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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2장. 의도치 않은 만남은 문제를 부르기도 한다(1)
마차에서 내린 소녀는 은소청이 분명했다. 그녀의 곁에는 호위무사인 종리수가 함께 하고 있었다.
“소청!”
“응?”
방진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은소청이 고개를 돌렸다. 방진보를 확인한 은소청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넌…… 진보.”
“소청, 맞구나.”
“여긴 어떻게? 맞아! 너도 천하제일루에 온다고 했었지.”
은소청이 반색을 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가씨!”
등 뒤에서 종리수가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방진보의 앞에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진보야.”
“으응!”
“그날은 그렇게 가서 미안해. 일정이 갑자기 당겨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
“아, 아니야. 난 괜찮아.”
“이제라도 만났으니까 다행이다.”
은소청이 활짝 웃었다.
그녀는 방진보를 다시 만난 것이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 은소청의 가식 없는 태도에 방진보는 기분이 좋아져 미소를 지었다.
은소청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아저씨도 잘 지내셨어요?”
“음!”
“헤헤! 여전히 과묵하시네요. 그런데 벌써 식사하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아니, 우리는 예약이 안 돼 있어 그냥 돌아가는 길이야. 다음 달에 다시 오라고 하네.”
담호 대신 방진보가 대답을 했다.
“그래?”
은소청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곁에서 대기하던 천하제일루의 덩치들이 긴장을 했다.
‘저 뚱보가 은가보의 금지옥엽인 은 소저와 아는 사이였단 말이야?’
은가보는 호남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금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호남 오대문파의 일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천하제일루의 배후인 의선문과 연관이 깊은 곳이기도 했다.
의선문의 문주인 심우원이 바로 은소청의 외숙이었고, 그녀를 끔찍이도 아꼈다. 이곳 호남 땅에서 은소청의 심기를 건드리고도 제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은소청의 시선이 덩치들을 향했다.
“지금 이분들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방진보가 은소청을 만류하려는 순간이었다.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탁자 하나 더 내놓으라고 전하겠습니다.”
아까는 그렇게 완고하던 덩치가 급히 대답했다.
은소청이 싱긋 웃었다.
“들었지? 다 같이 올라가도 된대.”
“그래도…….”
“괜찮으니까 올라가자. 그날 그렇게 간 것도 미안하니까 여기서는 내가 대접할게.”
방진보가 난감한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방진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은소청과 종리수가 앞장서고, 담호와 방진보가 그 뒤를 따랐다.
안에서 본 천하제일루는 밖에서 본 것보다 몇 배는 더 화려했다.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가구가 벽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낮임에도 화려한 유등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최고급 나무로 만든 탁자에는 한눈에 봐도 부유해 보이는 이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일 층에만 어림잡아 스무 개 이상의 탁자가 있었다. 탁자 하나당 다섯 명만 계산해도 백여 명의 인원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와아!”
방진보가 탄성을 내뱉었다.
벌써부터 음식에서 풍겨 나오는 향이 장난이 아니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강렬한 향기에 방진보는 침샘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은소청은 그 모든 광경을 담담히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이 층, 삼 층, 사 층을 지나 마침내 최상층인 오 층에 도착한 후에야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오 층은 사방이 탁 트여 있었고, 동정호를 비롯해 원강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탁자의 수도 겨우 다섯 개에 불과했다. 그만큼 특별한 곳이란 뜻이었다.
은소청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나도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천하제일루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고마워!”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많이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는 너와 함께 있을게.”
은소청이 방진보를 빈자리로 잡아끌었다.
그런 은소청의 모습에 종리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이 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소청이 한번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나이가 지긋한 숙수가 계단을 올라왔다.
염소수염을 기른 꼬장꼬장해 보이는 늙은 숙수였다. 그가 은소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은가보에서 나오셨다고?”
“맞아요.”
“흥! 어쩐지 루주가 직접 올라가 보라고 하더니.”
도학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틱틱거렸다.
그는 자신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주방에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타인들이 자신이 만든 음식에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지체 높은 양반들이 자신을 찾는 경우였다. 한창 요리를 하다가 맥이 끊겼을 때의 그 허탈함은 숙수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숙수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큰 만큼 도학경은 그런 상황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내가 바로 천하제일루의 수석 숙수인 도학경이오. 무슨 음식을 드시고 싶으시오?”
“아무거나 말하면 만들어 주시나요?”
“흥! 천하에 내가 못하는 요리는 존재하지 않소.”
도학경이 팔짱을 꼈다. 그의 오만한 태도에 은소청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숙수로서의 자존심은 인정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선만큼은 견디기 힘이 들었다.
도학경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드시고 싶소? 은가보의 금지옥엽.”
“일단 금사오룡(金絲烏龍)을 부탁드려요.”
은소청의 대답에 방진보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금사오룡은 그가 은소청을 처음 만났을 때 해 준 음식이기 때문이다.
사정을 모르는 도학경이 콧방귀를 꼈다.
“흥! 어렵지 않은 음식이군. 다음은?”
“나머지는 알아서 해 주세요.”
“알겠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금방 만들어 주지.”
“부탁할게요.”
도학경이 뒤도 안돌아보고 계단을 내려갔다.
방진보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은소청을 바라봤다.
“왜 그랬어?”
“뭐가?”
“금사오룡.”
“내가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맛있는 것이었으니까.”
“에휴!”
방진보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나저나 은가보라니 대단하네.”
“미안해! 미처 말하지 못해서.”
“아니야! 나는 단지 놀랐을 뿐이야. 너의 신분이 너무 대단해서 내가 이렇게 대화를 할 자격이 있나 싶어서…….”
“신분이 무슨 상관이야. 우린 친구잖아.”
“친구?”
“그래! 친구. 나는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안 그래?”
“나, 나는…….”
“난 친구가 별로 없어. 네가 내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당돌하기까지 한 은소청의 말에 방진보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친구야.”
“호호호!”
은소청이 청아한 교소를 터트렸다.
그런 은소청을 보면서 종리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은가보의 금지옥엽인 은소청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존귀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호남 땅에서 그녀에 비견될 만한 신분을 가진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은 오만해도 되련만 은소청은 무척이나 털털했다. 성격 또한 대담해서 그녀의 고귀한 신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들과도 친분을 맺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보주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기겁하겠군. 정체도 확실치 않은 소년과 친구라니.’
어쩌면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은가보의 보주인 은일명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해서 격에 맞지 않는 자가 자신의 딸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은일명과 은소청 사이를 조율하는 것이 바로 종리수의 역할 중 하나였다. 하지만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 충돌하지 않게 조율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종리수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천하제일루에 들어온 이후 담호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과묵함과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담호를 자세히 살필수록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담호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담호라고 했지? 차후 저자에 대한 조사도 따로 진행해야겠군.’
담호와 헤어진 직후 이곳으로 곧장 내려온 은소청과 종리수였다. 때문에 세상에 돌고 있는 소문을 거의 듣지 못했다. 그래서 담호의 정체를 전혀 유추해 내지 못했다.
그 순간에도 은소청과 방진보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약속이 있다고?”
“응! 그쪽에서 여기에서 약속을 잡았어.”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이런 곳에서 약속을 잡고.”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은소청이 싱긋 웃었다. 그에 방진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였다.
“음식 나왔습니다.”
점소이들이 음식이 든 쟁반을 들고 나왔다. 선두에 도학경이 걸어오고 있었다.
점소이들이 네 사람이 앉은 탁자에 부지런히 음식을 내려놓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탁자를 가득 채웠다.
음식에서 풍기는 향기만으로도 정신이 다 혼미해질 것 같았다.
“우선 가볍게 관탕포(灌湯包)를 먼저 드시고, 다음엔 수자어(水煮魚)를 드시오. 그다음에 금사오룡을 들면 풍미가 한층 더 농후해질 것이오.”
관탕포는 육즙이 풍부한 만두인데 먹는 방법이 자못 특이했다. 대롱을 만두에 꽂아 소를 빨아 먹는 것이다.
수자어는 생선을 포를 떠서 기름에 살짝 튀긴 후 각종 양념을 넣고 다시 볶는 요리였다.
두 가지 모두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요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보기 힘든 것이 바로 금사오룡이었다.
해삼과 다진 고기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금사오룡은 잘못 요리하면 해삼이 오그라들어 풍미가 사라진다. 그 때문에 많은 숙수들이 금사오룡을 만드는 것을 힘들어했다.
도학경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자신이 만든 요리를 설명했다. 그의 설명대로 방진보와 은소청은 관탕포에 대롱을 꽂아 쪽쪽 빨기 시작했다.
대롱을 따라 곱게 다진 소가 빨려 올라왔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맛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에 도학경이 당연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처음 경험하는 풍미에 입안이 즐거웠다. 두 사람의 얼굴에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반면 담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관탕포를 먹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도학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흥! 음식의 맛이라곤 알지도 못하는 무지렁이인 모양이군.’
간혹 그런 자들이 있다. 맛을 구별할 줄도 모르면서 단순히 비싸면 맛있는 줄 아는.
도학경은 담호도 그런 자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음식은 수자어였다. 기름에 튀기고, 또 볶았지만 포를 뜬 생선의 모양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방진보와 은소청은 조심스럽게 포를 뜬 생선을 입으로 가져갔다.
스륵!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포가 녹았다.
달달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관탕포를 먹으면서 조금은 느끼했던 입안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 모두 새로운 맛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는 정말 식선이라 불려 마땅하구나.’
방진보는 그제야 왜 그렇게 방우광이 도학경이 만든 음식을 맛보려고 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최상의 재료와 최고의 양념, 살아 있는 불, 그리고 최고의 숙수의 솜씨가 조화를 이뤄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처음이야. 이런 맛은…….’
방진보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담호를 바라봤다. 분명 담호도 수자어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다르게 담호는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러지? 맛이 없나?’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그래도 호불호를 분명히 하던 담호였다. 그런 담호가 침묵을 지키자 왠지 불안해졌다.
방진보는 이내 상념을 떨쳐 버리며 다시 음식에 집중하려 했다.
수자어를 다시 한 번 떠먹었다. 여전히 천상의 맛이었다.
문득 방진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맛을 봤는지 영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그때 도학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엔 금사오룡이오. 해삼과 고기, 그리고 볶은 야채를 한꺼번에 드시오.”
방진보와 은소청은 이번에도 그의 말대로 했다.
도학경은 그들이 금사오룡을 먹는 것을 오만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들의 놀란 표정을 기대하면서.
“맛있네.”
그런데 은소청에게서 나온 반응은 그의 기대 이하였다.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방진보를 바라보았다.
“으음!”
방진보에게서 나온 반응 또한 미지근했다.
맛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먹어본 맛이었다. 그렇게 새롭지 않은 맛.
‘내가 이걸 어디서 맛봤더라?’
그때였다.
탁!
갑자기 은소청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진보를 바라봤다.
“네가 한 게 더 맛있어.”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