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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54화 (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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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2장. 중원에 들어왔으나,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1)

가욕관(嘉峪關)은 새외와 중원을 연결하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한 곳이었다. 산해관이 만리장성 동쪽의 대표적인 통로라면 가욕관은 서쪽 끝의 대표적인 통로라고 할 수 있었다.

서역을 왕래하거나 이족들과 교역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그 때문에 비록 많지는 않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늘 꾸준했다.

군사적으로나 지형적으로 중요한 곳이니만큼 이곳에는 항상 사백여 명이 넘는 병졸들이 지키고 있었다.

오늘도 가욕관의 정문에는 이십여 명의 병졸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가욕관을 통과하고자 하는 상인들의 신분을 엄격히 확인했다.

중원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은 신분과 목적을 밝혀야 했고, 반대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운청은 가욕관을 지키는 장수였다. 종남파 출신의 무인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군에 투신해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작년에 정치 싸움에 휘말려 그만 이곳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이곳 가욕관에서는 시간이 더디 흘렀다. 변방의 이족들은 힘을 잃어 더 이상 이곳을 침범하지 않았고, 검문은 병사들이 하니 그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심심파적으로 매일같이 연무를 하고 있었지만, 흥이 동할 리 없었다. 무료한 일상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지금은 대부분의 의욕을 잃은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유운청은 가욕관의 성문 앞에 서서 멍하니 북쪽 하늘을 바라봤다. 겨우 성벽 하나 차이일진대 북쪽 하늘은 유난히 거칠어 보였다.

유운청이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종남파에서 무공을 닦는 것이 더 나을 뻔했구나.”

그는 종남파에서도 촉망받던 기재였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무공을 연마했다면 분명 종남파에서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고,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유운청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대한 미련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강호에 투신해 볼까?”

며칠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료함이 깊어질수록 마음속의 갈등도 깊어졌다.

문득 유운청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가욕관 밖 저 멀리서 이곳을 향해 오는 두 필의 말을 탄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상인들인가?’

유운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상인이라고 보기엔 인원이 단출했고, 무엇보다 상인들로 짐작할 만한 짐들도 보이지 않았다.

‘단둘이서 신강을 횡단한 것인가?’

유운청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가욕관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이십 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청년과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청년은 먼지를 막기 위해선지 얼굴을 천으로 칭칭 동여감고 있었다. 길게 늘어트린 흑발에 검은 가죽 장포를 입은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뚱뚱한 소년의 만면엔 보기 좋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뚱뚱한 소년은 마치 거북이처럼 등에 봇짐을 가득 짊어지고 있었다.

“멈춰라.”

가욕관을 지키는 병졸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무기를 겨눴다. 그에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어디서 온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병사들의 목소리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바로 지척에 가욕관 병력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유운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무 태만은 곧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이곳을 거쳐 간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유운청은 병졸들의 태만을 용서치 않았다.

병졸들이 무기를 겨눴음에도 온통 검은 일색인 청년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아니, 변화를 알아볼 수 없었다. 청년은 눈만 빼놓고 얼굴을 온통 천으로 칭칭 동여매고 있었으니까.

대답은 곁에 있는 뚱뚱한 소년에게서 나왔다.

“안녕하세요, 병사님들. 고생이 많으시네요. 전 방진보라고 해요.”

만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뚱뚱한 소년은 바로 방진보였다. 옆에 있는 검은 일색의 사내는 담호였다.

담호는 말없이 가욕관의 높은 성벽을 바라보았다.

십이 년 전 지나왔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통과 절차를 밟지 않았다. 아마 무당파나 종남파의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다란 성벽. 이 성벽만 넘으면 바로 중원이었다. 설렐 만도 하건만 담호의 눈에는 그 어떤 감흥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병사들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름과 목적을 밝혀라. 중원엔 왜 들어가려는 것이냐?”

“저희는 일 년 전 이곳을 빠져나갔던 은련상단 소속의 인물들이에요.”

“은련상단?”

병사들이 서로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그중 한 명이 은련상단이 이곳을 통해 나갔음을 증언했다.

“정말 은련상단 소속이냐? 듣기엔 인원이 백 명 가까이 된다고 했는데 어찌 너희 두 명뿐이냐?”

“실은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아서…….”

방진보는 혈랑대의 습격을 받아 은련상단이 전멸했음을 알렸다. 믿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혈린살막주의 직인이 찍힌 봉서를 보여 주었다.

“장군!”

봉서를 받은 병졸이 급히 유운청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결정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유운청에게 봉서를 내밀었다.

봉서를 받은 유운청이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서에 찍힌 직인은 분명 심수명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혈린살막주 심수명의 이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이곳을 책임지는 장수라면 심수명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기 마련이었다. 신강을 횡단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보호받기를 원하고, 혈린살막은 그들을 보호할 능력을 갖췄다.

그 둘을 중계하는 곳이 바로 가욕관이었다. 당연히 법으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것은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무기는 녹이 슬고, 먹을 것은 항상 부족했다. 때문에 가욕관을 지키는 장수들은 이런 식으로 둘을 중계해 주고 수수료를 취했다.

봉서 안에는 은련상단이 마적 떼에 전멸을 당했고, 혈린살막주 심수명이 두 사람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혈린살막주가 보장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통과시켜 줘도 무방했다. 심수명이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말이 거슬렸다.

“반드시?”

봉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반드시’ 통과시키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었다.

“흐음!”

유운청의 얼굴에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지금껏 수십 번을 거래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요?”

병사가 물어왔다.

유운청이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담호와 방진보를 향해 다가갔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유운청이 다가오자 방진보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담호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고 해도 그는 이제 겨우 십 대 초반의 소년에 불과했다.

유운청이 앞에 서자 방진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은련상단이 마적 떼에 전멸했다고? 그런데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그게…….”

방진보가 흘깃 담호를 바라봤다. 그러자 유운청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담호를 향했다. 하지만 담호의 눈빛은 여전히 가욕관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이, 이봐.”

유운청이 호기롭게 담호를 불렀다. 하지만 담호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성벽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봐, 내 말이 들리지 않나?”

유운청이 담호의 팔목을 잡았다. 완맥까지 단번에 제압하는 수준급의 금나술이었다.

이 정도면 어떤 무인이라도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여전히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유운청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감히 자신의 금나술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담호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래서 담호의 맥문을 제압한 손가락에 공력을 주입했다.

건곤금나수(乾坤擒拿手).

종남파의 절학 중 하나였다. 일단 건곤금나수에 제압당하면 상대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풀 수 없었다. 그것이 유운청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식은 다음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이 손 놔.”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신의 솜털이 쭈뼛 일어섰다.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몸이 제멋대로 반응한 것이다.

“이 녀석이…….”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건곤금나수에서 풀려날 수 없었다. 하지만 담호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유운청이 건곤금나수에 공력을 더욱 집중했다. 완맥이 제압된 이상 이 정도의 공력이 집중되면 누구나 비명을 지르게 마련이었다.

그 순간 담호가 고개를 돌려 유운청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가라앉은 깊은 눈동자. 감정의 편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보이는 것은 온통 짙은 어둠뿐이었다.

부르르!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퍼져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극!

담호의 완맥을 잡은 그의 손가락에서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그의 손가락을 밀어내고 있었다.

유운청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손가락에 더욱 공력을 집중하며 안간힘을 썼다.

투웅!

“크윽!”

그 순간 담호의 맥문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튕겨 나갔다. 호구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직접적으로 힘을 주던 엄지와 검지가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

그 순간 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더 멋대로 내 몸에 손대면 넌 죽어.”

“…….”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담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유운청은 그만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군부에서 나름 거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유운청이었다. 거기에 종남파에서 익힌 고강한 무공까지.

두려울 것이 없던 삶이었다. 그래서 세상 무서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호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달았다.

담호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세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군부에 있으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담호가 도저히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편 병사들은 그런 유운청의 모습을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운청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유운청은 더욱 놀랐다. 담호의 기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는 자신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고수다.’

유운청은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을 후회했다.

담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에 있는 병사들은 모조리 주검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 것이다. 그와 같은 고수에겐 일반 병사들의 숫자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 담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슨 문제 있나?”

“없습니다. 통과하십시오.”

유운청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담호가 시선을 거뒀다. 유운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여유도 없이 병사들을 다그쳤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하지만…….”

“빨리 통과시키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병졸들이 급히 가욕관의 성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거대한 성문 너머 중원의 하늘과 대지가 보였다. 십이 년 만에 보는 중원이었다.

담호가 성문 사이로 흑귀를 몰았다. 그 뒤를 방진보가 급히 따랐다.

푸륵!

흑귀가 거친 콧김을 뿜으며 투레질을 했다.

겨우 성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공기 자체가 변한 것 같았다. 문득 담호가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보는 것이라 생각한 유운청의 몸이 경직됐다. 하지만 담호의 시선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드넓은 황야와 거친 하늘,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그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담호의 시선이 다시 중원으로 향했다.

푸른 하늘에 멈춰 있던 구름이 갑자기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담호의 말에 흑귀가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형.”

그 뒤를 방진보가 탄 백마가 따라붙었다.

두 마리의 말은 금세 점으로 변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병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유운청에게 다가왔다.

“장군님, 저대로 보내도 됩니까?”

“보내지 않으면?”

“예?”

병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간혹 사람들을 통과시키면서 사례비 명목으로 적잖은 돈을 받아 챙겼던 그였기에 아쉬움은 더했다.

“쯧!”

유운청이 그런 병사를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병사는 자신이 저승길 문턱에 발을 들였다 빠져나왔단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병사를 탓하려던 유운청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 역시 그랬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무료하다며 강호에 나갈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담호를 만남으로써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나에겐 이곳이 어울려.”

괜히 강호에 나갔다가 담호를 또 만날까 봐 두려웠다. 그에게서 풍기는 혈향에 진저리가 다 쳐졌다.

마적 떼의 습격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담호와 같은 남자가 자신을 건드린 누군가를 살려 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기에.

“그러고 보니 이름조차 묻지 않았구나. 어쩌면 저자로 인해 강호는 몸살을 앓을지도 모른다.”

유운청의 눈에는 붉게 물든 중원 하늘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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