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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57화 (5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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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3장. 인연은 막측(莫測)하고, 세상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1)

타타탁!

방진보의 주도가 도마 위를 두드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칼질에 채소들이 먹기 좋게 썰렸다.

“휴우!

방진보가 칼질을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좌판 한쪽에 그가 다듬은 각종 채소가 바구니에 수북이 담겨 있었다.

각종 고명을 만들고, 면을 만들었다. 장사할 준비는 다 끝났다.

“어때요? 할머니.”

“완벽하구만. 내가 해도 이 정도는 안 될 텐데.”

노파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에서 이십 년이 넘게 장사를 했지만 방진보만큼 칼질을 잘하는 이는 처음 봤다. 거기다 성격은 또 얼마나 좋은지. 친손자보다 더 정이 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육수를 내는 비법과 반죽의 비법까지 모조리 알려 주고 말았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어깨도 안 좋으니 장사를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때 손님들 몇 명이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노파와 안면이 있는지 살갑게 말을 건넸다.

“뭐야? 오늘은 할멈이 장사하는 것 아냐?”

“오늘은 팔이 아파서 이 아이가 대신할 거야.”

“뭐야? 숨겨 둔 손자라도 있었어?”

“말 징그럽게 많네. 먹을 거야? 말 거야?”

“거, 성격하고는……. 뚱보야, 여기 사람 수대로 우육면 말아다오.”

“예! 조금만 기다리세요.”

방진보가 웃으며 미리 만들어 둔 면을 끓는 물에 넣었다. 그 후 그릇을 준비해 각종 고명과 함께 넣을 채소를 미리 준비했다.

그런 방진보의 손길은 무척이나 능숙했다.

“오! 제법 솜씨가 있어 보이는데.”

“그러게! 맛은 어떠려나?”

손님들이 방진보의 솜씨에 호기심을 보였다.

잠시 후 면이 끓자 방진보가 그릇에 옮겨 담았다. 육수까지 붓자 그럴듯한 우육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우육면 나왔습니다.”

방진보가 손님들에게 우육면을 내줬다.

“어디, 뚱보 숙수가 만든 우육면 좀 맛볼까?”

손님들이 젓가락을 들고 우육면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 몇 젓가락을 먹을 때는 의심 어린 표정이었지만, 이내 우육면의 맛에 심취했다.

“후아! 이건 할멈이 만드는 것보다 더 맛있는데.”

“정말이야. 땀이 뻘뻘 흐르는 것이 피로가 싹 풀리네.”

손님들의 칭찬에 방진보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 맛있게 먹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요리를 만들고 싶어. 내 음식을 맛보는 모두의 얼굴에서 저런 미소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가 만든 우육면은 어디까지나 노파의 비법으로 만든 것, 시간이 흐르면 자신만의 비법이 생길 것이다.

문득 방진보의 시선이 담호에게 향했다. 그가 요리에 심취해 있는 동안에도 담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진보는 급히 우육면 한 그릇을 더 말아 담호에게 내놨다.

“형, 드셔 보세요.”

담호는 말없이 방진보가 내놓은 우육면을 맛봤다.

한 젓가락씩 음미하면서 천천히.

방진보는 긴장 어린 표정으로 담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담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국물까지 싹 비운 후였다.

“맛있다.”

“헤헤! 다행이다.”

방진보의 표정이 대번에 풀어졌다.

그에겐 다른 누구보다 담호의 평가가 중요했다. 담호의 미각이 뛰어나거나, 칭찬에 후해서가 아니었다.

신뢰의 문제였다. 담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 수 있다는 신뢰. 방진보는 그렇게나 담호를 믿고 의지했다.

담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손님들이 밀려왔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처음엔 노파 대신 우육면을 마는 방진보를 믿지 못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나중엔 감탄으로 변했다.

덕분에 방진보만 바빠졌다. 많은 손님들이 왔지만 방진보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응대했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에 노파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보다 낫네.”

자신이 만든 우육면보다 방진보가 만든 우육면이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질투를 하지는 않았다. 인생사 수많은 질곡을 겪어 귀천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노파는 마치 친손자를 보듯 따스한 눈으로 방진보를 바라봤다.

준비했던 재료와 육수가 거의 동이 나고 마지막이 될 것으로 짐작되는 손님이 왔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무척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우육면 한 그릇 주게.”

“예!”

방진보는 중년 남자에게 우육면을 말아 주곤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끝났다. 아이고, 죽겠다.”

말로는 죽겠다고 했지만, 얼굴에는 기분 좋은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노파가 그런 방진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이구! 고생 많았다. 요, 예쁜 녀석. 일면식도 없는 할미를 위해 이리 고생하다니.”

“고생은요? 덕분에 재밌었어요. 할머니 덕분에 새로운 요리법도 알았구요.”

“그렇다면 다행이구. 고맙다. 덕분에 기껏 만든 육수를 헛되이 버리지 않았어.”

노파와 방진보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때였다.

“할멈, 이 우육면을 만든 것은 저 소년이 분명한가?”

“그럽지요. 제가 어깨가 아파 오늘 장사를 공치게 되자 이 녀석이 나서서 대신 만들었답니다.”

“그래? 솜씨가 제법이군. 재료를 다듬은 수준도 수준급이고. 면도 감각 있게 익혔구나. 어디서 따로 배웠느냐?”

마지막 물음은 방진보를 향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숙수셨습니다.”

“그래? 보니까 할멈의 친손자는 아닌 것 같고. 맞느냐?”

“예!”

“내 돌리지 않고 말하마. 며칠만 내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일이라시면?”

“나는 홍암산장의 수석 숙수인 송환이라고 한다. 장주님의 환갑잔치가 코앞인데 일손이 많이 부족하다.”

“아!”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내 일을 도와줬으면 한다.”

거짓말 같은 송환의 제안에 방진보가 얼얼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방진보를 바라보는 송환의 표정은 진지해서 거짓 같지가 않았다.

송환은 새벽 일찍 잔치에 쓸 요리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 이곳 시장을 찾았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니만큼 자신이 직접 재료를 확인하는 것이 나을 듯싶어서였다.

그렇게 찾은 시장에서 방진보가 우육면에 쓸 재료들을 손질하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엔 어린 소년이 치기를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지켜볼수록 솜씨가 뛰어났다.

마침 홍암산장의 숙수 중 두 명이 급작스럽게 일을 못 하게 되어 송환은 방진보에게 이 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방진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하지만 담호는 방진보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진보에게 들어온 제안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방진보의 몫이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담호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제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른 숙수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만 있으면 된다.”

“저라도 괜찮다면 도와드릴게요.”

“좋다. 지금 당장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느냐?”

“제가 객잔에 머물고 있어서 짐을 챙겨 와야 해요.”

“한 시진 후에 홍암산장의 식구들과 저 앞 공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까지 짐을 챙겨 오너라.”

“참, 형하고 함께 가도 돼요?”

방진보가 담호를 가리켰다.

송환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온통 검은 일색인 담호의 모습이 왠지 꺼림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진보를 받아들이지 않기엔 주방의 사정이 너무 급했다.

“내 총관에게 말씀드려 숙소를 마련해 둘 테니 같이 오거라.”

“감사합니다.”

방진보가 송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송환은 노파에게 값을 치르고 일어섰다.

“그럼 이따 보자꾸나.”

방진보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송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함성을 터트렸다.

“아자!”

주먹을 쥐고 환호하는 그의 모습에 노파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 좋으냐?”

“그럼요.”

“조심하거라. 내가 듣기로 홍암산장은 무공을 익힌 무서운 사람들이 많다더라. 괜히 잘못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방진보가 담호를 바라봤다.

그때까지도 담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형, 고마워요. 괜히 저 때문에 형의 시간만 뺏기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괜찮다.”

그 말을 끝으로 담호는 뒤돌아섰다.

방진보는 노파에게 오늘 번 돈을 모두 건네고 급히 담호를 따라갔다.

방진보의 등 뒤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돈을 모두 주면 어떻게 하누? 네가 힘들게 일해서 번 건데.”

“대신 비법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부디 몸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그럼 전 가 볼게요.”

방진보가 노파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담호의 뒤를 따랐다.

객잔으로 돌아온 방진보는 급히 짐을 쌌다.

“과자, 국자…… 건해삼, 양육포.”

하나도 빠짐없는 것을 확인한 방진보는 봇짐을 등에 짊어졌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 곧 홍암산장에 들어가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몸이 굳어 왔다.

‘난 잘할 수 있어. 후우!’

크게 숨을 몇 번 들이키자 떨리는 가슴이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형, 이제 가요.”

“그래!”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마구간으로 가자 흑귀가 반갑다는 듯이 투레질을 했다. 담호가 흑귀의 목덜미를 두들길 때였다.

“녀석이 당신의 말이었나?”

차가운 음성이 담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문수경과 좌상천이었다. 그들도 말을 꺼내고 있었다.

좌상천이 흑귀 곁으로 다가왔다.

“범부가 타기엔 아까운 말이야.”

좌상천의 눈에 어린 감정은 탐욕이었다.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흑귀의 자태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마구간에 있는 수많은 말들이 흑위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 말을 내게 팔아라. 값은 충분히 쳐줄 테니.”

“사형, 무례하면 안 돼요.”

문수경이 기겁해 좌상천을 만류했다. 하지만 좌상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제대로 값을 쳐주겠다는데.”

“사형!”

보다 못한 문수경이 소리를 빽 지르자 좌상천이 인상을 쓰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여간 계집들이란…….’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문수경이 못마땅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사부의 딸이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줘야 했다.

“알겠어. 알겠다고. 그냥 말이 훌륭해서 한번 해 본 말이야. 쯧!”

뒤로 물러나면서도 좌상천은 흑귀에서 눈을 쉽게 떼지 못했다. 그만큼 흑귀의 멋진 모습에 매료된 것이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언젠가는 저 녀석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

자고로 보물에는 어울리는 주인이 있는 법.

훌륭한 말도 격이 있는 주인이 타야 어울리는 법이다.

좌상천은 자신이 흑귀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문수경이 좌상천을 대신해 담호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결례를 저질렀네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

“그런데 동정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누나, 저희도 홍암산장에 들를 거예요.”

“응?”

“제가 홍암산장의 주방 일을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동정호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는데 홍암산장의 수석 숙수님이 저보고 일 좀 도와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며칠 동안 홍암산장 주방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래? 잘되었구나.”

문수경이 미소를 지으며 담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럼 홍암산장에서 다시 뵐게요. 그럼…….”

그녀가 좌상천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구나. 혹시 벙어리인가?’

문수경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담호가 흑귀의 등에 올라탄 이후였다.

담호와 방진보가 말을 탄 채 객잔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문수경은 왠지 담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사매, 안 갈 거야?”

그 순간 좌상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담호의 뒷모습만 바라볼 뻔했다.

“알았어요. 가요.”

문수경이 고개를 흔들며 좌상천에게 갔다. 하지만 좌상천은 문수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담호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었다.

‘놈도 홍암산장으로 간단 말이지?’

그의 눈에 탐욕의 빛이 다시금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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