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58화 (58/500)

 58

58화 3장. 인연은 막측(莫測)하고, 세상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2)

오천산(五泉山)은 한무제 때 곽거병 장군이 갈증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위해 채찍을 들어 다섯 개의 샘이 솟아나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다.

홍암산장은 그런 오천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눈에 확 띄는 대소 전각만 수십 채가 둥지를 튼 홍암산장의 규모는 난주에서도 따라올 곳이 없었다.

홍암산장은 공동산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공동파와 더불어 감숙 무림의 양대 강자로 확실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홍암산장의 정문은 찾아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며칠 전부터 홍암산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몇 배로 늘어났다. 이틀 후로 닥친 홍암산장의 주인 이신풍의 환갑잔치 때문이었다.

한 지방의 패주라고 할 수 있는 이신풍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홍암산장을 방문했다.

개중에는 어떻게 해서든 이신풍과 안면을 터서 도움을 받으려는 어중이떠중이들도 있었지만, 강호 명문에서 보내온 축하사절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감숙성에 터를 잡고 있는 무관에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축하 인사를 보내 왔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홍암산장은 연일 밀려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하급 무인들까지 총동원되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주님, 지금 접객청에 사람을 더 보내 달라고 합니다.”

“숙소가 모자라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홍암산장의 외당주 유관소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는 사람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중요도에 따라 손님을 분류해 숙소를 배정해 주는 것이 현재 그의 임무였다. 원래대로라면 총관인 구중명이 이 모든 일을 해야 했지만, 지금 그는 더 중요한 일로 바빴다.

“이쪽에도 인력이 없으니 접객청은 어떻게든 있는 인원을 쥐어짜라고 해.”

“하지만 그랬다가는…….”

“뭘 그랬다가야? 불만 있으면 이쪽에 한번 와 보라고 해. 숙소 모자라는 것은 내당주 종평에게 말하라고 해. 그가 창고를 숙소로 개조하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유관소의 불호령에 하인들이 서둘러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관소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젠장! 도대체 일이 끝나지 않는군.”

“여전히 고생이 많습니다, 유 당주.”

“누가…… 어, 송 숙수님?”

유관소가 눈앞에 나타난 중년의 남자를 보고 반색을 했다. 그가 바로 홍암산장의 식사를 책임지는 수석 숙수인 송환이었기 때문이다.

송환의 뒤로 식재료를 실은 마차 몇 대와 하인들이 보였다.

“필요하신 것은 모두 사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더 이상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다행입니다. 송 숙수님이 데려간 하인들만 제자리로 복귀해도 한결 숨통이 트일 겁니다.”

“죄송합니다.”

“에이! 아닙니다. 장주님의 환갑잔치 때문에 하인들을 차출해 간 건데요. 그래도 더 이상 쓸 일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하하하!”

유관소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송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인치고 상당히 소탈할 유관소였다. 그 때문에 송환과도 마음이 꽤 잘 맞았다.

유관소의 시선이 문득 송환의 뒤쪽에 있는 낯선 인영을 향했다. 흑귀를 탄 담호와 백마를 탄 방진보였다.

“저들은?”

“아, 난주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검은 말을 탄 사람이 형이고, 뚱뚱한 아이가 동생입니다.”

“그런데 왜 저들을?”

“동생인 아이가 음식을 기가 막히게 합니다.”

“아! 그래서…….”

“예!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고자 데려왔습니다.”

“송 숙수님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갑자기 숙수 두 사람이 빠져나갔으니.”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요.”

송환의 음성을 뒤로 하고 유관소가 담호와 방진보를 자세히 바라봤다.

방진보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뚱뚱한 체형이 무공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담호는 달랐다.

유관소가 담호에게 물었다.

“무공을 익혔는가?”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건방지게 느껴졌는지 유관소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담호.”

그제야 담호가 입을 열었다.

유관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군.”

그가 다시 한 번 담호를 바라봤다. 체형이나 분위기는 분명히 무공을 익힌 무인의 그것이었다.

“말에서 내려 보겠는가?”

어쩐 일인지 담호가 순순히 흑귀에서 내렸다. 순간 유관소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담호가 살짝 발을 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었다. 담호의 발 자체가 살짝 휘어 있었다. 그건 인위적으로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쯧!”

유관소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런 유관소의 반응에 송환도 담호의 다리를 바라봤다.

무공을 익힌 자가 다리를 절고 있다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어쩌다 다친 건가?”

“사고로.”

담호의 간단한 대답에 유관소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결정을 내리고 송환을 바라봤다.

“숙수들의 거처에 빈방이 남아 있습니까?”

“그만둔 녀석들의 방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럼 그곳에 재우면 되겠군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고맙습니다. 배려를 해 줘서.”

송환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원래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는 홍암산장에 들일 수 없었다. 홍암산장의 오랜 규칙이었는데, 유관소가 이를 깨고 파격적으로 허용을 한 것이다.

“저희 사이에 배려는 무슨…….”

“오늘 밤 야식거리를 애들을 통해 보내겠습니다.”

“잔치에 쓸 음식을 만드느라 바쁘실 텐데 그렇게까지야…….”

“그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송환이 유관소에게 인사를 한 후 홍암산장으로 들어갔다. 담호와 방진보도 송환의 뒤를 따랐다.

“우와!”

홍암산장에 발을 들인 그 순간 방진보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웅장해 보이는 전각들과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방진보는 태어나서 이렇게 거대한 전각군과 많은 무인들을 본 적이 없었다.

“넋을 잃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쪽으로 오거라.”

“예!

그때 송환의 차가운 음성이 방진보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정신을 차린 방진보가 급히 송환의 뒤를 따랐다.

송환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중간 규모의 전각 뒤쪽에 있는 객사(客舍)였다. 전각의 후원을 감싸는 형태로 지은 객사에는 이십여 개의 방문이 연결되어 있었다. 송환이 그중 한 곳을 열었다.

방 안은 흔한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있는 것은 이불 한 채뿐. 그야말로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송환이 담호에게 말했다.

“동생이 일하는 동안 이곳에서 머물면 될 것이오. 혹여 심심하다면 산장 내를 돌아다녀도 좋지만, 부디 사고는 치지 마시오. 보다시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산장 내 무사들의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다오.”

“그러지.”

“말은 객사 뒤에 마구간이 따로 있으니 거기에 두면 될 것이오.”

“음!”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환의 시선이 방진보를 향했다.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지금 당장요?”

“왜? 문제 될 것이 있느냐?”

“아니요.”

“가자.”

“예!”

방진보가 잠시 담호를 바라본 후 송환을 따라갔다.

담호는 말없이 방진보와 송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이라고 해 봐야 어른 두 명이 누우면 가득 찰 정도로 비좁았다. 하지만 담호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가 지냈던 곳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담호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담호는 일각을 견디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우와!”

방진보의 입에서 또다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홍암산장의 수많은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곳답게 주방은 중간 규모의 전각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요리를 하는 숙수만 다섯 명에 보조가 열 명, 그리고 다시 잡일을 도와주는 하인들의 수만 십여 명이 넘었다.

방진보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송환이 들어서자 하인 한 명이 알아보고 소리쳤다.

“수석 숙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요리를 하던 숙수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음!”

송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안을 둘러봤다.

화덕 반대편 탁자 위에 가득 쌓인 음식들이 보였다. 오늘 들어온 사람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기 위해 만든 음식들이었다.

송환은 그중 아무거나 하나 집어 먹었다. 그가 음식을 먹자 숙수들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송환을 지켜보았다.

“괜찮군.”

“휴!”

그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송환은 수석 숙수답게 입맛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그의 입맛을 통과하지 못한 음식은 그 자리에서 버려야 했다.

차석 숙수인 우복겸이 송환에게 다가왔다.

“그 꼬마는 누굽니까?”

“난주 시장에서 만난 아이다. 음식 솜씨가 제법이니 화덕 하나를 맡기거라.”

“화덕을 맡긴단 말입니까?”

우복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덕은 곧 요리가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그 말은 곧 방진보가 한 명의 숙수로서 손색이 없다는 뜻이었다.

방진보의 나이 기껏해야 이제 열서너 살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 주방을 부지런히 오가는 보조들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였다.

일반적인 환경이라면 겨우 접시나 닦아야 할 나이에 화덕을 맡기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복겸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이 꼬마에게 화덕을 맡겨도 됩니까?”

“아비가 숙수였다고 한다. 어지간한 숙수들보다 훨씬 나으니 잔말 말고 화덕 하나를 내주거라.”

“알겠습니다.”

송환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우복겸은 두 번 다시 의문을 표할 수 없었다. 송환의 입맛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의 입맛에 들었다면 분명 뛰어난 숙수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가 문제였다. 송환이야 뭐가 문제라고 하겠지만, 주방마다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법이었으니까.

우복겸이 방진보에게 말했다.

“너는 저 화덕을 쓰거라. 보조들이 재료를 다듬어 오면 조리를 해야 한다.”

“만들 음식이 무언가요?”

“회과육이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정말이냐?”

“할 수 있어요.”

방진보가 두 번이나 대답하자 우복겸도 더 이상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좋다. 일단 한 접시를 만들어 보거라. 내가 맛을 보고 판단을 내릴 테니.”

우복겸의 말에 송환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도 그 다음으로 주방을 책임지는 이이니만큼 어느 정도 권위는 인정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예!”

방진보가 힘차게 대답한 후 등에 매고 있던 봇짐을 풀었다. 그러자 과자와 주도 같은 주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 전용 주구도 있어?”

우복겸이 이번엔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다. 주구는 오랫동안 사용한 듯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래도 음식은 제법 만들어 봤다는 건가?’

방진보는 능숙한 솜씨로 과자를 화덕 위에 올렸다. 늘 돼지기름을 먹여서 관리했기에 과자는 번들거리고 있었다.

방진보는 화덕 옆에 놓인 재료들을 과자 위에 놓고 조리하기 시작했다.

치이익!

한껏 달궈진 과자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쪽 손으로 과자를 움켜쥔 채 다른 한손에 든 국자로 조리를 하는 방진보의 모습은 분명 초심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오!”

주방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 뚱보 녀석!’

방진보를 보면서 이를 악무는 십칠팔 세의 소년.

그의 이름은 소진서. 방진보가 들어오기 전만 해도 화덕의 주인이 될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방진보가 들어옴으로써 보조로 지내야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래서인지 방진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질시의 빛이 담겨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