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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5장. 남의 것을 탐하려면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걸어야 한다(1)
홍암산장의 총관인 구유명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구유명을 바라봤다.
구유명은 미소를 지은 채 잠시 사람들을 바라봤다. 수많은 이들이 오직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유명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책임이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본장의 장주님인 이신풍 대협의 환갑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찾아오신 수많은 내외 귀빈 여러분께 우선 감사의 말씀들 드립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구유명을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그 어떤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본장의 장주님이신 이신풍 대협이십니다.”
구유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상 아래쪽에 있는 조그만 문을 열고 이신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갑을 맞이한 이신풍이었지만, 겉보기에 그의 나이는 오십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육 척의 당당한 체구에 대춧빛이 감도는 얼굴. 큼직한 이목구비가 그의 호방한 성정을 보여 주는 듯했다.
이신풍이 처음으로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엄청난 환호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와아아! 이신풍 대협이시다.”
“이신풍 대협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신풍이 미소를 지은 채 사람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하하하! 고맙소. 모두 불철주야 바쁘실 텐데 이 이 모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와 주셔서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오.”
“이 대협은 단순히 홍암산장의 장주님이 아니십니다. 이 감숙성의 정신적인 지주이니만큼 반드시 찾아와 봬야죠.”
“맞습니다.”
사람들은 앞을 다퉈 이신풍의 생일을 축하하며,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노출시키려 애를 썼다.
이신풍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만큼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각인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경쟁은 실로 치열했다.
그런 사람들의 경쟁에 지칠 만도 하건만 이신풍은 변하지 않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런 이신풍의 태도에 사람들은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신풍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없는 이 늙은이가 벌써 환갑을 맞이했습니다. 너무 오래 살았다 욕하지 마시고, 부디 기꺼운 마음으로 이 자리를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 술이 가득 든 잔을 치켜들었다.
“이 대협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한마디씩 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이신풍도 술잔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가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단상 아래 모인 수많은 이들이 일제히 술잔을 들이켰다.
그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고,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 충분했다. 흥은 최고조에 달했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이신풍의 환갑연을 즐겼다.
이신풍은 단상에 앉은 귀빈들과도 반가이 인사를 나눴다. 그들 중에는 공동파에서 온 남학도 있었고, 흑백쌍귀도 있었다.
이신풍은 그들과 소소한 대화를 하며 단상 아래를 바라보았다.
천 명이 넘는 대인원이 오직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그와 홍암산장의 위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이신풍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지워질 줄 몰랐다.
담호는 그런 이신풍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여유와 배포가 느껴졌다. 이신풍의 존재감은 마치 솜에 스며드는 물처럼 은연중 장내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단순히 홍암산장의 장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기도가 그만큼 출중한 것이다.
이신풍이 있는 단상 뒤로 처음 보는 인물들이 보였다. 그들은 이신풍과 매우 친한 듯 보였다.
그때 담호의 근처에 있던 무인이 탄성을 내뱉었다.
“허! 저들은 죽림삼우(竹林三友)가 아닌가? 저 엉덩이가 무거운 양반들도 이 대협의 생신을 축하드리러 왔군.”
“죽림삼우면 강호의 은자들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아니던가?”
죽림삼우는 이신풍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무인들이었다. 이신풍과 함께 활동을 하면서 큰 공을 세웠지만, 어쩐 일인지 이신풍과 마찬가지로 죽림에 은거를 했다.
죽림삼우의 첫째인 안수천은 오십 대 중후반에 청수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멋스럽게 기른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섭선을 부치는 그의 모습은 탈속해 보였다.
둘째인 조군월은 특이하게도 주로 여인들이 사용하는 면사가 달린 죽립을 쓰고 있었다. 면사 사이로 드러난 눈이 무척이나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조군월의 곁에는 셋째인 황철산이 있었다. 황철산은 체구가 칠 척에 달하는 거구로 등 뒤엔 커다란 대부를 짊어지고 있었다.
오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십 대의 청년처럼 혈기가 왕성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죽림삼우는 이신풍과 무척이나 친한 듯 보였다. 간혹 귀엣말을 주고받는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담호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마침 빈자리가 하나 났기에 자리에 앉았다. 시비들이 음식을 차렸지만,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담호는 지겹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자신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그 혼자만이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담호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환갑연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악공들이 연주를 하며 흥을 돋우고, 곡예단이 각종 묘기를 선보이며 사람들의 환호성을 이끌어 냈다.
흥이 최고조에 이르자 이신풍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기대어린 표정으로 이신풍을 바라봤다.
“모처럼 이 늙은이의 환갑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 많은 분들이 모였는데 그냥 이대로 시간을 보낸다면 아쉽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이 대협.”
“기왕 이렇게 모인 것 재미나게 놀아 봅시다.”
“어떻게 말입니까?”
“내가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이 문제를 맞히시는 첫 번째 분께 저희 홍암산장의 보물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보물?”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신풍이 말하는 보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홍암산장에서 귀하게 취급하는 것이라면 보통 물건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진법입니다.”
“진법?”
“마침 저희 홍암산장의 구 총관이 진법의 달인입니다. 그가 펼치는 진법은 그야말로 강호의 일절이라 할 수 있지요. 이제부터 구총관이 미로진을 펼칠 겁니다.”
“미로진?”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구총관이 펼친 미로진을 제일 먼저 빠져 나오는 분에게 본장의 보물 중 하나인 청월검(靑月劍)을 드리겠습니다.”
“청월검이라면 설마?”
“그렇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사용하던 보검이지요. 비록 사용하지 않은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날카로우니 제법 쓸 만할 겁니다.”
“와! 최고다.”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젊은 시절 이신풍은 청월검에 의지해 무명을 쌓았다. 청월검으로 펼치는 월광십이절(月光十二節)은 강호의 절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신풍이 젊었을 적 그의 청월검에 목숨을 잃은 마인들이 수백 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이신풍의 청월검은 강호에서 알아주는 보검. 그런 명검을 소유한다면 본래 지닌 능력 이상의 무위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특히나 검법을 익힌 무인들에게는.
“내가 도전하겠소.”
“내가 제일 먼저 도전하겠소. 어서 미로진을 열어 주시오.”
사람들이 앞을 다퉈 미로진에 도전하겠다고 떠들었다.
이신풍이 구유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구유명이 미소를 지으며 단상 밑으로 내려갔다.
단상 밑에는 상당한 양의 쇠막대가 쌓여 있었다.
구유명은 단상 아래 공터에 쇠막대를 하나씩 꽂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무인들은 원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구유명이 마지막 쇠막대기를 바닥에 꽂았을 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스!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더니 미로진이 형성되었다.
구유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십방미로진(十方迷路陳)입니다. 살상력은 전혀 없지만, 이 안에 들어가면 감각이 흐트러져 방향을 잡기 힘들지요. 진의 유지 시간은 두 시진 정도입니다. 그 안에 부디 성공하시는 분이 나오길 빌겠습니다.”
구유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격 급한 무인들이 안개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호검객(老虎劍客) 장문익 대협이 십방미로진으로 들어갔다.”
“오진풍 소협도 들어갔어.”
무인들이 하나둘씩 십방미로진으로 들어갈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연회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고, 사람들은 이런 깜짝 행사를 기획한 이신풍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신풍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는 최고조에 달했고, 사람들은 과연 누가 제일 먼저 십방미로진을 빠져나올 것인지 궁금해 했다.
엄청난 열기가 장내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담호에게도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열기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이신풍을 바라봤다.
이신풍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한낱 쇠붙이에 눈이 멀어 저런 사람들 앞에서 저런 광대놀음이나 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담호가 연무장을 나와서 향한 곳은 바로 흑귀가 있는 마사였다.
푸르르!
담호가 다가가자 흑귀가 반갑다는 듯이 투레질을 했다. 이신풍의 환갑연이 벌어지는 동안 꼼짝없이 마구간에 갇혀 있던 흑귀였다.
담호가 흑귀의 목덜미를 두들겨 주었다.
“갑갑해도 조금만 참거라. 곧 마음껏 달리게 해 줄 테니까.”
오늘만 지나면 이신풍의 환갑연도 끝이 난다. 그럼 방진보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흑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담호의 어깨에 커다란 얼굴을 비볐다. 담호는 그런 흑귀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문득 담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끝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담호가 방금 전까지 쓰다듬던 흑귀의 등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어제까지도 보이지 않던 상처들이 보였다.
벌겋게 달아오르고, 벗겨진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어떤 곳에서는 미처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났다.
담호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푸르르!
흑귀가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담호가 그런 흑귀의 두 눈을 말없이 바라봤다.
말을 못하는 짐승이었지만, 흑귀의 눈은 많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담호가 마구간 안을 둘러봤다.
채찍과 안장이 보였다. 채찍에 피가 묻어 있었다. 더 이상 확인할 것도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담호가 흑귀의 뺨을 두들겨 준 후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마구간을 관리하는 인부가 있는 창고였다. 창고의 문을 열자 인부 두 명이 놀란 얼굴로 담호를 바라봤다.
“뭐요?”
“누구지?”
밑도 끝도 없는 담호의 말에 인부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담호의 눈빛이 변했다. 순간 인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담호의 눈빛을 인부들이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몸이 마치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인부들은 바지에 오줌까지 저렸다. 사타구니 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왔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누구지? 내 말에 채찍질을 한 자가.”
“말이라면?”
“마구간에 있는 검은 말.”
“그, 그건…….”
인부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