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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68화 (6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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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장. 혈성(血星)이 빛을 발하니 모두가 숨을 죽인다(3)

이신풍의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냥 우습게 흘려들어도 될 말이었다. 하지만 이신풍은 그렇지 못했다.

담호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어떻게 지키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탓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담호의 기세에 짓눌려 물러서게 된다면 감숙성 북부의 맹주를 자처했던 그의 위신에 큰 금이 가게 된다.

‘고약하게 됐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휘말려 든 사건.

처음엔 그저 단순한 은원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마치 늪지에 빠진 것처럼 그의 몸이 사정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어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늪지 밑바닥까지 가라앉고 말 것이다.

그리되면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칠흑처럼 새까만 눈동자 안엔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눈빛은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저런 눈을 가진 자는 분명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것이다.’

세상에 흔치 않은 부류다. 하지만 저런 부류의 인물을 만나는 것은 그도 처음이었다.

“감히! 망발을 하다니.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반응을 한 것은 혈화단주 노이명이었다.

노이명은 가장 존경하는 이신풍이 이런 대접을 받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쉬아앙!

그의 등에 걸려있던 탕마곤(蕩魔棍)이 담호를 향해 휘둘러졌다.

통짜 쇠로 주조해 만들었기에 무게만 삼백 근에 길이만도 일 장에 가까웠다.

일단 한 번 격중 하면 단순히 살이 찢기고, 근육이 파열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져 나갈 만큼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버르장머리만큼은 단단히 고쳐놓으마.’

일단 무릎부터 박살 낼 생각이었다.

콰앙!

그 순간 세상이 울렸다. 아니, 노이명의 머리가 울렸다.

노이명의 머리가 모로 튕겨 나가고, 탕마곤이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헉!”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노이명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재앙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덥석!

어느새 담호의 억센 손아귀가 노이명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이어 용권풍에 휩쓸린 것처럼 그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크윽!”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노이명이 담호의 팔을 풀어내려고 했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담호가 허공에서 회전을 하면서 그대로 노이명을 바닥에 내리꽂은 것이다.

지천격(地天擊), 그 살인적인 초식이 노이명을 상대로 펼쳐졌다.

청석으로 된 바닥이 노이명의 눈에 급속히 확대됐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

쾅!

그 순간 노이명의 머리가 바닥과 충돌했다. 단단한 청석과 충돌한 노이명의 머리가 호박처럼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사방으로 튀는 선혈과 회백색 뇌수.

그 충격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중에는 홍암산장의 주인인 이신풍도 있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노이명은 이신풍의 오랜 심복이었다. 그런 만큼 노이명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았다.

노이명은 결코 저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두 눈이 어둠으로 일렁였다. 순간 주위의 공기마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담호가 입을 열었다.

“난 선택을 했어. 너는?”

그의 두 손이 어느새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손속.

수많은 무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담호는 개의치 않았다. 이신풍 혼자라도 상관없고, 이곳에 있는 무인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상관없었다.

전신의 피가 들끓고 있었다.

동굴에 갇혀 있던 기간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짐승 한 마리가 자라났다.

시꺼멓고, 거대한 짐승이었다.

포악하기 그지없는 이 검은 짐승은 타협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낸 모든 것을 파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주위의 기온이 내려간 것 같은 차가움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크윽!”

“이 무슨?”

단순히 여흥거리로만 생각하고 즐기려던 무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담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와 박력은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을 주었다.

그것은 이신풍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감숙성에서 알아주는 고수였다. 그 옛날 마교와의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나이든 늙은 무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예전의 기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던 용맹함은 늙은이의 옛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담호가 이신풍을 향해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뭐, 뭐가 말이냐?”

“당신이 겁쟁이라는 것.”

“헛소리!”

“은림대호(隱林大虎)…… 숲에 은둔하는 큰 호랑이?”

담호의 눈에 어린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반대로 이신풍의 눈동자는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담호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호랑이는 결코 은둔하지 않아.”

“무슨?”

“야성을 잃은 호랑이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야. 숲에 은둔하는 그 순간부터 당신은 호랑이가 아니었어. 단지 호랑이인 척한 것뿐.”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직접 싸워 본 게 언제지? 피를 흘리고, 상대를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해 본 적은?”

“…….”

“없을 거야.”

이신풍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담호의 기세에 짓눌린 탓이다.

“그러니까 타인에게는 선택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은 선택을 하지 못하지.”

담호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검은 망막에 이신풍의 얼굴이 맺혀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맺힌 이신풍은 한 사람의 당당한 무인이 아니었다.

나이 들고, 겁을 집어먹은 하찮은 늙은이일 뿐이었다. 잠깐 사이에 족히 수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저, 저게 나라고?’

이신풍은 믿을 수 없었다.

급히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 제기랄! 나는…….”

“싸우는 게 무서워 은둔한 늙은이. 그게 당신이야.”

담호의 말은 이신풍의 가슴을 산산이 찢고 있었다.

장주가 모욕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화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움직이는 순간 죽는다.

본능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가만있을 수도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움직여야 했다.

그들은 이신풍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이신풍은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그때였다.

“그쯤 하지, 친구.”

장내에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묵직하면서도 강력한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공동파의 남 소협이다.”

“천뢰무객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처럼 새롭게 등장한 이는 공동파의 남학이었다. 그의 등 뒤로 공동파의 무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남학과 공동파의 무인들이 담호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홍암산장의 무인들이 양쪽으로 비켜서 길을 열어 줬다.

담호의 시선 또한 남학을 향했다. 그제야 압박감에서 벗어난 이신풍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학이 담호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천뢰무객이라는 별호답게 남학의 전신에서는 묵직한 기세가 발산되고 있었다.

마침내 남학이 담호의 앞에 섰다.

담호를 바라보는 남학의 눈빛이 강렬한 투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담호의 눈빛에도 위축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남학이다. 자네가 팔을 망가트린 상한이 나의 사제지.”

“그래서?”

“그에게 그간의 사정을 모두 들었다. 좌상천이 자네의 말을 훔치려 했다며?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반신불수로 만든 것은 너무 과했어.”

남학의 눈빛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검 날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담호의 전신을 헤집을 듯 쏘아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타인에 의해 꺾인 적이 없는 자의 자신감이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봤다.

장학경과 모중현의 시신이 보였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끼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조경의의 시신도.

“쯧!”

남학이 혀를 찼다.

조경의는 저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하다고 듣는 감숙 무림이었다. 조경의는 그런 감숙 무림에서도 제법 뛰어난 인재였다.

그를 잃은 것은 꽤나 큰 손실이었다.

남학이 다시 담호를 바라보았다.

“상한은 자네를 이 이상 건들지 말라고 했지. 명백히 자기들이 잘못했다면서.”

“…….”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결과가 어떻게 나왔든 원인을 제공한 것은 현현문의 좌상천과 저 녀석들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그들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야. 강호에는 나름의 법이 있으니까.”

남학이 담호를 향해 다가섰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천뢰무객이라 불리는 남학이었다.

내공에 관해서만큼은 그 어떤 절대의 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심후했다. 그런 그의 기세에 정면으로 맞서고도 무사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크윽!”

이신풍이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남학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이 자신을 월등히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공동파의 대제자라는 건가?’

삼십여 년 전 마교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홍암산장에서 은거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같이 감숙성에 적을 두고 있는 공동파 때문이었다.

남들은 감숙성 북부의 패자라든지, 공동파와 같이 양강(兩强)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이신풍은 그것이 턱도 없는 헛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겨우 오십여 년 동안 힘을 쌓아온 홍암산장과 수백 년을 감숙성의 패자로 자리 잡은 공동파의 저력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괜히 공동파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이신풍은 은거를 하면서 힘을 쌓으려 했다.

환갑연에 청월검을 상품으로 내민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신풍이 물러나자 혈화대 무인들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장주님.”

“나는 괜찮다.”

“공동파의 천뢰무객이 나섰으니 저 마두도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혈화단의 무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담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메마른 웃음, 그것은 분명 조소였다.

“강호의 법이라.”

“그래!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지.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고, 함부로 분란을 일으켜서도 안 되지. 지금 자네는 평화롭던 감숙성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어.”

“그래서?”

“나와 함께 공동파로 가세. 적합한 처분을 받게 해 주지. 그러면 더 이상 누구도 자네에게 시비를 걸지 못할 거야.”

“적합한 처분?”

“그래! 본 파의 장로님과 문주님이 적합하게 판정을 해 줄 거야. 이건 내 마지막 충고일세.”

“싫다면?”

“나와 싸워야겠지.”

남학이 두 손을 늘어트렸다.

단지 그뿐인데 기세가 변했다. 마치 거대한 화강암이 일어선 것처럼 굳건한 기세.

폭풍이 불어와도 절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담호가 문득 물었다.

“내 이름이 뭐지?”

“그건…….”

“충고를 하려면 최소한 이름이라도 알아야지.”

담호의 말에 남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호의 법은 아는데, 예의는 모르는 모양이군.”

“건방진!”

남학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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