 굉음과 함께 눈앞에 있는 동굴 벽이 터져 나가며 무언가 그의 발치에 처박혔다. 새우처럼 등을 잔뜩 구부리고 있는 이는 분명 사람이었다.
“크윽!”
잠시 꿈틀거리던 사람이 답답한 신음성을 토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요사한 빛을 흩뿌리는 도를 지지대 삼아 겨우 몸을 일으키는 중년의 사내를 본 순간 심수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하성.”
그는 서천산장의 장주인 은하성이 분명했다. 하지만 은하성은 심수명과 혈린살막의 무인들을 보지 못했는지 무서운 눈빛으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대체?’
심수명은 은하성이 적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스르륵! 쿵! 스르륵! 쿵!
이질적인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심수명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부하들이나 심옥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만큼은 발자국 소리에 담긴 거대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은하성이 이빨을 뿌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발을 내딛고, 왼발을 끌면서 다가온다. 그때마다 남자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다.
‘절름발이?’
칠흑처럼 검은 가죽 장포를 흩날리며 다가오는 흑발의 남자. 거칠게 헝클어진 검은 머리 사이로 무저갱처럼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크윽!”
그를 보는 순간 심수명이 자신도 모르게 혈린도를 뽑아 들었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위기를 느끼고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심수명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단 한 명, 은하성에게 꽂혀 있었다.
“아아!”
그를 확인하는 순간 심옥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은하성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은하성이 적성을 담호를 향해 겨누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원한이 있었던가?”
그의 목소리가 혈마총 안에 울려 퍼졌다.
은하성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적성을 잡고 있는 두 팔은 퉁퉁 부어 있었다.
단 한 방이었다.
담호의 주먹을 단 한 번 허용했을 뿐인데, 전신이 해체되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나마 적성이 아니었다면 첫 일격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지이잉!
담호의 주먹과 격돌한 적성이 거친 도명을 토해 내고 있었다. 마치 고통스럽다는 듯이.
담호의 눈빛이 더욱 묵직해졌다.
“원한 따윈 없어.”
“그런데 왜?”
“나를 먼저 건드렸으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
은하성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혈사풍과 혈랑대를 운용하면서 언젠가는 문제가 터질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담호와 같은 인물이 엮일 줄은 몰랐다.
“협상의 여지는 없는가?”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협상의 여지를 줬던가?”
“크윽!”
은하성이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악귀 같은 남자에겐 그 어떤 협상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난다는 거군.”
“강호란 원래 그런 곳이야.”
“좋다. 이 은하성, 이번 싸움에 내 모든 것을 걸겠다.”
은하성이 전 공력을 끌어 올렸다. 혈마가 남긴 강대한 내공이 그의 몸을 휘돌았다. 그러자 적성이 더욱 요사스런 빛을 발산했다.
“챠앗!”
은하성이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요도 적성이 뿜어내는 강력한 도기가 혈마총의 공기를 갈랐다. 그때까지도 담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
그 모습에 놀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 순간 담호의 오른발이 거세게 바닥을 찍었다.
쿠와앙!
공기를 타고 퍼진 강력한 뇌음이 혈마총 안에 울려 퍼졌다. 벽에 부딪친 음향은 순식간에 몇 배가 증폭되어 사람들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크윽!”
사람들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뇌로 직접 전달되는 강렬한 음파에 그들은 내부가 진탕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사물이 서너 개로 겹쳐 보였다. 하지만 내공이 강한 고수들답게 그들은 재빨리 원래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