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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4장. 남의 집 잔치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1)
초연운을 바라보는 남학의 눈빛엔 한 줄기 경멸의 빛이 담겨 있었다. 남학이 초연운 주위에 나뒹구는 술병들을 보았다.
“여전하구나.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쉽게 변하면 인간이 아니지.”
“부디 백전전승기(百戰全勝旗)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거라, 연운.”
“왜, 백전전승기가 욕심나나? 남학.”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남학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칼날을 연상시키는 그의 눈빛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졸지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초연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학의 눈빛에도 전혀 주눅이 든 모습이 아니었다.
“취운룡 초연운?”
“정말 낭만객인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취운룡(取雲龍), 술에 취해 구름 속을 헤매는 용.
그것이 초연운의 별호였다.
비록 구무룡에는 들진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구무룡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바로 취운룡 초연운이었다.
수십 년 전 마교가 발호했을 때 강호는 그들의 파상공세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수많은 문파들이 멸문을 당하고, 엄청난 수의 무인들이 죽어 나갔다.
대부분의 문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을 때 홀연히 일어선 몇 문파들이 있었다.
구대문파 중 하나인 화산파가 그 선봉에 섰고,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화산파는 문파뿐 아니라 강호의 명운을 걸고 마교의 파상공세를 막아 냈다. 그로 인해 강호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수많은 문파들의 연합체인 정의맹(正意盟)을 출범시킬 여유를 얻게 되었다.
정의맹은 곧 마교에 대대적인 역습에 나서게 되었다. 그때 선두에서 용맹을 떨치던 자가 있었다.
낭인 출신으로 도법의 극의를 깨달은 자.
그는 용맹했다.
수많은 마교의 고수들이 그의 도에 죽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물러서지 않았고, 불굴의 의지로 전진을 했다.
그의 용맹에 감복한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그를 중심으로 하는 한 문파가 태동했다.
백 번의 전투에서 백 번 승리한 낭인들의 문파. 그래서 문파의 이름 역시 백전문(百戰門)이었다.
백전문을 이끈 위대한 무인의 이름은 장일산.
사람들은 그에게 참마신도(斬魔神刀)라는 별호를 붙여 주고 칭송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전공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하나의 깃발을 만들어 바쳤다.
백전전승기(百戰全勝旗).
백 번을 싸워 백 번을 승리한 장일산과 백전문에 바치는 강호 동도의 헌사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백전전승기는 단순히 백전문의 위엄을 상징하는 깃발이 아니었다. 마교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강호 동도들의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초연운은 그런 백전문의 제자였다. 단순한 제자가 아닌 백전문의 문주인 장일산의 유일한 적전제자.
초연운에게 강호가 거는 기대는 무척 컸다. 사부가 정마대전의 영웅이었으니, 제자도 그에 못지않은 영웅으로 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초연운은 그런 강호 동도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술에 취해 살았다. 그래서 붙여진 별호가 취운룡이었다.
용은 용이되 구무룡에 속하지 못한 취한 용.
혹자는 그런 그를 강호 제일의 낭만객이라고도 불렀다.
취운룡, 강호제일의 낭만객. 하지만 두 가지 별호 모두 그렇게 영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롱기가 더 다분했다.
초연운을 바라보는 남학의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멸의 빛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이곳엔 어쩐 일이지? 백전문과는 꽤나 거리가 먼 곳인데.”
“술이 있는 자리에 내가 빠질 수 있나? 이 근처를 지나다가 마침 홍암산장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지.”
“술을 마시러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라.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내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 그러는 거야?”
“설마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너야말로 잔치에 왔으면 좀 웃지 그래. 쓸데없이 눈에 힘만 들어가지고.”
“난 분명히 경고했다, 연운.”
“알아! 이미 똑똑히 기억했으니 굳이 두 번이나 말하지 말라고. 귀가 아프니까.”
초연운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런 초연운의 태도에 남학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초연운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다시 술잔을 들으며 담호에게 말했다.
“친구,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
담호는 말없이 초연운을 바라봤다. 그러자 초연운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남학의 시선이 담호로 향했다. 하지만 담호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에 남학의 턱 근육이 씰룩였다. 하지만 이 이상 말을 하는 것도 모양이 빠지는 일이었다.
남학이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사납게 뒤돌아섰다.
“잘 가라구.”
등 뒤로 초연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남학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공동파의 제자들이 남학을 따라갔다.
초연운이 술잔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쳇! 재수 없는 놈 같으니라구. 눈에 힘만 들어가면 모두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줄 알고 있는 무뇌아.”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가긴 틀린 것 같았다.
“사부한테 또 혼나려나? 그 양반 잔소리가 한나절을 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려나 몰라. 크큭!”
혼자 말하고 키득거리는 초연운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쉴 새 없이 혼자 떠드는 초연운과 반대로 담호는 그 어떤 말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참 친구도 참 대단하군.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우리가 친구였던가?”
“왜? 어색해?”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담호의 반응에 상처를 입을 만도 하건만 초연운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뭐, 어때? 정 어색하면 지금부터 친구 하면 되지.”
“…….”
“진짜라니까. 그러니까 우리 친구 하자.”
초연운은 아예 담호의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초연운이 그럴수록 담호의 눈빛은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친구?’
삼십여 년을 살면서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리를 저는 그의 모습을 본 동년배들의 반응은 항상 두 가지로 나타났다.
경멸, 혹은 동정.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담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장애만 가지고 제멋대로 판단할 뿐이었다.
가장 가까이 지냈던 화산파의 무인들도 그랬고, 마교에 대해 조사하러 갈 때 합류했던 다른 문파의 무인들도 그랬다.
누구도 대등한 눈높이에서 친구로 다가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담호가 초연운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초연운도 담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동정인가?”
“동정? 아, 그 다리?”
초연운의 시선이 담호의 다리를 향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초연운은 담호가 다리를 저는 것을 보았다. 무인으로서는 분명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하지만 초연운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게 왜?”
“부끄럽지 않겠나?”
“누구나 조금씩 장애를 안고 살아가지. 다리 조금 절면 어떤가? 마음에 장애를 가진 자들도 수두룩한데.”
초연운이 웃었다.
그의 미소엔 한 점의 가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
이신풍의 거처는 홍암산장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잘 가꾼 가산으로 둘러싸인 이신풍의 거처는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천험의 요새였다.
가산 주위엔 절진이 펼쳐져 있었고, 유일하게 들어오는 입구에는 홍암산장에서도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무인들이 돌아가며 번을 서고 있었다.
이신풍은 자신의 거처에서 두문불출했다. 홍암산장의 식구들조차도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측근이 아니면 이신풍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새로 들어온 무인들 같은 경우는 아예 그의 얼굴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이신풍의 별호가 은림대호(隱林大虎)일까.
숲에 은둔하는 큰 호랑이, 그가 바로 이신풍이었다.
두문불출하던 이신풍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며칠 전부터였다. 아무리 은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신풍이라지만 자신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신풍은 자신의 거처를 떠나 본채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본채의 정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고, 수많은 이들이 각종 진귀한 선물을 들고 이신풍을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현현문에서 온 문수경과 좌상천도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문주인 문세강이 보내 온 진귀한 선물이 들려 있었다.
현현문에서 왔다고 밝혔음에도 그들은 다른 이들과 똑같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굴욕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그들의 사문인 현현문이 그렇게 별 볼 일 없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오늘 이곳을 찾아온 여타 문파들에 비하면 말이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제기랄!”
좌상천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에 문수경이 눈을 흘겼다.
“사형.”
“알고 있다고. 그래도 화가 나잖아.”
“참아야 해요. 홍암산장에 비하면 우리 현현문은 정말 별 볼 일 없으니까.”
“흥!”
좌상천이 코웃음을 칠 때였다.
뒤쪽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공동파의 무인들이다.”
“천뢰무객 남학이다.”
문수경과 좌상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십여 명의 무인들을 볼 수 있었다.
선두에서 발군의 기세를 발산하며 다가오는 남자는 바로 공동파의 남학이었다.
그의 등장은 이곳에서 이신풍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던 무인들을 술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신풍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남학 정도의 존재감과 배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남학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은 문수경과 좌상천도 마찬가지였다.
좌상천이 이를 악물고 남학을 노려봤다. 하지만 정작 남학은 그런 좌성천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학에겐 좌상천은 겨우 그 정도의 존재에 불과했다.
그때 본채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오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염소수염을 기른 중노인이었다.
“구 총관이다.”
사람들이 중노인을 보며 수군거렸다.
중노인의 이름은 구중명, 홍암산장의 총관이자 이신풍이 기장 믿는 심복이라 알려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구중명이 직접 마중 나온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렇게 보기 힘든 구중명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만큼 남학이 중요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하긴 구대문파 중 하나인 공동파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무인이니.”
“아무리 홍암산장이라지만 공동파를 무시할 수는 없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고도 무시하는 건지 모르지만 구중명은 입가에 어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남학 소협. 소생은 홍암산장의 총관인 구중명이라고 합니다. 장주님의 명으로 남 소협을 모시러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구 총관. 공동파의 남학입니다.”
남학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공동파와 더불어 감숙성의 패권을 양분하고 있는 홍암산장이었다. 그런 홍암산장의 총관이라면 이인자나 마찬가지. 공동파의 장로급 인사였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했다.
“듣던 대로 헌앙하시군요. 장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동파의 손님을 맞이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나 역시 귀장의 장주님을 뵙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사부님께서도 장주님의 환갑을 축하한다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오! 이렇게 기쁠 수가.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남 소협.”
구중명이 남학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살갑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남학을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중엔 문수경과 좌상천도 있었다.
좌상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구무룡 따위가 뭐라고. 두고 봐라. 조만간 나의 명성이 구무룡을 능가할 테니까.’
그의 주먹 위로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그날 이신풍과 남학은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진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