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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8장. 장강의 물결처럼 만나고, 헤어진다(2)
비가 그친 것은 형주에 배가 정박한 지 사흘이 되는 날이었다. 비가 그쳤다고 하지만 당장 배를 띄우는 것은 무리였다.
사흘이나 내린 비로 인해 장강의 물이 불어나 있었다. 황토 빛 물은 마치 노도처럼 격하게 흐르고 있었고, 쉽게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배는 이틀을 더 형주에 머문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닷새나 지체하게 되었기에 운마도강선은 속도를 높였다.
“휴우!”
멍하니 장강을 바라보던 방진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 방진보는 늘 그랬다. 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경우가 많아졌고, 자주 넋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를 말없이 지켜봤다.
비록 세상사에 무관심한 담호였지만, 방진보가 첫 사랑앓이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섣부른 위로보다는 그냥 지켜보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뱃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장의 목소리가 배위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면 급류가 나타난다. 짐이 확실히 고정되었는지 확실히 확인해.”
“예!”
선장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잠시 후 지나갈 곳은 장강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급류가 있는 곳이었다. 해마다 이곳에서 침몰하는 배만 십여 척이 넘었다.
더군다나 지난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물이 크게 불어 격류가 더욱 심해졌다.
긴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곳만 무사히 넘어가면 다음부터는 평탄한 물길만 나온다.
긴장을 한 것은 비단 뱃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선도표국의 대표두인 금종경 역시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표물이 단단히 고정이 되었는지 모두 확인해. 표물을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표국이 엄청난 손실을 입는다.”
“알겠습니다.”
덩달아 표사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금종경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닷새나 장강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동정호 초입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리고 표물을 주인에게 전해 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초조하지도 않았을 텐데.”
금종경이 이를 깨물었다.
천하의 당문에서 보낸 표물이었다. 하나라도 잃어버렸다가는 단순히 변상을 하는 선에서 문제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문은 은(恩)과 원(怨)을 분명히 하는 가문이었다.
은혜도 잊지 않았지만, 원한은 더욱 잊지 않았다. 그러니 손실을 입힌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표물을 괜히 맡았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금종경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한 걱정이야. 이미 호북성에 들어왔는데 무슨 문제가 생길까?”
금종경이 갑판을 둘러봤다.
갑판 한쪽에 서 있는 담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겁도 없는지 팔짱을 낀 채 장강의 급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유독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급류에 들어간 배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담호의 자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고수.’
그런 담호의 모습을 보며 금종경은 확신했다.
이런 급류에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이는 무공을 익힌 고수들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급류에 들어가면서 선부들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그쪽 돛을 확실히 고정해.”
“노잡이들은 왼쪽으로 노를 저어.”
선부들은 진땀을 흘리며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굵은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와 있었고, 근육은 터질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요동쳤고, 그때마다 선부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특히 선장이 느끼는 긴장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투둑!
결국 표물을 고정시킨 굵은 밧줄 하나가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갑판 위에 올려두었던 상자 하나가 그만 쏟아지고 말았다.
“젠장!”
표사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와 상자에서 쏟아진 물건을 허겁지겁 담았다.
“조심해라. 하나라도 잃어버렸다가는 큰일 나니까.”
“예!”
담호는 표사들이 물건을 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표사들이 허겁지겁 담는 물체는 은색의 원통이었다. 길이가 어린아이 팔뚝만 했는데, 평평한 끝 쪽에 조그만 구멍이 십여 개가 뚫려 있었다.
금종경이 표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거기 줄을 다시 묶어. 흔들리지 않게.”
“알겠습니다.”
“하나도 빠진 것은 없겠지?”
“네! 모두 확실히 챙겼습니다.”
표사들의 대답을 들었지만 금종경의 표정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표물이 암기였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독과 암기의 명가인 당문에서 보낼 표물이 암기 외엔 딱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로 짐작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금종경이 슬쩍 담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담호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덜컥!
그 순간 배가 크게 요동을 쳤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허공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처박힐 정도의 큰 충격이 배를 강타했다.
급류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듯 배는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다.
“휴!”
그제야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선장과 선원들도 맥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렇게 험한 격류를 헤쳐 나왔지만 담호의 모습엔 변함이 없었다. 머리 하나 헝클어지지 않았고, 자세 또한 변함이 없었다.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방진보가 그의 다리를 부여잡고 있다는 것뿐이다. 담호의 다리를 붙잡지 않았다면 방진보는 다른 승객들처럼 꼴사납게 갑판을 굴러다녀야 했을 것이다.
“괜찮느냐?”
담호가 방진보를 일으켜 세웠다.
“괘,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진보는 낭패를 면치 못한 모습이었다. 옷과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물에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주구가 담긴 봇짐만큼은 악착같이 지켰다.
요리에 대한 방진보의 열정은 격류로도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기운 빠진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고비를 넘겼으니 앞길은 평탄할 겁니다. 그러니 모두 조금만 쉽시다.”
“하아!”
선장의 선언에 사람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장의 말처럼 한 고비를 넘긴 운마도강선은 순탄하게 강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동정호를 코앞에 두었다.
“우와아!”
방진보가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호수를 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의 눈에 비친 동정호는 단순한 호수가 아닌 바다처럼 보였다.
아득하게 보이는 수평선, 그리고 수면 위에 떠있는 거대한 유람선과 조그만 어선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과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거대한 구름들.
그 모든 광경들이 방진보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 주었다. 방진보는 어깨를 떨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담호도 동정호와 같은 거대한 호수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득 사부도 이 광경을 보았으면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마도강선은 물살을 가르며 전진했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기 때문인지 선부들의 움직임엔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것은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성급한 승객들은 벌써부터 짐을 챙기면서 배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도표국의 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금종경의 지휘 아래 표물을 운송할 준비를 마치고 배가 정박하기만을 기다렸다.
운마도강선의 최종 목적지는 동정호 북동쪽 초입에 있는 악양부였다.
악양부는 장강과 동정호의 합류지점에 있는 도시로 예로부터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였다. 수로와 육로가 잘 발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었다.
운마도강선은 악양 외곽에 있는 선착장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꽤 큰 선착장에는 많은 배들이 정박을 하고 있었다.
쿵!
운마도강선이 선착장에 정박했다.
마침내 발판이 내려지자 대기하고 있던 승객들이 줄을 지어 내려왔다.
“드디어 뭍이다.”
“이제 좀 살겠군.”
선착장에 내려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담호와 방진보도 사람들을 따라 배에서 내렸다. 배에서 내림으로써 가장 좋아한 것은 바로 두 사람이 타고 온 말들이었다.
흑귀가 기분이 좋은지 연신 투레질을 하며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방진보의 백마도 마찬가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금종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서둘러라. 표물을 빨리 전달해야 한다.”
“예!”
선도표국의 표사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움직였다.
표물을 실은 선도표국의 수레들이 먼저 선착장을 떠나고 그 뒤를 다른 상인들이 따랐다. 그렇게 사람들이 순식간에 선착장을 빠져나갔다.
담호와 방진보도 선착장을 떠나 악양으로 들어갔다.
악양은 지금까지 담호와 방진보가 들렀던 여타 도시와 비할 수 없이 발달해 있었다. 높다란 처마가 맞닿은 전각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거리는 바둑판을 확대해 놓은 것처럼 깔끔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질 좋은 비단 옷을 입고 있었고, 왠지 모를 품격이 느껴졌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어린 방진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방진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형, 우리 객잔부터 잡아요.”
“음!”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진보가 신이 나서 앞장섰다.
이곳에 오는 동안 그러했듯 객잔을 잡는 것은 방진보의 몫이었다. 방진보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어느 객잔의 음식이 가장 맛있는지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곳이 바로 서풍객잔(西風客棧)이었다.
서풍객잔은 악양의 수많은 객잔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특히 서풍객잔에서 바라보는 동정호의 풍경이 일품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점소이가 재빠르게 달려왔다.
“어서 옵셔.”
“형, 방 있어요?”
“물론이지. 마침 동정호가 잘 보이는 쪽에 객실이 남아 있어. 그곳에서 해가 지는 광경을 보면 정말 황홀하지.”
“잘됐네요.”
방진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점소이가 흑귀와 백마를 마구간에 집어넣은 후 두 사람에게 방을 안내했다.
점소이의 호언장담처럼 방에서 바라본 동정호의 풍경은 일품이었다.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점소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끝내주지?”
“최고예요.”
방진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식사 시간에 맞춰서 객잔 이 층으로 나오면 돼. 아! 삼 층에는 절대 올라가지 말고.”
“왜요?”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거든.”
“행사라면?”
“악양검문에서 삼 층을 통째로 전세 냈거든.”
“삼 층 전체를요?”
“그래! 악양검문은 악양 최고의 문파야. 그런 엄청난 문파가 이곳에서 행사를 하는 거야. 정말 대단한 일이지.”
점소이의 표정은 들떠 있었다.
악양검문은 단순히 악양 최고의 문파가 아니었다. 호남성 전체를 통틀어 봐도 그들을 견제할 만한 문파의 수는 다섯 개가 채 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호남성의 오대문파 안에 악양검문이 들어간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점소이도 언젠가는 악양검문에 입문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악양검문의 무인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그럼 푹 쉬다가 이따 내려오세요.”
점소이가 담호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단둘만 남게 되자 방진보가 푹신한 침상에 몸을 던졌다.
“아, 좋다. 이대로 자고 싶다.”
“조금 자고 있거라.”
“형은요?”
“갔다 올 곳이 있다.”
“어디요?”
“갔다 와서 말하마. 그동안 쉬고 있거라.”
“예!”
의문이 들었지만 방진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신에게 말해 줄 만한 내용이었으면 벌써 말해 줬을 것이다. 방진보는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다.
방진보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담호는 그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