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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7장. 홀로 걷기에 강하다(2)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믿어야 했다.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그들의 앞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미친…….”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공동파의 장문제자이자, 구무룡의 일원이 그들의 발치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싸움을 시작해서 남학이 처참하게 망가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 잠깐 사이에 천지가 개벽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공동파의 무인들이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남학을 부축했다.
“감히! 사형을 해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공동파의 무인들이 담호를 노려보며 적의를 불태웠다.
담호는 그들을 보면서도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어차피 공동파의 무인들이 이대로 가만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화산파에 몸을 담아 봤기에 구대문파의 오만함에 가까울 정도의 자부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담호였다.
그들은 자신의 아성을 위협하는 그 무엇도 용서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같은 구대문파의 일원일지라도.
구대문파 간의 힘이 비슷하기에 지금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지, 만일 어느 한쪽의 힘이 일방적으로 강했다면 강호의 평화는 절대로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끝이 어떻게 될지는 담호도 알 수 없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담호는 끝까지 가 볼 생각이었다. 설령 그 끝이 자신의 죽음뿐일지라도.
담호의 눈에 처음으로 감정의 빛이 어렸다.
그것은 광기(狂氣)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크윽!”
담호의 광기와 살기에 맞닿은 공동파 무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때였다.
“모두 멈춰라.”
한 줄기 미약한 음성이 공동파 무인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음성의 주인은 바로 남학이었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공동파 무인들이 서둘러 남학을 안아 들었다.
남학이 그들의 품에 안겨 기침을 했다. 그러자 피가 섞여 나왔다.
“사형?”
“난…… 괜찮다.”
남학이 애써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순간 만뢰심공이 내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심맥이 터져 즉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겨우 살아남았고, 아득해지는 정신의 끈을 애써 붙잡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동파 무인들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애써 몸을 일으킨 남학이 담호를 노려봤다.
“나의 패……배다. 약속대로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자네의 행사를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
“내가 비록 승부욕에 불타긴 하지만 비겁자는 아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부디 나를 비겁자로 만들지 말거라.”
마지막 말은 공동파의 무인들에게 한 말이었다.
대사형의 말에 공동파의 무인들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형!”
남학의 시선이 다시 담호로 향했다.
담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남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검은 일색인 담호의 모습은 마신을 연상케 했다.
“나는 패했지만 공동파가 패한 것은 아니다. 만뢰를 완성하는 날, 다시 그대에게 도전하겠다. 내 도전을 받아 주겠는가?”
“언제든지!”
담호는 남학이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비록 오만하고, 편견에 시선이 치우쳐 있을지언정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남자였다.
그것이 담호가 남학을 살려 준 이유였다.
남학이 담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고맙다.”
“…….”
“이젠 이름을 물어도 되지 않겠나? 자네의 이름은?”
“담호! 내 이름은 담호다.”
“자네의 이름 뼛속 깊이 각인시켜 두겠다. 담호.”
담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학이 살짝 미소를 짓다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혼절한 것이다.
“사형!”
공동파의 무인들이 서둘러 남학의 몸을 부축했다.
담호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순간적이긴 하지만 살짝 다리를 절었다.
그 순간 무인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다리를 저는 무인, 서천산장을 궤멸시킨 그자도 그랬는데…… 설마 신강혈성?”
“맙소사! 신강혈성이라니. 새외의 전설이 정말 사실이었단 말인가?”
사람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신강의 핏빛 별이 중원에 내려왔다. 핏빛 별은 중원까지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담호가 뒤돌아섰다. 하지만 누구 한 명 그를 붙잡지 못했다. 담호 단 일 인의 기세에 모두가 압도당한 것이다.
이신풍의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담호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자가…….’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공동파의 남학까지도 같이 체면이 구겨졌다는 것이다.
“형!”
담호의 곁으로 방진보가 따라왔다.
군웅들은 망연히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중원 역사상 이렇게 극적으로 등장한 무인이 또 있었을까? 단연코 없었다.
어느 날 감숙성에 홀연히 나타나 피의 비를 뿌린 담호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
흔히들 장강을 중원의 젖줄이라고 불렀다. 청해에서 발원한 이 거대한 강은 중원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생명과 문물을 잉태하게 했다.
일개 강이라고 보기엔 턱없이 넓고 깊은 수심 덕분에 장강에는 큰 배들이 제법 운행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족히 수백 명을 태울 수 있는 커다란 배도 존재했다. 일명 ‘운마도강선’이라 불리는 배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말과 사람을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배가 장강의 거친 물결을 유유히 헤쳐 나가고 있었다.
운마도강선의 갑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장강의 상하류를 오가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무공을 익힌 것으로 보이는 무인들도 보였다.
운마도강선은 호북성 초입의 선착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선착장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운마도강선이 선착장에 정박하자 커다란 발판이 내려졌다.
“내리는 사람부터 먼저입니다. 모두 순서를 지키십시오.”
중년의 선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많은 이들이 선부의 지휘에 따라 선착장에 내렸다. 먼저 사람들이 내리고, 그다음이 말과 수레였다.
한꺼번에 수십 명의 사람과 말이 빠졌지만, 빈자리는 금세 가득 찼다. 선착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대거 운마도강선에 오른 것이다.
“거, 밀지 마시오.”
“이곳에 자리가 났네.”
갑판 위는 금세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사람들은 친분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두 명에서 수십 명까지 그 인원도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선미 가까이에 있는 갑판 위였다. 그곳엔 통일된 복장의 사람들이 서른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제법 큰 깃발을 들고 있었다.
선도표국(仙桃鏢局).
호북성 선도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중소 표국 중 하나였다. 호북성에서는 제법 전도유망한 표국으로 휘하 표사들의 수만 거의 백여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었다.
선도표국의 백여 명에 이르는 표사들 중 절반인 오십여 명이 동원될 만큼 중요한 표물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은 호북성이었다.
구대문파 중 하나인 무당파가 굳건히 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했고,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터전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정도를 표방하는 수많은 문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표물을 노리는 도적 따윈 존재할 수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력이라면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금종경은 이번 표행을 책임진 선도표국의 대표두였다. 그는 오 척의 단신에 불과했지만, 대신 어깨가 떡 벌어지고 눈빛도 부리부리했다. 때문에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강렬한 인상에 위축되곤 했다.
단지 외모뿐 아니라 금종경은 무공도 강했다. 명목상 국주 아래인 대표두였지만, 그의 무공은 국주인 등일청을 능가했다.
국주인 등일청이 노쇠한 지금은 금종경이 실질적으로 선도표국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표사들의 신망 또한 두터웠다.
금종경이 휘하 표사들에게 말했다.
“운마도강선에 탔다고 안심하지 말거라.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표두. 이렇게 저희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표사들의 말에 금종경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경계는 저희에게 맡기고 대표두께서도 잠시 편히 쉬십시오.”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금종경은 주위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십 년이나 몸에 배인 습관이 어디 갈 리 없었다.
표사들도 금종경의 편집증에 가까운 성격을 아는지라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끼리 대화에 열을 올렸다.
“이제 닷새만 더 가면 동정호인가? 시간이 정말 빠르군.”
“그러게 말일세. 그래도 운마도강선을 타니 편하고 좋구만. 매일 이런 표행만 했으면 여한이 없겠네.”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걸 누가 모르나? 그냥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뭐, 꿈이야 마음대로 꿀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긴.”
표사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저 멀리 사천성까지 갔다 오는 길이었다. 사천성의 명문인 당문(唐門)이 그 목적지였다.
당문에 표물을 전해 주는 것으로 임무는 끝이 날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당문은 호남성까지 표물을 운송해 줄 것을 제의했다.
금종경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표물의 운송지인 호남성 악양(岳陽)은 선도표국의 근거지인 선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자네 감숙성에서 도는 소문을 들었나?”
“무슨 소문 말인가?”
“이 사람 영 깜깜이군. 그렇게 엄청난 소문도 듣지 못했다니.”
“무슨 소문 말인가?”
말을 꺼낸 이는 선도표국에서도 정보통이라고 소문난 장삼이었다. 그는 평소 표행 중에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 했는데, 덕분에 각종 소문에 밝았다.
모두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장삼을 바라봤다. 장삼은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 마음에 드는지 자못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감숙성에 큰 혈사가 있었다네.”
“그게 무슨 말인가? 혈사라니.”
“모두 홍암산장은 다 알지? 감숙성 북부에서는 그래도 가장 큰 문파가 아니던가?”
“물론일세.”
“얼마 전 홍암산장주인 이신풍 대협의 환갑연이 있었는데, 한 사람 때문에 초토화가 되었다고 하는군.”
“설마?”
“진짜일세. 그 때문에 지금 감숙성은 난리가 아니라네. 맨 처음 그를 건드린 것은 현현문의 대제자인 좌상천 소협이었는데, 반신불수가 되었다네. 어디 그뿐인가? 감숙성의 이름난 상단인 대화상단의 장학경 소협, 운양무관의 관주인 조경의 대협과 모중현 소협이 그에게 목숨을 잃었다네.”
“그게 정말인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자 장삼은 신이 나서 감숙성에 떠도는 소문을 떠들어 댔다.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한 표정을 짓자 장삼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들겼다.
“정말이지 않고. 그자는 중원에 들어오기 전 신강에서 서천산장을 혼자서 멸문시켰다고 하네. 그 때문에 그에게 신강혈성이라는 별호가 붙었을 정도라네.”
“허! 믿기 힘들군.”
“그가 얼마나 강한지 공동파의 대제자이자 구무룡의 일원인 남학 소협마저 무릎을 꿇었다고 하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이자,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군.”
“아니, 구무룡 중의 한 명인 남학 소협이 당했는데 공동파는 가만있다던가?”
“남학 소협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공동파의 개입이 없을 거라고 천명했다는군. 그래서 공동파도 쉽게 어쩌지 못하고 속만 끓이는 모양이야.”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중원에 거물이 등장한 셈이군.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사람들이 추켜올리자 장삼이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
“그런데 그 신강혈성이 사실은 절름발이라는 소문이 있어.”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소리네. 그 정도의 무인이 절름발이라니.”
“아, 진짜라니까. 내가…….”
금종경은 장삼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갑판을 훑어보았다. 그라고 신강혈성에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표물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
“응?”
문득 그의 눈에 묘한 조합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검은 장포를 입은 표정 없는 남자와 무엇이 그리 좋은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미소를 짓고 있는 뚱뚱한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