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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8장. 장강의 물결처럼 만나고, 헤어진다(4)
담호가 서풍객잔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이 다 된 무렵이었다.
“형!”
방진보가 담호를 맞이했다.
잠을 푹 잔 듯 방진보의 얼굴엔 활력이 넘쳐 보였다.
“이제 식사하러 가셔야죠?”
“음!”
“헤헤! 어서 가요. 서풍객잔의 간과계(干鍋鷄)가 그렇게 끝내준대요.”
“간과계?”
“큰 솥에 각종 야채와 닭고기를 넣고 국물 없이 익혀 먹는 요리예요. 그 맛이 정말 끝내준대요. 아까 점소이 형에게 부탁해서 미리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지금 식당에 가면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방진보는 잔뜩 들뜬 표정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접할 때면 나타나는 방진보 특유의 표정이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잔뜩 풀이 죽어 있던 방진보였지만,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자 다시 생기가 살아났다.
“호남 요리를 맛보지 않고서는 요리를 말하지 말란 이야기가 있어요. 칼 사용이 섬세하고, 기름을 많이 쓰는 것이 특징이에요. 기름을 특히 많이 쓰고, 주로 삶고, 찌고, 볶는 방법으로 많이 조리해요.”
식당으로 가는 내내 방진보는 호남 요리에 대해 떠들었다. 담호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방진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객잔 이 층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들이 앉자마자 예의 점소이가 달려왔다.
“어서 오세요.”
“형! 간과계는요?”
“거의 다 됐을 거야. 조금만 앉아서 기다리면 금방 내올게.”
“네!”
점소이는 담호와 방진보가 앉은 탁자에 차가 든 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헤헤!”
방진보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말없이 방진보를 바라보던 담호가 물었다.
“그렇게 좋으냐?”
“네! 전 맛있는 음식 먹을 때가 두 번째로 행복해요.”
“첫 번째는?”
“남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줄 때요. 형은요? 형은 언제가 제일 행복해요?”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부인 현소 진인과 함께했던 순간이었다. 그것도 벌써 십이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감정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자신이 인간이 맞는지 스스로도 궁금할 정도였으니까.
담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지만,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다.
수많은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도 밤이 되면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분의 고하 따윈 상관없었다. 자신이 머물고, 마음을 둘 자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담호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마음을 둘 곳도 없었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방진보와 별개의 일이기도 했다.
담호가 차가 든 잔을 입에 가져갔다. 방진보는 그런 담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담호가 무섭게 비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담호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하지만 방진보는 담호가 두렵지 않았다. 그가 최소한의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드디어 간과계 나왔습니다.”
그때 점소이가 탁자 위에 커다란 그릇을 내려놓았다. 각종 야채와 잘 익은 닭이 들어있었다.
“닭고기를 야채와 함께 드시면 됩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너도 맛있게 먹어.”
점소이가 담호와 방진보에게 인사를 한 후 물러났다.
“맛있겠다. 헤헤! 형, 잠시만 기다리세요.”
방진보가 이내 그릇에 담긴 닭고기를 잘게 찢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커다란 닭 한마리가 먹기 좋은 크기로 해체되었다.
“형, 어서 드세요.”
방진보가 담호의 그릇에 닭고기와 잘 익은 야채를 담아 건네줬다.
담호가 먼저 젓가락을 들어 간과계를 맛봤다. 방진보가 그런 담호의 모습을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때요? 형.”
“맛있다.”
“그래요? 헤헤! 그럼 나도…….”
방진보가 웃으며 젓가락으로 닭고기를 집어먹었다. 잠시 동안 우물거리던 방진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어!”
그는 감격 어린 눈빛을 발산하며 허겁지겁 간과계를 먹었다. 순식간에 그의 앞에 닭 뼈가 수북이 쌓였다.
담호가 한 번 씹을 때 방진보는 서너 번을 씹었다. 당연히 먹는 양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쿵쿵!
일 층과 연결된 나무 계단에서 육중한 발자국 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십여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푸른 경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소매에는 붉은 수실로 검(劍)이라는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사내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악양검문의 무인들이다.”
“저들이 왜 왔지?”
악양에서 저렇게 ‘검’이라는 글자를 무복에 수놓는 문파는 오직 악양검문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악양검문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악양검문의 무인들은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이 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악양검문 무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말했다.
“나는 악양검문의 진양수라고 하오. 오늘 이곳 삼 층에서 본문의 소문주이신 사마공천 소협의 중요한 행사가 있소.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분들은 식사가 끝나면 조용히 나가 주길 바라겠소.”
그의 음성은 매우 정중했지만, 협박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악양검문 무인들의 위세에 짓눌린 탓이다.
진양수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곳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손에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목갑이 걸려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장인의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양수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하고 너는 일 층을 지키고, 너희 세 사람은 이곳 계단을 지켜라. 나머지는 나와 함께 삼 층으로 올라간다.”
“예!”
악양검문의 무인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그의 명령을 따랐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창밖을 바라보니 객잔 주위에도 악양검문의 무인들이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누가 오기에?”
“중요한 사람이라도 오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호남성 수많은 문파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평가를 받는 악양검문이었다. 악양에서 악양검문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연 이 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 또한 악양검문 무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방진보가 담호에게 속삭였다.
“대단한 사람이 방문하나 봐요.”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악양검문 무인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지만, 담호에겐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악양검문의 무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그에겐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방문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 중요했다.
방진보도 그런 담호의 모습에 악양검문 무인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식사에 열중했다.
“정말 맛있어요. 특히 닭고기에 밴 양념 맛이 일품이에요. 신맛, 매운맛, 얼큰한 맛이 정말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요.”
방진보는 손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남김없이 쪽쪽 빨아먹었다. 그리고도 아쉬움이 남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담호와 방진보가 식사를 모두 마쳤을 때였다.
“어이 거기, 식사 모두 끝났으면 어서 나가지.”
이 층을 지키고 있던 악양검문의 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덩치가 크고 인상도 험상궂어 이층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무인이었다.
그가 방진보와 담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 우리는…….”
방진보가 말을 더듬거렸다. 악양검문의 무인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곁에 있는 담호 때문이었다.
방진보가 우물쭈물 할 때였다.
“소문주가 도착하셨다.”
갑자기 밑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험상궂은 얼굴의 무인이 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방진보와 담호는 더 이상 그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잠시 후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주님!”
무인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계단을 올라왔다. 이목구비가 반듯한 것이 미남 소리를 꽤나 들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젊은 남자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비단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허리에 찬 검집 역시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바로 악양검문의 소문주인 사마공천이었다.
사마공천은 사뭇 오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이 층에 올라왔다. 그러자 악양검문의 무인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해 소저는?”
“아직 도착 전입니다.”
“물건은?”
“다행히 늦지 않게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진 대주님이 갖고 계십니다.”
“그래? 다행이군.”
사마공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 외의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는 오만함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쯧! 천하제일루를 놔두고 서풍객잔에서 그녀를 맞이해야 한다니.”
“죄송합니다. 천하제일루는 이미 한 달 후까지 모두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놈의 천하제일루. 언제까지 그렇게 오만하게 장사할 건지 두고 보지.”
가히 바다만큼이나 크다는 이야기를 듣는 동정호였다. 악양이 크다 하지만, 동정호에 비하면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 정도에 불과했다.
천하제일루는 동정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원강(沅江)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원강은 악양에서 배를 타고 가야만 닿을 수 있는 동정호 반대편이었다.
그 때문에 천하제일루는 악양검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원강에는 호남 오대문파 중의 하나인 의선문(醫善門)이 있었다.
의선문이 천하제일루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다. 의술로 선을 베푼다는 의선문은 악양검문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의술로 많은 이들을 구했기에 호남성에서는 악양검문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의선문이 천하제일루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천하제일루의 꼬장꼬장함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오 층을 통째로 빌리겠다는 사마공천의 제안을 이미 예약이 꽉 차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때문에 사마공천은 급히 천하제일루 대신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그곳이 바로 서풍객잔이었다.
비록 천하제일루만 못하더라도 서풍객잔의 음식 역시 꽤나 맛있기로 유명했다. 아쉽지만 당장은 서풍객잔의 삼 층을 통째로 빌린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마공천이 그렇게 혀를 찰 때였다.
“해, 해 소저가 도착하셨습니다.”
밑에서 수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왔는가?”
사마공천의 얼굴에 한 줄기 기대감이 떠올랐다.
저벅! 저벅!
그 순간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층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계단에 집중됐다. 악양검문의 소문주가 직접 맞이해야 할 정도의 거물이 누군지 궁금한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된 가운데 마침내 발소리의 주인이 이 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모두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곱게 틀어 올린 삼단 같은 머리 아래로 희고 고운 목덜미가 보였다.
눈썹은 반월형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 아래 위치한 눈썹엔 은은한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고운 선을 그리며 오뚝 솟은 콧날과 그 아래 자리 잡은 조그만 붉은 입술.
누가 봐도 감탄사를 터트릴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주로 평민 여인들이 입는 자주색 광목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수수한 모습마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인의 손에는 수수한 검이 들려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사용한 것인지 모르지만 검집이 손때로 반질거리고 있었다.
사마공천이 급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엔 언제 짜증을 부렸냐 싶게 미소가 가득했다.
“어서 오십시오, 해 소저. 나는 악양검문의 사마공천입니다. 해 소저가 악양에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비굴하기까지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이름은 해소월. 해중화(海中花)라고 불리는 여인이었다.
명문 해남파가 배출한 여협으로 검의 극의를 깨닫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는 수행자였다. 한 송이 꽃처럼 도도하면서도 아름답지만 검의 성취만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구무룡의 일원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당당히 다른 용들과 대등한 자리에 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해남파라는 막강한 배경을 제외하고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 낸 것이었다. 당연히 사마공천과 비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위세가 등등했던 사마공천이었지만 막상 해소월과 마주하게 되자 꼬리 만 개처럼 기가 죽었다.
그런 사마공천의 모습에 해소월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중원엔 인재가 없구나.’
그녀의 목소리가 입안에서만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