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78화 (78/500)

 78

78화 1장. 만날 사람은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3)

악양검문은 위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악양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악양검문의 입구엔 십여 명의 무인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

악양검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악양검문 가장 크고 화려한 대전 태사의에 악양검문의 문주 사마경원이 앉아 있었다.

악양검문을 호남 오대문파의 자리에 올려놓은 이가 바로 사마경원이었다. 이제 오십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사마경원은 여전히 탄탄한 체격과 당당한 눈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마경원의 앞에는 해소월이 앉아 있었다.

어젯밤 자객들의 습격으로 어수선해진 동정호변을 수습한 곳이 바로 악양검문이었다.

사마경원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정말 진천뢰가 사용된 것이 분명하오?”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분명해요.”

“으음!”

해소월의 대답에 사마경원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경직되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대규모 암살 시도도 큰 문제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자객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진천뢰라는 대량살상 무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 화융문(火烿門)이라는 문파가 있었다. 화융문은 화기를 주로 만들었는데, 어느 날 그곳의 장인 한 명이 화약을 잘못 배합해 엉뚱한 물건을 만들어 냈다.

통상의 벽력탄보다 위력이 서너 배는 강한 데다가 휴대도 간편한 벽력탄을. 그것이 바로 진천뢰였다.

진천뢰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그 끔찍한 위력에 몸서리를 쳤다.

진천뢰를 사용하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도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그것도 수백 명 이상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강호의 한 집회에서 누군가 진천뢰를 터트린 것이다. 수백 명의 무인이 죽거나 다쳤고, 이 일로 인해 화융문은 강호의 공적이 되었다.

집회에서 가족을 잃은 무인들의 친구와 가족들이 화융문을 공격했다. 하지만 화융문 또한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종 화기와 진천뢰를 이용해서 대항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수백 명의 무인들이 진천뢰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무인들은 더욱 맹렬하게 화융문을 공격했다. 결국 화융문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문을 당하고 말았다.

진천뢰의 제조 비법 또한 이날 불에 타서 사라졌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진천뢰는 잊혔고, 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백 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진천뢰가 나타나다니.”

자객들이 사용한 것이 정말 진천뢰라면 사마경원이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악양검문이 호남의 오대문파에 속한다고 하지만 천하를 아우를 정도의 힘을 갖추지는 못했다.

사마경원이 물었다.

“자객들의 정체는 알고 있소?”

해소월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진천뢰를 가진 자객이 암습했는데도 모른단 말이오?”

“정말이에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수많은 비무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진천뢰를 사용해서 자신을 죽일 만큼 원한을 쌓은 자는 맹세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각하군.”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악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싫든 좋든 악양검문과 연관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어쩌면…….”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소?”

사마경원이 물었지만 해소월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와 연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마경원의 낯빛이 굳었다.

“해 소저, 난 지금 해 소저에게 예의와 성의를 다하고 있소. 악양검문이 비록 해남파에 비할 수 없이 작은 문파지만, 그래도 악양의 주인이라 자처하는 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소. 그러니까 짐작 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감 없이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소.”

사마경원의 몸에서는 제법 묵직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남성에는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같은 거대한 문파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 대진문(大鎭門)이라는 강력한 문파가 있어 호남성의 맹주를 자처했지만, 삼십여 년 전 마교와의 싸움에서 멸문당하고 말았다.

그 후 수많은 문파들이 호남성의 맹주를 자처하며 일어섰고, 그 결과 악양검문이나 의선문 같은 호남 오대문파가 생겨났다.

호남성 내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개의 문파라고 하지만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처럼 영향력이 강력하다거나, 강력한 무위를 갖고 있지 못했다.

한 지방의 패주를 자처하기엔 부족한 무력을 소유했지만, 그래도 고만고만한 다섯 개의 문파가 절묘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지금의 성세를 만들어 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같은 거대 문파에 속한 자들은 호남 오대문파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휴!”

해소월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마경원의 기세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처럼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알아야할 의무가 있었다.

적어도 이곳은 악양검문이 다스리는 곳이었으니까.

“그럼 솔직하게 말하겠어요.”

“경청하겠소.”

“조만간 동정호에서 큰 회합이 있어요.”

“회합이라면?”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중원의 유력문파들 중 몇 곳이 주도해서 이곳에서 모인다는 사실밖에는.”

“그게 무슨?”

사마경원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동정호에서 그런 큰 회합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악양검문의 문주인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극비 중의 극비예요.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몇 명 되지 않아요. 저 역시 사부님에게 언질을 받지 않았다면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을 거예요.”

“아니, 내 집 앞마당에서 회합을 가지면서 나에게 일언반구 없다는 것이 말이 되오?”

“조만간 사마 문주님에게도 전언이 들어갈 예정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사마경원의 양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감당하기 힘든 굴욕감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내 집 앞마당에서 비밀리에 회합이 있고, 그것이 이번 사태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이군. 맞소?”

“맞아요.”

“으음!”

사마경원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 문파에나 유력문파라는 단어를 쓰진 않는다. 최소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이상은 되어야만 쓸 수 있다.’

악양검문이 호남에서 제법 위세를 떨친다고 하지만,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에 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화가 난다고 해서 무작정 폭발할 수는 없었다. 구대문파와 같은 거대 문파를 상대로 시비를 걸어 봤자 망해 나가는 것은 악양검문 뿐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냉정해야 했다.

“그들이 왜 이곳에서 모이는지 해 소저는 알고 있소?”

“저도 몰라요. 그들이 도착해 봐야 알 수 있어요.”

“휴우!”

결국 사마경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해소월을 추궁해 봐야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알겠소. 결국 회합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봐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말이구려.”

“맞아요.”

“해 소저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말씀하세요.”

“회합이 열릴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주실 수 있소?”

“그건?”

“언제 또 자객들이 해 소저를 암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요.”

“제 몸 하나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어요.”

“그들이 진천뢰를 또 사용 안 한단 보장이 없소. 해 소저가 만일 이곳에서 무슨 일을 당한다면 내가 얼굴을 들 수 없으니 부디 이번만은 나의 뜻을 따라 주길 바라오.”

“으음!”

이번엔 해소월이 침음성을 흘렸다. 사마경원의 말이 타당했기 때문이다.

사마공천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을 듯싶었다. 비밀 회합만큼이나 진천뢰의 등장 역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게요.”

“잘 생각했소. 해 소저의 짐은 수하들을 보내 찾아오게 하겠소.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별채를 내드릴 테니 편히 쉬시구려.”

“고마워요.”

해소월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대화를 끝낸 후 해소월이 대전 밖으로 나왔다.

“해 소저.”

대전 밖에서 기다리던 사마공천이 그녀를 보고 반색했다. 손을 떠났다고 생각한 새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휴!”

해소월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 남자가 떠올랐다.

진천뢰를 사용하던 자객을 일격에 날려버린 검은 장포의 남자가.

사마경원과의 대화에서는 일부러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당시의 기억이 착각이 아닌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그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진천뢰의 폭발에 휘말렸던 상황에서 그런 광경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그 남자가 자객을 일격에 날려 버린 것이 맞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

이른 새벽 담호와 방진보는 서풍객잔을 나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악양의 선착장이었다. 선착장에는 동정호를 관람하는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다.

동정호에 올 때 타고 온 운마도강선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꽤 큰 유람선이었다. 두 사람은 선표를 산 후 유람선에 올랐다.

이 유람선을 타면 천하제일루가 있는 동정호 건너편에 손쉽게 갈수 있었다. 동정호 건너편에는 원강이 있었고, 원강에는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천하제일루가 존재했다.

서두르면 오늘 안에 갔다 올 수 있는 곳이었다.

“드디어 천하제일루에 가게 되었구나.”

방진보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흥분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아비인 방우광의 평생소원이었고, 그의 인생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될 소중한 순간이었다.

“식선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도대체 어떻게 요리를 하면 숙수가 식선이라는 별호를 얻을 수 있을까요?”

식선(食仙), 천하제일의 숙수라고 불리는 도학경의 별호였다.

그가 만든 음식을 단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도저히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온다고 했다.

그의 음식은 천당의 맛이라고 했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담겨 있다고 했다.

방진보는 도대체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그런 맛을 낼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으으! 정말 궁금해 못 참겠다.”

방진보는 어서 유람선이 원강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렸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람선 위에는 거의 오십여 명의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유람선이 어서 출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모두의 기대를 안고 유람선이 선착장을 출발했다. 바람을 가득 안은 돛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와아!”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기다려 온 꿈이기도 했고, 어떤 이에게는 풍류를 즐길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유람선은 순조롭게 운행했다.

“하하!”

“제 술잔을 받으시어요.”

간간히 기녀들과 함께 환락을 즐기는 조그만 배도 보였다. 동정호 변에 있는 기루에서 소유하고 있는 배였다.

배 위에는 각종 산해진미가 가득했고, 기녀들을 양쪽에 낀 한량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어 보였다.

유람선 위에 타고 있는 많은 이들이 부러운 눈길로 한량이 탄 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광경도 담호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반나절을 운행한 끝에 유람선은 원강에 정박했다. 담호와 방진보는 선착장에 내려 천하제일루를 향했다.

천하제일루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착장에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언덕 위의 거대한 오층 누각이 바로 천하제일루였다.

거대한 위용만큼이나 천하제일루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천하제일루의 입구 근처에는 수많은 마차들과 마부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천하제일루에 들어간 주인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하제일루에 올 정도라면 신분이나 재력이 평범할 리 없었다. 화려한 사두마차가 기본이었고, 더 화려한 마차도 다수 보였다.

천하제일루의 정문에는 무공을 익힌 것으로 보이는 덩치 두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담호와 방진보가 접근하자 덩치들이 막아섰다.

“예약은 했느냐?”

“안 했는데요.”

“그럼 들어갈 수 없다.”

방진보의 대답에 덩치 중 나이 많아 보이는 자가 딱 잘라 말했다.

“꼭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나요?”

“그렇다. 천하제일루는 오직 예약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방진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기대감을 잔뜩 갖고 왔는데 입구조차 들어가지 못하니 속이 상했다.

그 순간 담호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예약하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거의 한 달은 기다리셔야 할 거요.”

“한 달?”

“그렇소!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거요.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소.”

덩치가 담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 그의 입가엔 조소가 걸려 있었다.

비록 검은 가죽 장포가 특이하긴 했지만, 꽤나 허름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런 허름한 옷차림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천하제일루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럼 지금 예약하지.”

“예약을 하시려면 예약금이 필요하오. 금자는 있으시오? 최소 금자 한 냥은 예약금으로 걸으셔야하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호가 금자 하나를 꺼내 던졌다. 선뜻 금자를 건네는 담호의 모습에 덩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름을 말씀하시면 예약 명부에 올려놓겠소.”

“담호.”

“잠시만 기다리시오.”

덩치가 눈앞에서 커다란 명부를 들어 펼쳤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훑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다음 달 첫째 날이 비어 있구려. 괜찮겠소?”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덩치가 명부에 담호의 이름을 적었다.

“다 됐소. 그때 찾아오시구려.”

“그러지.”

담호가 대답과 함께 뒤돌아섰다.

방진보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담호를 따랐다. 하지만 조른다고 될 일도 아니었기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차 한 대가 천하제일루로 들어왔다.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육두마차였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백마 여섯 마리가 끄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마차는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의 지붕에는 은가보(銀家堡)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은가보의 마차다.”

담호와 방진보에게는 시큰둥하던 덩치들이 은가보의 깃발이 달린 마차의 등장에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방진보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마차를 바라봤다. 그렇게 오만하기만 하던 천하제일루의 덩치들을 움직이게 만든 존재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조그만 발이 발판을 사뿐히 밞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화려한 의복을 갖 입은 조그만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인상적인 인형 같은 외모의 소녀였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덩치들이 소녀에게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소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진보의 눈동자가 급속히 흔들렸다.

“소……청?”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