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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1장. 만날 사람은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2)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이 자객으로 돌변했다.
상인이, 노파가 짧은 비수를 꺼내 해소월을 공격했다. 일상의 평화로운 풍경이 돌변해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 돌발 상황에 맞선 해소월의 반응은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허리춤의 검이 뽑힌다 싶은 순간 눈부신 빛의 편린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촤라락!
해소월의 검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주변을 휩쓸어 갔다. 노파와 상인이 해소월의 검벽에 막혀 뒤로 튕겨 나갔다.
그런 그들의 가슴에서는 피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해소월의 검이 어느새 그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창해단파검(蒼海斷波劍), 해남파에서도 오직 극소수의 제자만 익힐 수 있는 바다의 검공의 이름이었다.
창해단파검은 완벽한 공방일체(攻防一體)의 검이었다.
방어가 곧 공격이고, 공격이 곧 최고의 방어가 되는 검, 그것이 바로 해소월이 추구하는 검이었다.
쉬쉬쉭!
그녀의 검이 아름답게 허공을 갈랐다.
해소월의 허리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그녀의 검이 공기의 결을 파고들었다.
겉보기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 담겨진 흉험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사정을 모르는 방진보가 단지 겉모습만 보고 탄성을 토해 냈다. 그의 눈에는 마치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검무를 추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호는 그 속에 담긴 흉험함과 살의를 꿰뚫어 보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해소월이 펼치는 검공을 처음으로 창안한 자는 굉장히 강한 살의를 가진 자였을 것이다.
집요할 정도로 사혈만 노리는 검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검 자체의 위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제는 검공을 펼치는 인간이었다.
‘살의가 부족해.’
인간을 위해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공이었다. 하지만 검의 주인이 죽이려는 의지가 없었다. 그러니 검공이 지닌 본연의 위력을 모두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해소월의 검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가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단숨에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손속에 사정을 두어 목숨만큼은 빼앗지 않았다.
쉬가악!
그녀의 검이 연이어 허공을 갈랐다.
그때마다 자객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자객들 모두가 하나같이 깊은 검상을 입었다. 하지만 누구 한 명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단파유희(斷波遊戱), 검배해일(劍排海溢) 같은 초식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마침내 해소월의 검무가 끝났을 때 장내에 두발로 서 있는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검의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오롯이 그녀 혼자만이 서 있었다. 동정호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해중화라는 별호다운 위용이었다.
그런 해소월의 모습에 사람들이 탄사를 터트렸다.
“우와아! 최고다.”
“도대체 누구지?”
그들은 해소월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단숨에 열두 명의 자객들을 쓰러트린 엄청난 무위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것이다.
“아, 그녀는 해중화다.”
“해남도에서 온 여검객? 그렇다면 구무룡?”
광목으로 만든 자줏빛 허름한 옷과 애검 벽상, 몇몇 사람들이 해소월의 특징을 알아봤다.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더욱 열렬히 환호했다.
강호는 영웅에게 환호한다. 그대상이 잘 생기거나, 아름답다면 더욱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해소월은 무공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당연히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지만 해소월은 흥분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쌓은 수양은 깊고 넓어서 결코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으으!”
겨우 죽음을 면한 자객들이 상처를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호수에 숨어 있다가 암습한 자들 역시 하나같이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스릉!
“누가 당신들을 보낸 건가요?”
해소월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자객들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해소월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는 원독이 가득했다. 해소월은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배후를 캐물으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자객 중 한 명이 소리도 없이 품에서 둥그런 물체를 꺼내 들었다. 쇠로 된 둥그런 물체를 보는 순간 해소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벽력탄?’
처음 보는 물체지만, 보는 순간 직감했다.
벽력탄을 든 자객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 것이 보였다.
‘우리와 함께 가는 거다.’
자객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천뢰(震天雷)라는 이름의 벽력탄이었다. 일단 폭발하면 방원 삼십장이 폭발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해소월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수백 명의 목숨마저 일거에 사라질 것이다.
“미친!”
해소월이 다시 애검 벽상을 꺼내 들며 자객을 향해 달려들었다.
해소월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방심했어.’
강호로 나오기 전 사부가 그렇게 방심은 금물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자신은 고강한 무공에 도취되어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대가는 치명적으로 돌아왔다.
벽상을 뽑아 휘두르면서도 해소월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쾅!
그 순간 뇌음이 울려 퍼지며 해소월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강렬한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소월이 눈을 살짝 떴다. 그러자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검은 그림자 너머로 자객이 동정호로 훌훌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쿠와아앙!
그 순간 진짜 폭발이 일어나 후폭풍이 그녀와 일대에 있던 이들을 덮쳤다.
“아악!”
“크어억!”
수많은 사람들이 광풍에 휩쓸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들 중 폭발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해소월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잔뜩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당혹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호수에서 이는 파문과 연기가 보였다. 벽력탄이 호수에서 터진 것이다.
그 덕분에 다친 사람은 있을지언정 폭발에 의해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생기지 않았다.
“대체 누가?”
자신이 눈을 감은 것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 짧은 순간 벽력탄을 들고 있던 자객이 사라졌고, 폭발은 호수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벽력탄을 들고 있던 자객을 호수로 던졌거나 쳐 낸 것이 분명했다.
해소월이 급히 다른 자객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얼굴은 이미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입안에 머금고 있던 독단을 깨문 것이다.
해소월이 급히 누군가를 떠올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
뚱뚱한 소년과 함께 있던 검은 장포의 남자.
해소월은 그를 떠올렸다.
담호는 방진보와 함께 폭발이 있던 거리를 빠져나왔다.
“형!”
방진보가 담호를 불렀다. 하지만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벽력탄을 들고 폭사하려던 자객을 호수로 날려 보낸 이는 담호였다.
충보에 이은 파성추 한 방으로 자객을 호수로 날려 보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객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바로 곁에 있었던 사람도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담호가 자객을 죽인 것은 그 자리에 방진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진보를 데리고 자리를 뜨는 것보다 자객을 죽이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고마워요, 형. 괜히 저 때문에…….”
방진보가 담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방진보는 잘 알고 있었다. 담호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그가 움직인 것은 순전히 자신 때문이었다.
담호가 말없이 방진보의 머리를 큰 손으로 헝클었다. 그러자 방진보가 활짝 웃었다.
“저곳이다.”
“서둘러라.”
일단의 무인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악양검문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담호와 방진보를 지나쳐 폭발이 일어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악양검문뿐만이 아니었다. 악양에 몸을 담고 있는 문파라면 모두가 폭발이 일어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덕분에 악양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형, 저기요.”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방진보가 한곳을 가리켰다.
방진보가 가리킨 곳엔 야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상인들이 등불을 밝힌 채 먹을거리를 팔고 있었다. 동정호에서는 폭발이 일어나 수많은 이들이 죽을 뻔했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밤을 즐기고 있었다.
담호는 방진보에게 이끌려 야시장으로 들어갔다.
거리는 온통 먹을거리로 넘쳐나고 있었다. 노점상들은 직접 만든 음식을 좌판에 늘어놓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방진보는 노점상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갔다.
“우와아!”
방진보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급히 담호를 바라봤다.
“형, 이것들 좀 먹어 봐도 돼요?”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진보가 더욱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노점에서 파는 소룡포와 전병 같은 먹을거리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방진보를 따랐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방진보는 착실히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음식을 사랑하고, 자신이 만든 음식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했다.
그런 방진보의 마음은 누구보다 순수했다. 그리고 담호가 평생을 바쳐도 갖지 못할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하는 법이다.
어쩌면 그것이 담호가 방진보와 동행하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가 담호의 눈에 보였다.
평범한 체구에, 복장 또한 수수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대리석을 깎아 놓은 것처럼 잘생긴 얼굴엔 귀티가 흐르고 있었고, 새까만 눈동자엔 깊은 우수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등에 커다란 목갑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목갑 위로 검의 손잡이가 다섯 개나 삐져나와 있었다. 그 모양이 공작이 꽁지깃을 활짝 펼친 것 같았다.
꽤 많은 이들이 그런 남자의 특이한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만큼 쑥스러울 만도 하건만 남자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남자가 담호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담호가 코끝을 찡그렸다. 남자에게서 아주 강렬한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혈향.’
후각을 자극하는 피비린내였다.
담호가 뒤돌아봤다. 하지만 남자는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해소월에 이어 특이한 목갑을 짊어진 남자까지. 악양에 연이어 고수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모종의 힘이 작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필 자신이 악양에 들어온 시점에 딱 맞춰 그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 현소 진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에 우연이란 말처럼 사람을 기만하는 말이 없지. 수많은 인(因)이 씨줄 날줄로 엮여 과(果)라는 그물이 만들어졌을 때에 비로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만들어지는 거란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면 반드시 주변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조짐이 동반되기 마련이니까.
동정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자신이 악양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다. 담호는 그 바람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