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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59화 (5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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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3장. 인연은 막측(莫測)하고, 세상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3)

홍암산장주 이신풍의 환갑은 단순한 축하연이 아니었다. 감숙성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문파들의 회합의 장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홍암산장에 들어온 유력 문파의 수만 이십여 곳이 넘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중소문파의 숫자는 그 배를 가뿐히 넘어갔다.

“하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한 삼 년 만이지 싶은데 장 문주께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리가요? 허허!”

중년의 무인들이 서로에게 공치사를 건넸고, 다른 한쪽에서는 젊은 무인들이 통성명을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휘유! 대단하네.”

그런 풍경을 보며 휘파람을 부는 청년이 있었다.

이제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호남이었다. 샛별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살짝 말려간 입 꼬리, 얼굴 전체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청년은 거대한 연무장에 마련된 수십 개의 평상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평상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청년이 앉은 자리엔 누구도 얼씬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앉은 평상에는 빈 술병 여러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청년 한 명뿐이었다.

당연히 술을 마신 사람도 청년이었다. 청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낮부터 취한 듯한 청년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혀를 찰 뿐 다가오지 않았다.

“대낮부터 저리 술을 마시다니.”

“그러게 말이오.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모르겠지만 싹수가 노랗구려.”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었을 텐데도 청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나가는 시비를 불렀다.

“여기 술 한 병만 더 가져다줄 수 있겠나?”

“예? 하지만 이미 많이 드셨는데…….”

시비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청년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왜? 내가 취한 것 같아?”

“그건 아니지만…….”

“생비여유(生非汝有)니 시천지지위화야(是天池之委和也)라. 그 옛날 열자께서 하신 말씀이지.”

“네?”

“생은 너의 소유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맡기어 화합된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제가 어떻게…….”

“어차피 인간의 생사는 하늘이 관장하는 것이니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즐기라는 뜻이다. 옛 선인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 어찌 지금 이 순간을 소홀히 보내겠느냐? 자고로 선인 중에서 술을 마시지 않은 분이 없었으니…….”

“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청년의 궤변이 길어질 것 같아 시비가 급히 말을 끊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술 한 병을 가져와 청년에게 건네주고 사라졌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된 청년이 쩝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술잔을 술을 가득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불가여왕자(不可與往者)는 부지기도(不知其道)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면 진리를 말해도 알 수가 없는 법.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없으니 외롭구나. 쯧!”

청년이 술잔을 들이켠 후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주위의 풍경과 유난히 이질적인 남자가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흑발에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였다. 자세히 보면 한쪽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남자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 모습이 꼭 빈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청년이 그런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빈자리가 있소, 형장.”

심지어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청년의 입에서는 지독한 주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청년이 주사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오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짐작과 달리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는 청년이 앉아 있는 평상으로 거침없이 다가왔다.

청년의 눈이 빛났다. 평상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가 살짝 다리를 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청년이 담호에게 포권을 취했다.

“반갑소. 이렇게 한자리에 함께하게 된 것도 대단한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내 이름은 초연운이오.”

스스로를 초연운이라고 밝힌 청년이 담호를 빤히 바라봤다. 비록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까만 눈동자엔 한 점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담호.”

담호는 짤막하게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낯을 붉혔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연운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멋진 이름이오. 담 형.”

담호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은 담호의 얼굴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초연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담호에게 술잔을 건넸다.

“한 잔 받으시오.”

“술은 마시지 않아.”

“그것참 아쉽구려. 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다니. 뭐, 상관없겠지? 사람마다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하하!”

초연운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담호는 초연운을 빤히 바라봤다. 초연운은 그가 세상에 나와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정신이 없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평상에 담호가 앉은 것이 정말 기쁜 듯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었다. 담호는 그런 초연운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지 않았다.

한참을 떠들던 초연운이 담호의 강렬한 시선에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다.

“이거, 너무 내 얘기만 떠들었나? 그나저나 담 형은 어디에서 오셨소?”

“새외.”

“새외라면 장성 밖? 허! 멀리서도 오셨구려. 부럽소! 나도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었는데. 장성 밖의 풍경은 어떻소? 듣던 대로 황량하오?”

“아마도.”

“그런데 중원인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새외에서 온 것이오? 아, 상인들과 함께 상행에 다녀왔나 보군. 요즘 들어 상단을 따라 새외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들었소.”

초연운은 혼자 추측하고 대답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인 듯싶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데 목이 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게 초연운이 한참을 떠들 때였다.

“공동파다. 공동파의 무인들이 왔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설렘이 담겨 있었다.

“공동파에서도 축하 사절을 보내다니. 이신풍 대협이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두말하면 입 아프지. 누가 뭐래도 공동파와 더불어 감숙성의 강자가 아니던가? 전통이야 공동파가 더 오래되었을지 몰라도 지금 누리고 있는 성세만큼은 홍암산장이 결코 뒤지지 않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초연운과 담호의 귀에도 들려왔다.

초연운의 얼굴에 대번 관심을 보였다.

“오! 드디어 그 엉덩이가 무거운 공동파의 도사들을 보는 것인가?”

그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오는 도사들을 바라봤다.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십여 명의 도사들. 그들은 하나같이 차분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공동파가 보내 온 축하사절단이었다.

구대문파의 하나인 공동파가 심혈을 기울여 갈고닦은 명검 같은 존재들. 그들이 발산하는 서슬 퍼런 기파에 사람들은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이가 있었다.

큼직큼직한 이목구비와 칠 척의 거구, 마치 강철을 깎아놓은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육체와 어울리는 강렬하면서도 오만해 보이는 눈빛.

그는 마치 세상이 자신의 발아래 놓인 것처럼 굽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에겐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남학 소협이다.”

“우와! 그럼 저자가 천뢰무객(天雷武客)이란 말이야?”

“구무룡(九武龍) 중의 한 명인 천뢰무객을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우린 정말 대단한 행운을 잡았군.”

사람들이 그를 보며 웅성거렸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뢰무객 남학이라.”

초연운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문득 그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남학의 등장에도 담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남학이라는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초연운이 물었다.

“혹시 저 친구 모르시오?”

그러자 담호가 초연운을 바라봤다.

감정이 없는 눈빛이었지만, 묘하게도 초연운은 그의 눈빛 속에 담긴 언어를 알아들었다.

“모르시는구만. 하! 천하에 구무룡을 모르는 인간도 있다니.”

초연운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담호는 그런 초연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꼭 알아야 하나?”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지야. 하지만 알아 두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나을 거요. 그런데 초면에 왜 반말이오?”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초연운이 담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담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싫으면 당신도 반말해.”

“아! 그러면 되겠군. 젠장!”

초연운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가 담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 어디에도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럼 처음부터 설명해 줘야겠군. 혹시 구무룡이라고 알아?”

“…….”

“그럴 줄 알았지. 자넨 분명 강호 초출이겠군. 뭐, 상관없어.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구무룡은 현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보면 돼.”

초연운의 말처럼 구무룡은 현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들로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취는 결코 후기지수라는 말로 폄하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무력은 이미 구대문파의 장로급에 버금갔다. 문제는 그것이 완성형이 아니란 것이었다.

그들의 나이를 감안해 볼 때 발전의 여지가 더욱 크게 남아 있었다. 실제로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무섭게 강해지고 있었다.

무당파의 백 년을 이끌어 나갈 기재라고 평가받는 무쌍검(無雙劍) 진무영. 검에 관한 그의 재능은 가히 천재적이어서 무당파의 장로들조차도 한 수 접어줄 정도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별호조차 무쌍검, 비견할 자가 없는 검객이라고 할까.

구무룡의 두 번째는 화산고검(華山孤劍) 명경이었다.

화산파의 현검 진인이 키워 낸 천고의 기재.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천하를 울리고 있었다.

세 번째는 질풍염라(疾風閻羅) 표서운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구대문파 중 하나인 점창파의 속가출신이었다. 정확히는 점창파의 속가 문파인 운창표국의 소국주로 그 재능이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했다.

네 번째는 무영신룡(無影神龍) 엄태천이었다.

그는 신비지문이라고 불리는 곤륜파 출신의 무인이었다.

별호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강호를 주유하는 데다가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 한 명의 구무룡은 바로 청운이라고 하지. 별호는 사천일성(四川一星). 청성파 출신이야. 원래 사천성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청성파와 당문, 그리고 아미파는 서로를 칭찬하는 데 인색한 편이야. 하지만 청운의 재능엔 단 한 치의 의심도 보내지 않지. 그래서 사천의 유일한 별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별호가 붙었어.”

여섯 번째는 소림이 키워 낸 무승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천이라는 이름의 승려.

일권붕산(一拳崩山)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별호가 붙을 만큼 강력한 무승이 바로 그였다.

일곱 번째는 특이하게도 여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중화(海中花) 해소월.

해남파가 배출한 여협으로, 검의 극의를 깨닫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는 수행자라고 했다. 한 송이 꽃처럼 도도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견딘다고 했다.

여덟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천강공자(天强公子) 금한수였다.

십이 년 전부터 강호행을 시작한 종남파의 금한수는 금세 두각을 드러냈고,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진 남자. 그래서 붙은 별호도 천강공자였다.

“그리고 마지막 아홉 번째가 바로 저 녀석이지. 천뢰무객 남학. 공동파가 전력을 다해 키워 낸 초기재. 듣기로는 저 녀석의 내공을 완성시키기 위해 공동파의 장로 여섯 명이 각각 절반의 공력을 희생했다고 하더군.”

“…….”

“몰라? 격체전이대법으로 내공을 전수해 줬다는 뜻이야. 장로들이 자신의 내공 절반을 희생해 놈에게 전이해 줬다는 이야기지. 이론대로만 한다면 놈의 내공은 공동파 장로들의 세 배에 달하지. 내공만 따진다면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는 셈이지. 큿!”

초연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구무룡 사이에 서열은 의미가 없어. 가히 용호상박의 무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랜만이군. 초연운.”

“그래! 초연운이야. 응?”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초연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낯익은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학?”

“초연운. 그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주둥이는 여전히 건재하군.”

“그러는 네놈의 기분 나쁘게 야리는 눈빛도 여전하군.”

초연운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바로 남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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