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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6장. 혈성(血星)이 빛을 발하니 모두가 숨을 죽인다(1)
십방미로진을 가장 먼저 통과한 이는 뜻밖에도 조경의라는 젊은 무인이었다. 그는 이신풍에게 청월검을 하사받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감사합니다, 이 대협. 이렇게 귀한 보물을 넘겨주시다니요.”
“보물이 임자를 찾아간 셈이지. 부디 청월검을 아껴 주게.”
“물론입니다. 제 몸처럼 아껴 사용하겠습니다.”
“고맙네.”
이신풍이 두툼한 손으로 조경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그에 조경의가 더욱 감격한 표정으로 이신풍을 바라봤다.
“자네와 같은 훌륭한 무인과 연이 닿았으니 무척 기쁘군.”
“저야말로 이렇게 이 대협의 검을 가지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라도 제 힘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저와 운양무관은 언제라도 이 대협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하하! 말만 들어도 든든하군.”
이신풍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조경의는 운양무관의 당대 관주였다.
어릴 때부터 무공에 두각을 나타내어 서른이 되기 전에 운양무관의 관주직에 오른 기재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검술에 능했는데, 마음에 드는 검이 없어 고민이었다. 그러던 차에 청월검과 같은 보검을 얻으니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신풍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운양무관은 난주에서 가장 큰 무관 중 하나였다. 그런 무관의 관주가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겨우 검 한 자루를 주고 맹세를 받았으면 남는 장사였다. 어차피 청월검은 그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수많은 이들이 아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경의와의 경쟁에서 패한 이들이었다.
이신풍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것 참 그냥 여흥거리로 한 일인데 너무 많은 분들께 아쉬움을 남긴 것 같구려.”
“아닙니다. 이 대협. 훌륭한 행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쉬운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이신풍은 그들의 마음을 읽었다.
“그럼 이렇게 하겠소. 내년 내 생일에 비무 대회를 개최하겠소. 우승자에게는 청월검 못지않은 보검을 상품으로 드리겠소.”
“와아아!”
이신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이신풍의 이름을 연호하며 흥분했다.
그 광경을 단상에서 지켜보던 남학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저 여우 같은…….’
이번 환갑연에서는 청월검을 걸었고, 내년 회갑연에서는 다른 보검을 상품으로 걸었다.
무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행사였다.
이로써 감숙성에서 홍암산장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했다.
홍암산장이 커지는 것은 공동파로서는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감숙성의 패자는 공동파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남학이 차가운 시선으로 이신풍을 바라볼 때 공동파의 제자 중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대사형.”
“무슨 일인가?”
“저…….”
제자가 귀엣말로 남학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남학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지금 의원이 그를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남학의 눈매가 날카로워진 그 순간이었다.
단상 아래 있는 조경의에게도 누군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경의의 사제이자 운양무관의 수석 교두인 모중현이었다.
모중현이 무어라 속삭였는지 모르지만 조경의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그가 이신풍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다.
남학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디냐?”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자가 급히 앞장섰다. 그가 향한 곳은 홍암산장의 별채였다.
별채로 들어가자 침상에 누워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학이 아는 얼굴이었다.
“상한.”
“대, 대사형?”
남학을 발견한 남자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오른 팔이 부러지고 망가져 힘을 줄 수가 없어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가만있거라. 상한.”
“대사형.”
남자는 바로 공동파의 속가제자인 윤상한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면목 없습니다.”
남학의 눈빛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러자 윤상한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남학은 공동파에서 윤상한이 가장 존경하는 무인이었다. 그는 다른 장로들보다 남학을 더욱 두려워하고, 그래서 공경했다.
윤상한 역시 알아주는 기재였지만, 남학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가 본산제자로 들어가지 않은 것도 남학이란 거대한 벽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남학의 시선이 윤상한의 오른팔로 향했다.
뒤틀리고, 부러진 윤상한의 오른팔은 시커멓게 변색된 채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누구냐?”
“사형.”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제 부덕 때문입니다. 문제 삼고 싶지 않습니다.”
“상한.”
“죄송합니다.”
윤상한이 눈을 감았다.
그런 윤상한의 모습에 남학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윤상한은 언제나 그랬다. 무척이나 고집스러웠고, 한 번 결정하면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공동파에서도 그랬다. 모두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서 본산제자가 되길 바랐지만, 윤상한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결정대로 행했다.
남학은 그런 윤상한이 좋았다. 비록 본산제자와 속가제자로 갈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상한을 잊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네 팔을 그렇게 만든 자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형.”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부탁입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이 이상 문제를 확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윤상한의 의지가 확고하자 남학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윤상한을 어떻게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알겠다. 너의 말을 들어주마. 대신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말해다오.”
“사형.”
“비록 속가라고 하지만 너의 실력은 본산의 일대제자들에 비해 그리 뒤지지 않는다. 말해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휴! 사실은…….”
윤상한의 입술이 한숨과 함께 열렸다.
“형, 늦으셨네요.”
객사 앞 평상에 앉아 있던 방진보가 담호를 맞이했다.
방진보의 몸에서는 기름 냄새가 풍겼다. 하루 종일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다보니 몸에 배인 것이다.
땀 냄새와 섞여 기분 나쁘게 느껴질 만도 하건만 담호는 인상 한 번 쓰지 않았다. 방진보가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일은?”
“아까 끝났어요. 내일까지만 나오면 된 다네요. 헤헤!”
담호가 묻지 않았는데도 방진보는 주방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기 시작했다.
“수석 숙수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비법을 알고 계신지. 덕분에 훔쳐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니까요. 오늘은 쇠고기 완자를 만들었는데…….”
담호는 묵묵히 방진보의 말을 들었다. 방진보는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방진보가 한참 떠들 때였다.
“안에 있는 자는 나와라.”
밖에서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진보가 깜짝 놀라 담호를 바라봤다.
“형?”
“나가자.”
담호는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객사 앞마당에 포진하고 있는 수십 명의 무인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장학경과 모중현이 선두에 있었고, 조경의와 이신풍 등이 그들 뒤에 서 있었다.
담호가 나오자 모중현이 소리쳤다.
“저자입니다. 저자가 좌 형을 반신불수로 만들었습니다.”
모중현의 손가락은 정확히 담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에 조경의가 앞으로 나섰다.
조경의의 허리에는 청월검이 걸려 있었다. 청월검을 얻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담호의 시선이 조경의를 향했다. 담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경의가 움찔했다. 무감각한 담호의 눈빛이 왠지 소름끼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경의는 어깨를 폈다.
이곳은 홍암산장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홍암산장의 장주인 이신풍이 지켜보고 있었다. 위축될 이유가 하나 없었다.
조경의가 눈에 힘을 주었다.
“왜 그랬나? 말로 해결해도 될 것을.”
“내가 먼저 공격했다고?”
담호가 물었다.
대답을 한 이는 모중현의 곁에 서 있던 장학경이었다.
“네놈이 이유 없이 좌 형을 공격하지 않았더냐? 설마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겠지?”
장학경의 목에 핏대가 섰다.
좌상천이 반신불수가 된 것은 크게 아쉽지 않았다. 그만큼 강한 인연도 아니었기에 미련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담호를 보내면 그들의 체면이 살지 않았다.
장학경은 거대 상단의 소단주였고, 모중현은 운양무관의 수석 교두로 모두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언제 이런 굴욕을 당해 봤을까? 그냥 넘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너진 자존심을 어떻게든 회복해야 했다. 그래야만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조경의를 끌어들인 것이다. 마침 조경의는 이신풍과 돈독한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조경의를 끌어들이면서 자연스럽게 이신풍까지 불러들였다. 장학경과 모중현으로서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 셈이었다.
담호가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경의와 이신풍을 무시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중현이 소리쳤다.
“놈은 필시 사파의 마두가 분명합니다. 놈의 눈에 흐르는 살기를 보십시오.”
“맞습니다. 놈은 마공을 익힌 것이 분명합니다. 잔혹한 손속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장학경이 모중현의 말에 동조했다.
조경의는 그들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장학경은 몰라도 모중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모중현이었다. 이번 일도 분명 그가 빌미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모중현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운양무관의 수석 교두이자 자신의 오른 팔이었다. 그의 체면을 적절히 살려 줘야 했다.
조경의가 다시 한 번 담호에게 물었다.
“마공을 익혔나?”
“…….”
“좌상천의 하반신 뼈가 모조리 부서졌다. 정파의 무공이라면 그렇게 잔혹할 수 없을 터. 이에 대한 해명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왜 해명을 해야 하지?”
“하지 않으면 마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 강호에서 마인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조경의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빛이 떠올랐다. 그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네가 마인이라도 상관없고, 아니라도 상관없어. 내가 너를 마인으로 만들 테니까.”
단순히 청월검의 보유자라는 사실만으로는 명성이 부족했다.
어렵게 이신풍과 연을 맺은 만큼 명성이 더욱 필요했다.
명성은 공을 세움으로써 얻는 법.
희대의 마인을 청월검으로 베었다면 그만큼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객사 주위 담장 위에서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신풍의 환갑연에 참석했던 무인들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들은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태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도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이 또한 훌륭한 여흥거리였다.
진실이야 어떻게 되든 보고 즐기면 될 터였다. 그들은 편하게 담장 위에 자리를 잡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공을 세운다면 조경의라는 이름 석 자 또한 유명해질 것이다.
조경의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순순히 항복하는 게 좋을 거야. 고통을 경험하기 싫으면.”
하지만 담호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형!”
담호의 등 뒤에 있던 방진보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시선이 담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방진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방진보는 담호를 믿고 있었다.
담호의 손속이 과격하긴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가 먼저 누군가에게 시비를 건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진보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담호가 입을 열지 않자 조경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개 짖는 소리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으니까.”
“뭣이라?”
조경의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지만 담호는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장학경과 모중현을 향했다.
“친구가 맞군.”
“무슨?”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까.”
“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모중현과 장학경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강호에서 허언은 피를 부르는 법이지.”
담호의 스산한 목소리가 객사 마당 안에 울려 퍼졌다.
콰앙!
“아악!”
뇌음이 터져 나오고, 누군가의 비명이 밤하늘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