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81화 2장. 의도치 않은 만남은 문제를 부르기도 한다(3)
방진보가 은소청의 어깨를 잡은 채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소청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담호의 살기를 감당하기엔 그녀가 너무나 어리고 연약한 것이다.
은소청의 앞에는 종리수가 검을 꺼내 든 채 서 있었다. 담호의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빼어 든 것이다.
종리수는 이를 꽉 깨문 채 담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지만, 정작 종리수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담호가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러자 방진보가 고개를 저었다.
방진보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은소청 때문이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마음을 읽었다.
담호의 시선이 심우원을 향했다.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담호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야 돌덩이처럼 경직되었던 공기가 풀렸다.
“휴!”
누군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심우원은 담호의 정체를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최근에 들었던 믿을 수 없던 소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천산장을 홀로 멸문시키고, 홍암산장에서 믿을 수 없는 무위를 떨친 무인. 거기에 공동파의 대제자이자 구무룡의 일원인 남학을 단숨에 제압했다고? 너무 황당해서 헛소문으로 치부했었는데.’
그 믿을 수 없는 소문의 주인공은 칠흑처럼 검은 장포를 입고 다리를 조금씩 전다고 했다.
그래서 헛소문이라고 치부했는데, 소문이 묘사한 것과 똑같은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심우원의 입술이 열렸다.
“신……강혈성.”
이제 그는 소문을 믿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소문 속에 들려오던 모습보다 더욱 끔찍했다. 그의 무력이 소문의 절반만 되어도 의선문은 멸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해야 했다.
그가 급히 말했다.
“미, 미안하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소.”
의선문의 문주로서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담호의 대답은 여전히 서늘했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 아이들에게 해.”
아직도 방진보와 은소청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말했어야 했는데. 내말에 상처받았다면 사죄하겠다.”
“아, 아니에요.”
“외숙! 저흰 괜찮아요.”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방진보와 은소청이었다.
특히 은소청의 당혹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외숙 심우원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담호가 두렵다는 뜻이다.
은소청이 곁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폭풍이 불어오면 모든 것이 초토화되지만, 막상 폭풍의 눈만큼은 평화로운 것처럼.
‘대체 아저씨가 누구기에?’
하지만 은소청은 감히 캐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앞에 혈구로 변한 시신이 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좌불안석이 된 것은 바로 도학경이었다. 도학경은 지금 숨고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사, 사신(死神)이 눈앞에 있었구나.’
무림인들이 무섭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들을 신경 쓴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섬세한 식도락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한당이라고 조소했을 뿐.
그 모든 것이 의선문이 든든하게 지켜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선문의 후광이 사라진 지금 그는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숙수가 아니라 겁 많은 노인에 불과했다.
담호의 시선이 도학경을 향했다. 그러자 도학경이 급히 담호의 시선을 피했다. 그에겐 감히 담호의 시선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당신 때문에 애꿎은 목숨 하나가 날아갔잖아.”
“…….”
도학경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게 어떻게 내 탓이냐? 죽인 건 당신이잖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담호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할 용기는 죽어도 없었다.
심우원이 도학경을 바라봤다.
“자네 혹시 음식을 만들면서 실수한 것이 없었나?”
“아시잖습니까? 제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요.”
“그런데 왜…….”
그때였다.
“아, 혹시 금사오룡을 만들 때 천향초를 첨가했나요?”
방진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도학경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천향초는 오직 천산에서만 나는 귀한 향신료였다. 숙수들 중에서도 존재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고,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귀했다.
금사오룡을 만들 때 풍미를 돋우기 위해 약간의 천향초를 사용했다. 그것은 같이 일하는 숙수들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어쩐지…….”
방진보가 중얼거렸다.
그런 방진보를 보며 도학경이 물었다.
“천향초를 넣은 것을 어찌 알았느냐?”
“예전에 맛본 적이 있어요.”
“네가 천향초를 맛봤다고? 그 귀한 것을?”
“예!”
담호가 서천산장을 초토화시켰던 그때 방진보는 천향초를 맛봤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그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학경이 만든 금사오룡을 맛봤을 때 어쩐지 익숙한 맛이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천향초는 분명 음식의 맛을 최고로 끌어올려 줘요.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그 맛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오히려 과했단 뜻이구나.”
“제 생각에는요.”
“으음!”
도학경이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넣은 천향초가 오히려 맛을 헤쳤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도학경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진보를 바라봤다.
“혹시 요리를 배운 적이 있더냐?”
“아버지가 숙수셨어요. 전 아버지에게서 배웠구요.”
“대단하구나. 천향초의 맛을 구별할 줄 알다니. 정말 대단한 미각을 가졌어.”
“아니에요.”
“미안하구나. 내 실수인 줄 모르고 너를 탓했다. 은 소저에게도 사죄드리겠소. 그런데 은 소저도 천향초를 넣은 것을 알고 계신 거요?”
“아니에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더 맛있는 금사오룡을 먹어본 적이 있어요.”
“그게 무슨?”
“제 입맛엔 진보가 해 준 금사오룡이 가장 맛있어요. 그렇다고 식선의 요리가 맛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단지 제 입맛엔 진보의 요리가 더 잘 맞을 뿐이에요.”
“으음!”
도학경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저들이 음해를 하려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실수였고, 오해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한 사람이 죽었고, 자신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심우원 역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신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심우원을 볼 면목이 없었다.
도학경이 한숨을 내쉬며 심우원을 바라봤다.
“휴! 이 모든 게 제 탓입니다. 제가 오만한 탓에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 모든 책임을 지고 수석 숙수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문주님께서는 부디 저를 벌해 주십시오.”
“아니오. 전후사정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저들에게 윽박지른 나의 책임도 크오.”
심우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른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기도 했고, 한바탕 악몽을 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고, 그가 감당해 내야 할 몫이었다.
담호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진보 때문에 지금은 가만있지만, 여차하면 움직일 것 같은 표정과 분위기가 느껴졌다.
심우원이 담호에게 포권을 취했다.
“다시 한 번 사과하겠소. 그러니 오늘 일은 이쯤에서 서로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소?”
“수하가 죽었는데도?”
“그래도 불문에 부치겠소.”
심우원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었다. 감당하기 힘든 굴욕감이 그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노에 못 이겨 담호와 같은 자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 후환이 어디까지 미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담호를 적으로 돌릴 때가 아니었다. 최소한 지금은 말이다.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찾아와.”
“…….”
“단 전 문도의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오는 게 좋을 거야.”
“큭!”
광오하기까지 한 담호의 말에 심우원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담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담호가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다리를 살짝 절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방진보가 은소청에게 말했다.
“갈게!”
“하지만…….”
“나중에 보자.”
방진보가 은소청에게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담호의 뒤를 따랐다.
은소청이 그런 방진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쿵! 쿵!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심우원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휴!”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은 후에야 심우원이 오 층에 있는 손님들을 바라봤다. 이젠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도학경의 명예가 떨어져서도 안 되고, 의선문의 이름에 먹칠이 가는 일이 있어서도 안됐다.
다행히 심우원에겐 의술과 무력이란 훌륭한 수단이 있었다. 거기에 은가보의 금력까지. 그 정도라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이제 대화를 할 시간이었다.
방진보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언덕 위 천하제일루가 오연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대단해 보이던 천하제일루였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소청.’
은소청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담호를 혼자 두긴 싫었다.
방금 전 한사람을 죽인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담호는 무감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방진보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
그가 부르자 담호가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셨어요?”
“…….”
“그 의선문의 무인……꼭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 싶어서요.”
“그래야 했다.”
“왜요?”
“자신이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지옥을 눈앞에서 봐도 믿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이니까.”
“형!”
“의선문주라는 자의 눈을 봤느냐?”
“그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눈빛이다. 그런 자들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강하지. 그래서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상대가 약점을 드러낸다 싶은 순간 집요하게 파고들어 짓밟지만, 강한 자에겐 한없이 고개를 죽이는 그런 부류. 담호가 본 의선문주가 바로 그런 자였다.
“형!”
“의선문이라는 껍데기나 세간의 명성 따윈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의선문의 문주라는 옷을 벗기고 남으면 그에게 뭐가 남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면 뭐가 남지?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는 외적인 것이 아니야.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본질이지.”
평상시 담호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담호는 방진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방진보는 너무 순진했고, 세상에 밝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방진보의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밝지도 않았다.
때로는 과격한 방법이 가장 옳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담호는 몸으로 자신의 생각을 방진보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방진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