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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1장. 신강(新疆)에 혈성(血星)이 내려오다(3)
바람이 불어와 담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천산의 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하지만 담호에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천산은 제왕의 품격을 가지고 있는 산이었다.
산의 형세도 그랬고, 느껴지는 기운 역시 그만큼 강렬했다.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은 여름이 가까워졌음에도 녹을 줄 몰랐고, 여전히 순백의 모습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산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담호를 상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담호의 망막에는 박격달봉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혈마총 근처의 별원이었다.
장주인 은하성이 죽은 후 서천산장은 지리멸렬했다. 겨우 살아남은 무인들은 항복을 했고, 심수명은 빠른 속도로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다.
은하성을 죽인 후 담호는 서천산장과 관련된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담호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신의 몸에서 강렬한 혈향이 느껴졌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벌써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들을 죽인 것에는 한 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혈향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담호가 문득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정(釘)처럼 굳은살이 박여 있는 양 주먹은 그 자체로도 흉기나 다름없었다. 이 손으로 수많은 이들을 죽였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묻혀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무공을 익혔다.
반드시 살아남으려는 집념과 강해지겠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지하 공동에서 살아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담호의 두 주먹은 그런 집념의 결과물이었다.
꽈악!
담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툭 튀어나왔고, 강대한 힘이 꿈틀거렸다.
오직 파괴를 위한 권. 그의 권에 자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천심결을 중심축으로 죽엽수, 복마권, 육합권, 그리고 마교의 무공에서 정수를 뽑아냈다. 그렇게 얻은 정수에 담호만의 심득이 더해져 그만의 독문 무공이 만들어졌다.
암형권(暗形拳).
어둠 속에서 만들어진 권, 그래서 이름 또한 암형권이었다.
세상에 나와 그가 사용한 초식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충보와 파성추, 지천격, 은망수는 모두 암형권의 기본이 되는 초식들뿐이었다. 그 외의 초식은 사용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사용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아직도 그의 핏속엔 미처 가라앉지 못한 열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열기를 발산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문득 사부 현소 진인의 말이 떠올랐다.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화산의 모진 바람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보자고 했다.
‘사부.’
가슴이 메마른 지금도 사부를 떠올리면 큰 울림이 느껴졌다.
“형!”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고개를 들자 방진보가 보였다.
수많은 이들이 담호를 두려워했다. 서천산장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혈린살막의 무인들까지도 담호를 공포와 경외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혈린살막의 막주인 심수명도 마찬가지였다.
낭인으로 뼈가 굵은 심수명이었지만, 감히 담호의 눈빛을 마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방진보는 달랐다.
담호가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방진보였다. 하지만 담호를 대하는 행동이나 눈빛은 예전과 똑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쓰이는 건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냐?”
“혈린살막의 막주님이 찾아오셨어요.”
“그래?”
“예! 지금 별원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알았다.”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별원으로 향했다. 방진보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담…… 대협.”
안에 들어가니 심수명이 담호를 맞이했다. 그의 곁에는 심옥과 흑노가 있었다.
은하성에게 죽기 직전 구함을 받은 흑노의 안색은 아직도 창백했다. 담호를 바라보는 흑노의 눈빛 속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절름발이라고 폄하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직접 본 담호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다리를 저는 것 따윈 담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눈이 있어도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담호를 폄하했던 자신의 두 눈을 후벼 파고 싶을 정도였다.
흑노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담호가 심수명을 바라보았다.
“나를 찾았다고?”
“그렇소이다.”
“왜?”
“이것 때문에 그렇소.”
심수명이 탁자 위에 기다란 물체와 책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신도, 혹은 요도라고 불리는 적성과 혈마진경이었다.
“이게 왜?”
“아시다시피 은하성은 이 물건들을 얻기 위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소이다. 다행히 혈마의 무공을 익히기 전에 담 대협 손에 죽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신강엔 큰 혈풍이 불었을 것이오.”
장황한 심수명의 설명에 담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흑노가 급히 나섰다.
“막주님께서는 지금 이 두 가지 물건의 처분을 담 대협께 물어보시는 겁니다.”
“왜?”
“담 대협께서 은하성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두 물건의 소유주도 담 대협이라 할 수 있지요.”
“관심 없어.”
담호의 단호한 말에 심수명과 흑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많이 본 것은 아니었지만, 담호의 성정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옥은 달랐다.
“무려 혈마의 절학이에요. 은하성이 혈마의 절학을 익히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가 제대로 익혔다면 아무리 당신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말인가요? 정말로?”
“그래!”
“당신은 대체…….”
심옥은 담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강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이곳 신강에서는 전설로 남은 혈마였다. 신강에서는 그의 절학을 탐내지 않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담호는 그런 혈마의 절학을 강가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조약돌 중 하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그때 담호가 심옥에게 물었다.
“내게 혈마의 무공이 필요할 거 같나?”
“그건…….”
심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심수명과 흑노도 마찬가지였다.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내일 이곳을 떠날 거야. 그 물건들은 알아서 처리해.”
“정말 우리에게 넘기겠단 말이오?”
“그래!”
“으음!”
심수명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내뱉었다.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담호의 모습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진심이구나. 이 남자에겐 혈마의 절학조차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구나.’
혈마의 무공은 그렇다 쳐도, 그가 남긴 도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신도도 될 수 있고, 요도도 될 수 있는 귀물이었다. 그런 귀물을 눈앞에 두고도 담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담호의 배포에 심수명과 흑노가 고개를 내저었다.
심수명이 크게 말했다.
“알겠소. 그럼 혈마진경과 도는 본막에서 보관하겠소.”
“마음대로 해.”
담호는 심수명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휴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헉헉!”
방진보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진보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험하기로 소문이 난 박격달봉을.
평소의 방진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또래의 소년들보다 뚱뚱하고 체력도 떨어지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방진보는 힘들어할지언정 산을 오르는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면 몸속에서 한 줄기 청량한 기운이 일어나 내부를 휘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청량한 기운이 한바탕 휘돌고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로가 싹 사라졌다.
“얼른 찾아야 해.”
아비 방우광이 남긴 요리서에는 천산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향초가 있다고 했다. 그 맛은 가히 천상의 맛, 음식에 넣으면 풍미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했다.
천향초(天香草)라는 이름의 향초.
방우광의 요리서에는 천향초가 천산의 정상 가까운 곳에서만 자생한다고 했다.
방우광은 서역을 오가면서 항상 천산에 들르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생각했었다. 아비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방진보는 중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천향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어디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래도 방진보는 천산을 뒤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난생처음 자신의 의지로 하는 일이었다.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담호는 감히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혈로를 걷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려면 방진보 역시 굳은 각오를 해야 했다.
천향초를 캐는 것은 그의 각오를 다지는 과정이었다.
‘형을 따라가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해.’
산 정상에 오를수록 바람이 더욱 차가워졌다.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을 타고 흐르는 바람은 뼛속까지 얼릴 만큼 지독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혹독한 바람과 추위를 견뎌야 하다 보니 식물들도 키가 작았다. 그 때문에 방진보는 허리를 굽힌 채 바닥을 살펴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뒤졌을까?
바위 밑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풀들이 옹기종기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린아이 손가락처럼 다섯 줄기로 갈라진 풀들은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다 혼미해질 정도였다. 냄새를 맡는 순간 방진보는 직감했다.
‘천향초다.’
천상의 향기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황홀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식욕이 동할 정도였다.
천향초를 채취해 그의 요리에 넣으면 그야말로 천상의 맛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천향초의 향기가 방진보를 유혹했다.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천향초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조금씩 천향초에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바로 앞에서 덜컥 멈췄다.
‘그래도 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향초를 채취해 가면 그는 손쉽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자신의 진짜 실력일까?
눈앞에서 천향초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자신에게 어서 따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방진보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방진보가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향초 한 줄기를 꺾어 들었다. 그러자 향기가 더욱 짙게 퍼져 나갔다.
방진보는 꺽은 천향초 한 줄기를 그대로 입에 넣었다. 향기를 음미하면서 조심스럽게 씹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왔다.
방진보의 얼굴에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껏 수많은 요리를 먹어 봤지만, 단 한 번도 이런 풍미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기운이 관통하는 짜릿한 느낌에 전율이 다 일었다. 천향초를 음식에 사용한다면 천상의 맛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방진보는 더 이상 천향초를 따지 않았다. 대신 오래도록 천향초의 맛과 향기를 음미했다. 혀와 뇌에 그 맛을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도록.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진보가 감았던 눈을 떴다.
“됐어. 확실히 기억했어.”
그가 웃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천향초를 가져가는 대신 그 맛을 각인시켰다. 차후 천향초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 맛을 확실히 재현할 수 있도록.
방진보는 뒤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등 뒤에서 천향초가 진한 향으로 유혹을 하고 있었지만, 방진보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 나 잘하고 있는 거지?’
방진보가 미소를 지었다.
천향초의 힘을 빌리지도 않고, 반드시 천하에서 손꼽히는 숙수가 되고 싶었다. 비록 그 길이 너무 멀고, 오랜 시간 돌아갈지라도.
“헤헤!”
방진보의 웃음소리가 천산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