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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5장. 남의 것을 탐하려면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걸어야 한다(2)
“으아아! 죽겠다.”
방진보가 앓는 소리를 하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도 수고했다.”
송환이 두툼한 손으로 방진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방진보는 오늘도 충분히 제 몫을 해냈다. 덕분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주문들을 모두 소화해 낼 수 있었다.
“모두 수고 많았다. 급한 일은 끝났으니 오늘은 이만 쉬어도 좋다.”
“와아아!”
숙수들과 보조 숙수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이 환갑연의 절정이었다. 이신풍을 보기 위해 가장 많이 사람들이 모인 날이었다. 덕분에 주방에 있었던 인원들은 음식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도 없었을 정도였다.
송환이 방진보에게 말했다.
“힘들겠지만 내일까지만 도와다오.”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맙다. 힘들 텐데도 묵묵히 일해 줘서. 덕분에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저도 즐거워서 하는 일이에요. 덕분에 이제까지 모르던 음식도 많이 알았구요.”
장주인 이신풍이 먹은 음식 대부분은 송환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송환은 수석 숙수답게 남들은 모르는 각종 요리 비법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방진보는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송환도 감숙성에서는 알아주는 대숙수였다. 그런 사람과 함께 요리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방진보에겐 잊을 수 없는 벅찬 감동이었다.
송환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모두 수고했다.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푹 쉬거라.”
“수고하셨습니다.”
숙수들과 보조 숙수들이 일제히 송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송환은 그들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차석 숙수인 우복겸이 그 뒤를 따랐다.
다른 숙수들마저 모두 나가고 주방에는 방진보와 소진서 둘만이 남았다.
방진보가 소진서를 보며 웃었다.
“그럼 형, 다시 시작해 볼까요?”
“그래!”
소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방진보에게 불을 대하는 자세를 들은 이후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야 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불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용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덕분에 그의 요리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 모두가 방진보 덕분이었다.
방진보는 그 후로도 소진서에게 각종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결같은 방진보의 모습에 소진서는 감동했다.
이제 그는 방진보를 질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진보를 아끼고 따랐다.
타타탁!
주방 안에 두 사람의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소진서는 방진보의 가르침대로 불을 이해하면서 요리를 하려 애를 썼고, 방진보는 낮에 요리를 하던 송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하하!”
주방 안에 그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진보가 주방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아! 좋다.”
방진보가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유독 달이 밝아 보였다.
달을 보니까 아비가 떠올랐다.
“아버지 없어도 나 잘살고 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방진보가 달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이내 뛰어갔다.
저 멀리 객사가 보였다.
“형!”
방진보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담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
***
좌상천은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지금 그의 주위엔 비슷한 또래의 젊은 무인들 네 명이 있었다. 그들 모두 홍암산장에서 만난 무인들이었다.
좌상천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젊은 무인들. 그들은 모두 감숙성에서 내로라하는 기재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한자리에 앉게 되었고, 의기가 투합해 이제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하하! 이제야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만나다니. 이제까지 인생을 헛살았군.”
“누가 아니라는가? 이제라도 자네들을 만나 정말 다행이네.”
“좋은 벗들과 맛있는 술 한잔을 함께할 수 있으니 정말 좋군.”
장학경, 모중현, 윤상한이 바로 그들의 이름이었다.
장학경은 난주에 적을 두고 있는 제법 큰 상단의 소단주였고, 모중현은 운양무관의 수석 교두였다.
윤상한은 공동파의 속가제자로 이곳 감숙성에서는 매우 뛰어난 기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술을 마시는 장소는 홍암산장 내의 별채였다. 장학경의 부친이 운영하는 상단에서는 매년 홍암산장에 매우 큰 액수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 덕에 특별 대접을 받아 별채를 배정받은 것이다.
이곳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꽤 많은 술을 마셨는지 그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발치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술기운이 한참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사형!”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별채 안에 울려 퍼졌다.
“이게 누구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사매 아닌가?”
좌상천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별채에 들어온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바로 좌상천의 사매인 문수경이었다.
문수경이 좌상천을 향해 다가왔다.
“사형, 대체 이곳에서 뭐하는 거예요?”
“뭐가 말이냐?”
“연회에 참석하셔야죠.”
“가 봐야 이 장주는 만날 수도 없는데 뭐 하러?”
“뭐라구요?”
“아무리 내가 그곳에서 얼쩡거려 봐야 그가 만나 줄 것 같아? 현현문은 그의 안중에 없다고.”
“사형!”
“현실을 인정하라구. 사매. 손에 닿지도 않을 이신풍은 그만 잊어버리고 사매도 여기에 앉는 게 어때? 차라리 이들과 교분을 나누는 것이 현현문의 미래에 훨씬 더 도움이 될걸.”
좌상천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런 좌상천의 모습에 문수경의 표정이 이지러졌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좌상천의 허영은 무척 심해졌다. 전에도 허영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형, 제발…….”
“두고 봐, 사매. 현현문은 내 대에서 더욱 크게 일어설 테니까.”
좌상천의 말에 문수경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장학경 등이 한마디씩 했다.
“문 소저, 좌 형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소. 그러지 마시고 함께하십시다.”
“그렇소! 보다시피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오. 우리와 교분을 나누는 것이 현현문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들은 매우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문수경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문수경이 좌상천을 노려봤다.
“사형, 어젯밤엔 어디 갔었나요?”
“응? 그건 왜?”
“숙소에도 안 돌아오셨잖아요.”
“흐흐! 일이 있었거든.”
“무슨 일요?”
“내가 사매에게 내 사생활까지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 사매. 내가 현현문의 제자이긴 하지만 사매에게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할 의무는 없어.”
“사형!”
“술을 마시지 않을 거면 어서 가 보라구.”
좌상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문수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사형이라고 끝까지 기대를 놓지 않고 있었는데, 좌상천은 그녀에게 너무 큰 실망만을 안겨 주고 있었다.
좌상천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들이 좌상천의 허파에 바람을 가득 불어넣었다.
문수경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소리도 없이 별채의 정문이 열렸다. 하지만 좌상천을 비롯한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데 정신이 팔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
문수경은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문이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다리로 바닥을 끌며 조용히 다가오는 남자를 보는 순간 문수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칠게 헝클어진 검은 머리와 칠흑처럼 어두운 가죽 장포를 입은 사내.
‘진보의 형이라던 남자.’
이곳에 오는 동안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뚱뚱한 소년의 곁에 있던 남자였다.
워낙 첫인상이 강렬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아무리 그녀가 이신풍의 환갑연에 정신이 팔렸다고 하지만 그처럼 강렬한 인상을 가진 사람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사실 자체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담호를 보면서 문수경은 자신이 왜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덜덜!
두려웠기 때문이다.
머리가 먼저 두려움을 인지하고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담호란 존재를 머릿속에서 애써 밀어낸 것이 분명했다.
담호는 그저 걸어올 뿐인데 그녀의 몸은 마치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문수경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몇 걸음이나 물러났는지 몰랐다. 그녀가 멈춰선 것은 좌상천 등이 앉아 있는 평상에 몸이 막혔을 때였다.
“왜 그래? 사매. 이제라도 생각이 바뀌었나?”
아직 담호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좌상천이 히죽 웃었다. 하지만 문수경이 대답을 하지 않고 몸을 떨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응?”
그제야 담호를 발견한 좌상천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넌?”
담호의 눈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 어떤 동요도 없고, 감정의 편린도 엿보이지 않는 완벽하게 검은 눈동자. 하지만 좌상천은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옴을 느꼈다.
마치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낯설고 두려운 느낌에 좌상천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네놈이 이곳에 웬일이냐?”
일부러 큰 소리를 쳤다. 그래야 자신이 느끼고 있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떨쳐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오? 좌 형.”
장학경 등이 그런 좌상천의 반응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순간 들려온 담호의 나직한 한마디.
“왜 그랬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좌상천만큼은 담호의 단순한 질문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래도 일단 발뺌을 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들어온 것이냐? 이곳은 너 따위 무지렁이가 들어올 곳이 아니다.”
좌상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곁에 있던 장학경이 호기롭게 나섰다. 술기운이 그에게서 냉철한 판단력을 앗아간 데다 모중현과 윤상한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용기를 북돋았다.
한 사람은 난주 최고의 무관 중 하나인 운양무관의 수석 교두였고, 다른 한 명은 공동파의 속가제자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모중현도 웃으며 일어섰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인 모양이군. 좌 형과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에서 이러면 안 되지. 이곳은 이신풍 대협이 우리를 위해 특별히 내준 공간이거든. 이런 곳에서 타인이 말썽을 피우는 것은 모두를 위해 좋지 않지.”
장학경과 모중현이 나섰음에도 윤상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굳이 자신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호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좌상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담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왜 그랬지?”
“뭐가 말이냐? 나는 도대체 네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좌상천은 끝까지 모른 척했다.
아까 술김에 마구간을 찾아갔다. 계속해서 흑귀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검은 흑귀의 모습은 유혹 그 자체였다.
마구간을 지키던 인부들에게 돈 몇 푼을 쥐어주고 흑귀에 타 보려고 했다. 하지만 흑귀는 미친 듯이 저항했다.
화가 난 좌상천은 근처에 있던 채찍으로 미친 듯이 흑귀를 때렸다. 하지만 흑귀는 끝까지 좌상천을 태우지 않고 버텼다.
결국 때리다 지친 좌상천은 이곳으로 돌아왔고, 다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이유야 어쨌거나 그가 흑귀를 때린 것은 사실이었고,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부끄러운 짓이기도 했다.
그때 제정신을 차린 문수경이 끼어들었다.
“사형,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건가요?”
“시끄러! 내가 무슨 일을 했단 말이냐? 사매는 지금 저자의 말을 믿는 거야? 현현문의 대제자인 내 말보다 더?”
“사형, 대체 당신은…….”
문수경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최소한 십여 년 이상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지내온 사이였다. 좌상천의 표정만 보고도 거짓과 진실을 판별할 수 있었다.
문수경의 처연한 눈빛이 좌상천을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가 담호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래! 내가 네 말 좀 타려고 했다. 그래서 뭐? 한번 타 보는 게 뭐 어때서 이 지랄을 떠냔 말이다.”
“지랄?”
“그래! 지랄. 이 개 같은 새끼야!”
흥분한 좌상천이 두려움도 잊고 담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현현문의 비전 무공인 남명권(南明拳)의 묘리가 실려 있었다.
살의가 담긴 일격이 담호를 향해 날아갔다.
“사형!”
놀란 문수경이 소리를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