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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74화 (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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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8장. 장강의 물결처럼 만나고, 헤어진다(3)

악양은 바둑판처럼 구획이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악양에 처음 오는 사람이라도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담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악양 사람들이 동명로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쭉 뻗은 동명로를 따라 기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아직 대낮이었지만 기루의 창문에는 곱게 꾸민 기녀들이 얼굴을 내민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거기 아저씨들 이리 들어와요. 잘해 줄 테니까. 호호!”

“이쪽으로 와요. 이 진홍이가 뼈까지 녹여 줄 테니까.”

기녀들은 서슴없이 음담패설을 했다.

몇몇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기녀들의 유혹에 넘어가 기루에 들어갔다.

기녀들은 담호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하지만 담호는 묵묵부답 거리를 걸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기녀들의 본격적인 호객 행위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요. 이곳에서는 우리 정향루가 최고예요.”

“무슨 소리야? 홍화루가 제일이지.”

기녀들이 달려들어 담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담호는 그녀들의 손을 뿌리치고 걸었다. 그러자 기녀들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이런 고자 같은 인간.”

“우리가 뭐가 어때서?”

뒤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기녀들이 씩씩거렸지만 담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그를 붙잡는 기녀들의 수도 많아졌다. 그녀들이 교태 어린 미소를 지었지만, 담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녀들이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졌지만, 단 한 명은 달랐다. 이제 겨우 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기녀였다.

동그란 눈에 싱글거리는 미소가 일품인 기녀가 담호의 팔목을 붙잡았다.

“눈이 아주 높으신 분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저희 천상루는 어때요? 이곳 악양에서 저희 천상루를 따라올 기루는 없어요.”

그녀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당찬 말투의 소유자였다. 순간 담호의 눈에 이채가 살짝 떠올랐다 사라졌지만 기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천상루로 가겠다.”

“정말요?”

어린 기녀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제까지 다른 기녀들의 유혹을 모두 뿌리친 담호가 설마 그렇게 흔쾌히 천상루에 들어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기녀가 활짝 웃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기녀가 앞장서 담호를 천상루로 이끌었다.

그녀의 장담처럼 천상루는 무척이나 화려했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녀들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스르륵!

기녀가 방문을 열자 매우 화려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가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붉은색 홍등이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천상루 최고의 기녀들이 모시러 올 거예요. 혹시 따로 원하시는 기녀가 있나요?”

말을 하면서도 기녀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같이 거리에 나가서 호객 행위를 했다. 최소한 천상루에 단 한 번이라도 온 사람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천상루에 온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는 기녀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돌아온 담호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너는 어떻느냐?”

“네?”

“나는 너를 원한다.”

“저…… 말인가요?”

기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얼굴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담호가 자신을 요구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저, 저는…….”

“왜 안 되느냐?”

담호가 품에서 갑자기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물체는 바로 고양이 눈을 닮은 묘안석이었다.

“이거면 되겠느냐?”

어린 기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도 묘안석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알고 있었다.

만금을 주어도 구할 수 없는 귀물.

상대는 그런 귀물을 내놨다.

단순히 동기(童妓)라는 이유만으로는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 나는…….”

어린 기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담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녀와 담호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기녀는 전신이 오싹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는 담호의 눈동자. 그 안에는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기녀는 자신이 호객해 온 이 손님이 일반적인 손님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담호와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직은 어린 기녀가 감당하기에 담호의 눈빛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때였다.

“운정이가 무서운 손님을 모셔 왔구나.”

어린 기녀의 등 뒤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운정이라 불린 기녀가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화려한 궁장을 차려입은 여인이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여인은 면사로 눈만 드러낸 채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깊으면서도 고혹적이었다.

운정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루, 루주님.”

“운정인 나가 있거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예!”

운정이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여인이 담호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전신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느 곳에서 오신 분인가요?”

“그게 중요한가?”

“저에겐 중요해요. 무척!”

“나한텐 안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한가요?”

“여기가 하오문의 지부인 것이 중요하지.”

순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던 여인의 눈매가 경직됐다.

“어떻게 아셨죠?”

그녀의 목소리에 은은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담호의 대답 여하에 따라 처분을 결정하겠다는 의지가 내비쳤다.

“그게 중요한가?”

“하오문의 위치가 이렇게 쉽게 드러나는 것은 문제가 있거든요.”

“그 아이.”

“예?”

“운정이란 아이, 무공을 익혔더군. 다른 기녀들과 달리.”

담호의 팔을 붙잡는 손길에서 내공이 느껴졌다. 평범한 기녀가 익힐 수 있는 수준의 내공이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하오문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본 것뿐이다.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 보는 눈을 기르라고 내보낸 것이 실수였던 모양이군요. 맞아요. 이곳은 하오문의 악양 지부예요.”

담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은은한 감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곳이 하오문의 지부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단순히 기녀들 중 일부가 하오문과 연관이 되었단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여인의 시선이 담호의 앞에 놓인 묘안석으로 향했다. 한눈에 봐도 상등품의 묘안석이었다.

강호에서 저런 보물을 함부로 내보였다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상대는 그런 묘안석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고 다닐 정도로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혹은 무모하든가.

여인이 담호의 앞에 앉았다.

“제 이름은 기예화예요. 소협의 이름은요?”

“담호.”

“특이한 이름이군요. 한 번 들으면 쉽게 잊지 못하겠어요.”

기예화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담호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남자였다. 강렬한 외모와 분위기도 그랬지만, 특히 칠흑 같은 어둠이 담긴 눈동자가 그랬다.

흔히들 말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기예화 역시 그 말을 믿었다. 이제까지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고, 그들의 눈을 통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을 통해서는 어떠한 것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둘 중 하나겠구나.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았거나,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하거나.’

그 어느 쪽이든 기예화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부류의 인물인 것은 분명했다.

“담 소협은 저희 하오문에 어쩐 일이신가요?”

“사람을 찾고 싶다.”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듣고 오셨는지 모르지만…….”

“지금으로부터 십칠팔 년 전에 섬서성에서 활동하던 도적들. 인원은 서른일곱, 아니 하나가 죽었으니 서른여섯 명이군. 전원 말을 타고 있었어. 우두머리는 낭아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삼십 대 초반의 남자. 지금쯤이면 오십이 다 됐겠군. 그의 왼쪽 뺨에는 긴 흉터가 나있어.”

기예화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그걸 왜 우리에게…….”

“찾아 줘.”

“담 소협!”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아. 반드시 찾아 줘.”

순간 기예화는 마치 얼음물에 빠진 것 같은 오한을 느끼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이 이 남자의 부탁을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남자의 말이 결코 부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휴!”

기예화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호가 들어온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주도권을 내주고 끌려다니고 있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땅히 타개할 만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약하구나.’

기예화는 자신에게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알겠어요. 한번 찾아보죠. 하지만 저희 하오문이 움직이는 대가는 무척 비싸요.”

담호가 말없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묘안석을 기예화에게 밀었다. 그에 기예화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 정도면 어찌 될 것 같긴 하군요. 하지만 이번 한 번뿐이에요, 담 소협. 만일 다음에도 이와 같은 무례를 범한다면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명심하지.”

그 말을 끝으로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호가 기예화를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다리가 살짝 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예화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탁!

마침내 담호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기예화가 입을 열었다.

“설희야.”

“예! 아가씨.”

대답과 함께 방구석에 있던 고풍스러운 가구가 살짝 움직이며 비밀에 가려져 있던 통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통로에서 작은 체구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담한 체구만큼이나 여인은 무척 귀여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여인의 이름은 초설희, 기예화와 함께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 온 사이였다.

“설희가 보기엔 어때?”

“모르겠어요. 전혀 종잡을 수 없어요.”

“그 정도야?”

기예화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초설희는 무척 강한 무인이었다. 기예화가 아는 사람들 중 그녀보다 무공이 더 강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만일 전력을 다하면?”

“해 봐야 알죠. 하지만 녹록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 얼음장 같은 눈빛 봤어요? 살벌하기가 독사보다 더 해요.”

“그래!”

기예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담호가 걸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한쪽 발을 절룩이면서.

“이틀 전에 믿을 수 없는 정보가 들어왔어. 바로 절름발이 무인에 관한 이야기지.”

“무슨?”

“한 절름발이 무인이 홀로 신강성의 패자를 꿈꾸던 서천산장을 궤멸시키다시피 했다는 이야기야.”

“설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다시 두 번째 소문이 들려온 거야. 이번엔 감숙성 홍암산장에서. 천여 명이 넘는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동파의 대제자인 남학을 무참히 짓밟았다고 하더군.”

“나, 남학이라면 구무룡 중의 일원 아니에요? 정말 그를 이겼다구요?”

“나도 믿을 수 없었어. 그래서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남학은 강한 사람이에요. 그의 진실 된 무력은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해요. 그런 사람을 절름발이 무인이 이겼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그래서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와전된 이야기라고 치부하지. 나도 그랬고.”

이제 담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예화는 담호가 사라진 거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강에 내려온 피의 별.”

단순히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피비린내가 물씬 느껴졌다.

“지금부터 하오문 악양 지부는 전력을 투입해 저 남자의 의뢰를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할 거야. 그리고 설희는 저 남자의 모든 것을 알아내. 고향, 자란 곳, 사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조리 알아내.”

“알겠어요, 아가씨.”

기예화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해야 할 바람이 왠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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