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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1장. 만날 사람은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1)
해남도(海南島)는 중원 최남단에 위치한 거대한 섬이었다. 섬이 얼마나 큰지 그 안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고, 독자적인 문화와 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해남파는 그런 해남도의 정점에서 군림하고 있는 거대 문파였다. 비록 중원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구대문파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해남파의 무력은 결코 그들 못지않았다.
평소 해남도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 해남파였다. 하지만 간혹 한두 명의 무인을 내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중원에 풍운이 일어나곤 했다.
해소월은 해남파가 당대에 내보낸 유일한 무인이었다. 그만큼 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처음 그녀가 세상에 나왔을 때 몇몇 무인들이 접근해 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에 혹해 음심을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해소월은 계속해서 북상을 했고, 많은 무인들과 싸웠다. 그리고 전부 승리했다. 그 결과 그녀는 해중화(海中花)라는 별호를 얻었고, 구무룡에 속하게 되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구무룡에 속하는 가공할 무위, 그리고 해남파라는 거대한 배경까지 더해져 해소월은 중원의 젊은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최고의 신붓감으로 떠올랐다.
수많은 젊은 무인들이 그녀에게 구애를 했다. 하지만 누구도 해소월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해소월은 별호처럼 고고했다. 그리고 차가웠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나는 존재였다.
사마공천 역시 그런 해소월의 특별함에 반했다.
해소월이 악양에 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 굳이 초대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직접 본 해소월의 아름다움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수수한 옷차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어떤 비단옷을 입은 여인보다 그녀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
해소월이 서늘한 시선으로 사마공천을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마공천의 얼굴만 봐도 그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호남성 오대문파 중 하나인 악양검문의 소문주라기에 어느 정도 기대했지만, 상대의 수준은 그녀의 기대치를 한참이나 밑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기에 해소월은 포권을 취했다.
“반가워요, 사마 공자. 해남파의 해소월이에요.”
“반갑습니다. 해 소저. 듣던 대로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고마워요.”
“해 소저를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삼 층에 예약을 해 두었으니 올라가시지요.”
해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공천을 따라 삼층으로 올라가려던 해소월의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트린 채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담호였다.
그는 해소월의 등장엔 관심이 없다는 듯이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묵묵히 먹고 있었다. 단지 관심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사마공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해소월이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사마공천은 방금 전까지 그녀가 바라보던 곳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매가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어서 올라가시죠. 음식이 식겠습니다.”
사마공천이 해소월을 재촉했다.
해소월도 더 이상 담호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법이고, 그들 중엔 미모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담호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일 거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사마공천을 따라 올라간 삼 층은 텅 비어 있었다. 삼 층 전체를 예약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다른 탁자들은 모두 치워져 있었고, 중앙에만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하하! 어서 앉으시지요. 해 소저.”
해소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점소이들이 급히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해 소저가 어떤 것을 좋아할지 몰라 이곳에 있는 음식을 모두 시켰습니다.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드시면 되실 겁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하하! 해 소저를 대접하는 일이니 당연히 신경 써야지요. 어서 드십시오.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제맛입니다.”
사마공천이 먼저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서풍객잔의 음식은 제법 훌륭했다. 무엇보다 서풍객잔에서 바라본 동정호의 풍경이 멋졌다.
해가 지고 동정호에 떠 있는 배들이 하나둘 등불을 밝혔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전부 동정호로 내려온 듯했다.
환상적인 야경과 맛있는 식사. 그 어떤 여자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사마공천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해소월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동정호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등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유독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악양검문의 소문주로 이미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마공천이었다. 사마공천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그의 곁을 빛내 줄 꽃이었다.
해소월이야말로 그가 그렇게 원하던 꽃이었다.
사마공천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근처에 서 있던 진양수가 다가와 목갑을 건네줬다.
사마공천은 진양수에게 받은 목갑을 다시 해소월에게 건넸다.
“받으시지요. 해 소저.”
“이게 뭔가요?”
“조촐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성의?”
해소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마공천은 그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목갑을 열었다.
목갑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검이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검집, 붉은 보석이 박힌 화려한 손잡이. 그리고 황금빛 수실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아름다웠다.
사마공천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호남성 제일의 장인인 공야자가 만든 보검입니다. 해 소저가 이곳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리 주문했습니다. 공야자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것이니 해 소저의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이걸 왜 저에게 주는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제 성의입니다. 하하하!”
“사마 공자.”
“말씀하십시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이런 선물을 받기 위함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악양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온 것뿐이에요.”
해소월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에 사마공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 소저.”
“나에겐 이런 화려한 검 따윈 필요 없어요. 내 손때가 묻은 이 검 한 자루면 충분하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할 도리는 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해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마공천은 서릿발 같은 기운을 발산하는 해소월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악양검문의 소문주로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무공을 익힌 사마공천이었지만, 해소월에게 비할 수는 없었다.
“신경 써 줘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해소월이 사마공천에게 포권을 취한 후 계단을 내려갔다.
사마공천은 잠시 멍하니 그녀가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해소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이런 개 같은…….”
해소월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녀의 앞에 놓여 있던 음식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손조차 대지 않은 것이다.
해소월의 의도가 분명히 전해졌다.
그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지 않고 싶다는. 심지어는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조차 싫다는 의지가.
사마공천의 어깨가 굴욕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우와아!”
와장창!
사마공천이 탁자를 뒤집었다.
음식이 사방으로 튀고, 그릇이 깨져 나갔다.
“진정하십시오, 소문주님.”
진양수가 진정시키려 했지만 사마공천의 발광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계단 위쪽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지만 해소월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층에 내려온 그녀가 문득 주위를 훑어봤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이 층은 한가하기만 했다.
이 층의 창문을 통해 동정호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을 홀렸던 동정호의 야경은 해소월의 가슴마저 흔들어 놓았다.
그녀가 빈자리를 치우고 있던 점소이를 불렀다.
“혹시 이곳에 남는 방 있느냐?”
“네?”
점소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대는 악양검문의 소문주가 온갖 공을 들여 초청한 귀빈이었다. 그런 그녀가 서풍객잔에 묵겠다고 하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점소이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조용히 지내실수 있도록 별채를 드릴까요?”
“아니! 그냥 일반 객실을 다오.”
“하지만 아가씨처럼 귀한 분께 어찌 그런 곳을…….”
“동정호만 잘 보이면 상관없다. 그런 곳이 있느냐?”
“예! 있긴 합니다만.”
“그럼 그 방을 다오.”
“알겠습니다.”
결국 점소이는 해소월을 동정호가 잘 보이는 일반 객실로 안내했다.
“이곳이 일반 객실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깨끗한 곳입니다.”
“고맙구나.”
해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소이의 말대로 방은 제법 깨끗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이곳에서는 동정호의 모습이 잘 보인다는 것이다.
해남의 밤바다도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화려하진 않았다. 수면에서 부서지는 반짝이는 불빛들이 그녀의 감성을 자극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겠다.”
“알겠습니다. 주인어른께도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러마.”
점소이가 해소월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해소월이 침상에 털썩 앉았다.
피곤했다.
무공을 수련한 것도 아니고, 타인과 싸운 것도 아니었는데도 온몸이 노곤했다.
이런 식의 생산적이지 못한 만남은 무척이나 피곤했다. 만일 악양에서 당분간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면 사마공천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부님은 왜 이런 곳으로 가라고 하셔서.”
해소월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사부를 잠시 원망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강호행을 하는 것은 모두 사부인 능천월의 명 때문이었다.
그녀는 해남도에서 더 검을 단련하길 원했지만, 능천월은 더욱 높은 경지를 개척하려면 사람을 알아야 한다며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휴! 회합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한단 말이지?”
해소월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은 피곤했지만, 그래도 이곳에 온 첫날이었다. 답답하게 방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애검 벽상(碧霜)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해소월은 정처 없이 동정호변을 거닐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동정호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응?”
순간 그녀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동정호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아는 얼굴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서 보았는지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어디서 그들을 보았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서풍객잔.”
자신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식사하던 남자가 바로 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흔치 않은 가죽 장포를 걸친 채 동정호를 바라보는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그의 곁에는 방진보가 있었다.
방진보의 성화에 못 이겨 담호는 객잔을 나와 동정호변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방진보는 수려한 동정호의 밤 풍경에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문득 담호가 고개를 돌렸다. 낯선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소월과 담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담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해소월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검디검은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지독한 어둠뿐,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해소월이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눈빛을 담호는 소유하고 있었다.
해소월의 손바닥에 축축해져 옴을 느꼈다.
목 근육이 경직되어 오고,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대체 저자가 누구기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원에 인재가 없다고 생각했던 해소월이었다. 하지만 담호를 본 순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저기…….”
그녀가 담호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이었다.
츄화학!
갑자기 물속에서 십여 명의 검은 인영이 치솟아 올랐다. 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과 지나가던 노파가 검을 들고 그녀를 공격했다.
‘암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