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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장. 홀로 걷기에 강하다(3)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는 담호였다. 그의 곁에는 방진보가 입을 벌린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장강이 바다만큼 넓다더니 정말이었네요. 전 이렇게 넓은 강은 처음 봐요.”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을 보는 것은 그 역시 처음이었다. 방진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는 충분히 감탄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 사이를 지나올 때면 물살이 급격히 세졌고, 이렇듯 사방이 탁 트인 곳으로 나오면 물은 서서히 흘렀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의 모습은 담호에게도 큰 감흥을 안겨 주었다.
‘좁으면 빨리 흐르고, 넓으면 느리게 흐른다. 어쩌면 인생의 흐름 역시 그럴지도.’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답지 않게 감상적이 되었다.
담호의 눈빛이 본래의 무감각함을 되찾았다.
홍암산장을 떠난 후 담호와 방진보는 무작정 남하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고, 결국은 장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노숙을 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담호가 잠시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수많은 이들의 피를 묻혔다. 그야말로 손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는 것 같았다.
무서운 것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소 진인은 항상 심마(心魔)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다.
마(魔)는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찾아오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조금씩 좀먹으니 항상 경계하라고 했다.
담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신은 단순히 심마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마(魔) 그 자체가 된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혼심공은 그의 몸 안을 휘돌며 내력을 불려 가고 있었다. 중천심결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원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다.
암혼심공은 믿을 수 없이 어두웠고, 음습했다. 마치 담호처럼.
그렇게 담호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방진보는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우와!”
생전 처음 보는 장관에 방진보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도도히 흐르는 장강과 주변의 풍경은 어린 방진보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호호!”
갑자기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진보가 고개를 돌리자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열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인형처럼 아름다우면서도 귀여웠다. 특히 크면서도 검은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두 눈은 마치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방진보는 한 번도 이렇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본 적이 없었다.
소녀는 무척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변에는 호위무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이나 신분이 높은 듯했다.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방진보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가 방진보에게 말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거니?”
“어, 어? 난 그냥…….”
“장강은 처음이니?”
방진보는 얼굴이 새빨개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장강은 처음이냐고 물어보잖아.”
방진보는 소녀의 음성이 꼭 종달새 같다고 생각했다. 주위의 다른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소녀의 음성만이 들렸다.
방진보는 멍하니 소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이 웃겼는지 소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넌 정말 재밌는 아이구나. 넌 이름이 뭐니?”
“나, 난 방진보야.”
“난 은소청이야. 만나서 반가워.”
스스로를 은소청이라고 밝힌 소녀는 무척이나 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듯싶었다.
호위무사 중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치 얼음장을 깎아놓은 것처럼 차가워 보이면서도 잘생긴 미남이었다.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괜찮아! 배 위잖아. 무슨 일이야 있겠어?”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겁니다.”
“은검이 지켜 줄 거잖아.”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
은소청이 활짝 웃었다.
은검귀수(銀劍鬼手) 종리수.
은소청의 가문에서 그녀를 위해 키운 호위무사였다. 은소청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같이 있었기에 각별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
은소청은 종리수를 은검이라 부르며 따랐다.
종리수가 방진보를 바라봤다. 경고의 의미가 듬뿍 담긴 눈빛으로.
방진보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눈에 봐도 자신과는 신분 자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진보는 어디 가는 거야?”
“도, 동정호.”
“동정호는 왜?”
“그곳에 있는 천하제일루를 가려고.”
“정말?”
은소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선 생기가 돌고 있었다.
“나도 천하제일루에 가는데.”
“정말?”
“응! 천하제일루에서 누굴 좀 만나기로 했거든.”
“아가씨!”
“응? 아, 비밀이지.”
은소청이 혀를 내밀었다.
종리수가 못 말리겠다는 눈빛으로 은소청을 바라봤다. 하지만 해맑은 미소를 보이고 있는 은소청을 보자니 더 이상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종리수가 고개를 흔들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방진보가 은소청에게 해가 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방진보는 누가 봐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뚱뚱한 체형의 소유자였다. 저런 몸으로는 은소청에게 해를 끼칠 수가 없었다. 은소청 또한 만만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은소청의 시선이 방진보의 뒤쪽에 있는 봇짐을 향했다. 봇짐 사이로 과자의 손잡이가 삐죽 빠져나와 있었다.
“이건 뭐야?”
“아, 이건 요리 만들 때 쓰는 냄비야.”
“진짜? 그럼 너 숙수야?”
“응!”
방진보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에 은소청이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와! 대단하다. 언제부터 요리를 배운 거야? 잘하는 음식은 뭐고?”
“그게…….”
은소청의 질문 세례에 방진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방진보는 담호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담호는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방진보의 눈길을 따라 은소청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담호를 향했다. 그제야 그녀는 이 석상 같은 아저씨가 방진보와 같은 일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전 은소청이라고 해요.”
은소청은 특유의 구김살 없는 성격으로 살갑게 인사를 했다.
담호가 은소청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은소청이 배시시 웃었다. 악의 없는 순수한 미소에 담호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담호다.”
무척이나 탁하고 거친 음성이었지만, 은소청은 담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울림이 크다고 생각했다.
“반가워요, 아저씨!”
“음!”
“그런데 진보와 성이 다르시네요. 친형제는 아닌가 봐요?”
은소청은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담호는 그런 은소청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똑똑한 아이구나.”
순간 은소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담호는 더 이상 은소청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갑판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간 은소청의 눈에 살짝 이채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가 웃으며 방진보를 바라봤다.
“과자 좀 보여줄래?”
“뭐?”
“보고 싶어. 난 한 번도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거든.”
“그게…….”
“보여 줘!”
은소청이 계속해서 조르자 방진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봇짐을 풀었다.
과자와 주도, 국자 같은 주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은소청이 신기한 듯이 바라봤다.
‘아가씨.’
종리수가 그런 은소청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에는 연민의 빛이 가득했다.
지체 높은 신분 때문에 또래의 다른 이들이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누리지 못한 은소청이었다. 그 때문에 평범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이 정도의 자유를 누리는 것쯤은 상관없겠지.’
은소청은 별거 아닌 주구에 환호성을 지르며 방진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종리수의 관심은 온통 은소청에게 쏠려 있었다.
담호가 향한 곳은 갑판 바로 아래층이었다. 이곳엔 승객들이 타고 온 말과 수레 등이 실려 있었다.
일 층에 내려오자 말똥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담호는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푸르르!
담호가 다가오자 흑귀가 투레질을 했다. 담호는 흑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흑귀가 꼬리를 흔들며 담호의 손길을 느꼈다.
담호가 흑귀의 귀에 속삭였다.
“답답해도 조금만 참거라. 뭍에 오르면 마음껏 달리게 해 줄 테니까.”
“그 말이 형장의 말이었소?”
그때 누군가 담호에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자 추레한 차림의 선부가 보였다. 그는 말똥을 치우고 있었는지 커다란 삽을 들고 있었다.
담호가 바라보자 선부가 씨익 웃었다.
“너무 좋은 말이라서 그렇소. 내 몇 년째 운마도강선에서 일하지만, 형장의 말처럼 좋은 말은 처음 봤소.”
“…….”
“조심하시오. 너무 좋은 말은 주위에서도 많이 욕심내는 법이니까.”
충고인지 협박인지 모를 모호한 말이었다.
선부를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이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무척이나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담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선부는 오싹하는 느낌에 전신을 떨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락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선부는 담호가 무림인들이 흔히 말하는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나는 그냥 충고나 하려고…… 크윽!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결국 선부는 담호에게 사과를 하고 말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무인을 함부로 자극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뭍에 도착할 때까지 잘 돌봐 줘. 여물도 좋은 것으로 먹이고.”
“무,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신명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한 가지 묻지. 동정호에서 하오문을 찾으려면 어떡해야지?”
“그걸 왜 저에게?”
담호가 갑자기 선부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선부가 잽싸게 손을 뻗어 담호가 던진 물체를 받았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은화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선부가 얼굴을 활짝 폈다.
돈이라면 귀신도 움직일 수 있다. 반짝이는 은화라면 선부는 목숨을 걸 용의가 있었다.
“한번 기루를 뒤져 보십시오.”
“기루?”
“예! 듣기로는 기녀들 중 일부가 하오문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
선부가 담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났다.
혼자 남은 담호가 밖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