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82화 3장.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1)
혈린살막은 신강의 패자를 자처했다. 그만큼 강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고, 적어도 신강에서 그들의 아성에 도전할만한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혈린살막엔 거칠면서도 자유분방한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했다. 그렇게 된 데는 혈린살막의 주인인 심수명의 영향이 무척 컸다.
심수명은 혈린살막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절대로 그들을 강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하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지금의 혈린살막을 만들었다.
혈린살막의 절대자 심수명은 자신의 거처에 앉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벽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 적성.”
혈마가 남긴 마지막 유산이자, 서천산장의 장주인 은하성이 그렇게 갖길 원하던 귀물이었다.
은하성의 죽음 이후 빛을 잃은 적성. 심수명은 적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담겨 있었다.
‘저 도를 갖고 싶다. 저 도를 내 마음껏 휘두르고 싶다.’
처음에 적성을 가져왔을 때만 해도 별다른 욕심은 없었다. 그저 승리의 징표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욕심을 부리지 못하도록 자신의 방 안에 장식해 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다. 매일같이 적성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그의 마음엔 탐욕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었다.
“제길!”
심수명이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으악!”
“습격이다.”
갑자기 밖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심수명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어떤 놈들이?”
그가 급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혈린살막에 침입한 수백 명의 무인들이 보였다.
푸른빛이 감도는 투구에 마찬가지로 푸른색 갑주를 입은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기골이 장대한 전마를 탄 채 푸른빛이 감도는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푹! 푹!
“크악!”
그들이 창을 내지를 때마다 혈린살막의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혈린살막의 무인들도 최선을 다해 대항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무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혈린살막의 무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장대한 체구의 남자가 있었다. 마치 커다란 바위를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덩치,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거대한 전마.
후웅!
“크악!”
그가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창을 휘두를 때마다 혈린살막의 무인들이 두 동강이가 나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거대한 창을 마치 도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푸른색 창기가 넘실거렸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창기가 마치 지옥의 귀화 같았다.
단순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오한이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그가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득 우두머리의 눈동자가 심수명이 있는 곳을 향했다. 그 순간 심수명은 깨달았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절대 그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영혼이 먼저 두려움을 느끼고 경고하고 있었다.
다그닥!
우두머리가 말머리를 돌려 심수명이 있는 곳을 향했다. 심수명도 혈린도를 집어 들고 뛰어나가려 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심옥과 흑노가 뛰어 들어왔다.
“아빠!”
“막주님!”
그들의 몸에 난 상처가 얼마나 치열한 격전을 치렀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심수명이 급히 심옥의 전신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냐?”
“난 괜찮아. 아빠는?”
“긴말할 시간 없다. 어서 혈린살막을 빠져나가거라. 서재에 가서 세 번째 서가를 밀면 비밀통로가 나올 것이다. 그곳으로 빠져나가거라.”
“그럴 순 없어.”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다.”
“싫어! 나도 아빠와 함께 싸울 거야.”
“휴!”
심수명이 한숨을 내쉬며 흑노를 바라봤다.
“흑노!”
“예! 주군.”
“내 딸을 잘 부탁하네.”
“아빠! 그게 무슨……아!”
순간 심옥이 정신을 잃었다. 심수명이 그녀의 수혈을 짚은 것이다.
“주군?”
“어서 데리고 가게. 저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그들을 당해낼 수 없네. 어서 가게. 부디 내 딸을 잘 지켜 주게.”
“알겠습니다. 주군!”
“어서 가게.”
“그럼!”
흑노가 정신을 잃은 심옥을 안고 방을 빠져나갔다.
쾅!
그 직후 벽이 통째로 부서져나갔다. 이어 습격자들의 우두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챠앗!”
심수명이 지체하지 않고 그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쉬가악!
혈린도에서 일어난 붉은 검기가 우두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우두머리 남자는 가볍게 창을 휘둘러 심수명의 공격을 막아 냈다.
“흐아압!”
심수명이 연이어 혈린도를 휘둘렀다. 그는 혈린도로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초식을 모두 쏟아 냈다.
“죽어랏! 이 괴물 같은 놈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이 혈린살막을 습격했는지는 몰랐다.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어떤 초식을 펼치든 우두머리 남자는 여유롭게 막아 냈다.
츄화학!
우두머리 남자의 창이 뱀처럼 뻗쳐 나와 심수명의 어깨를 관통했다. 어깨를 빠져나온 창날은 뒤쪽의 벽까지 한꺼번에 뚫었다.
“커헉!”
심수명이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투구 속에 가려진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제법이군! 허나 기세가 모자라.”
“네놈들은 누구기에 감히 혈린살막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것이냐?”
우두머리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벽에 걸려 있는 적성을 바라봤다.
“명령을 받았거든. 적성을 찾아오라는.”
“요도를 노리고 왔단 말이냐?”
“분에 넘치는 보물은 화를 부르는 법이지. 적성은 너 정도의 무인이 갖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
“겨우 도 한 자루 때문에 이런 살육을 벌이다니. 네놈들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큿! 강호를 살아가는 자가 하늘을 믿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우두머리 남자가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음성에 담긴 살기가 심수명을 두렵게 만들었다.
우두머리 남자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벽에 걸려 있던 요도 적성과 혈마진경이 쑥 딸려왔다.
그 광경을 본 심수명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허, 허공섭물(虛空攝物)?”
내공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자들만이 펼칠 수 있다는 고도의 절기를 우두머리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펼치고 있었다.
심수명은 그제야 남자가 자신의 예상보다 더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글쎄!”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퍼버버벅!
순간 심수명의 몸 안에서 작은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우두머리 남자가 심수명의 몸을 관통한 창날에 내공을 주입한 것이다.
먼저 작은 혈맥이 터져나가고, 뒤이어 주요 대맥들이 터져나갔다. 마치 몸 안에서 수많은 폭죽이 폭발을 일으킨 것처럼 심수명의 몸이 들썩거렸다.
“크아악!”
심수명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눈과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뿐만 아니었다.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이 혈린살막의 막주인 심수명의 최후였다.
그제야 우두머리 남자가 창을 거뒀다.
“시시하군! 그래도 신강성의 패자라기에 조금은 기대했는데.”
우두머리 남자가 몸을 돌렸다.
혈린살막에서 벌어지던 학살은 이미 끝이 난 후였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푸른색 갑주를 차려입은 그의 수하들뿐, 혈린살막의 생명체는 개미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피해는?”
“청기병(靑奇兵) 이백 명, 전원 무사합니다. 그런데…….”
“뭐지?”
“탈출한 자가 있는 듯합니다. 서재 쪽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추적자를 붙여. 아직은 드러낼 때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전원 귀환한다.”
“존명!”
우두머리 남자가 몸을 돌려 혈린살막을 나섰다.
그들이 사라진 혈린살막에는 죽음의 기운만 물씬 풍기고 있었다.
***
은소청은 엉망이 된 천하제일루의 오 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실제로 담호라는 이름의 폭풍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나갔다.
위기 앞에서 그녀의 외숙 심우원은 놀라운 수완을 보여주었다. 돈으로 이곳에 있던 손님들의 입을 막았고, 그들이 절대 발설할 수 없도록 이중 삼중의 조치를 취해 놨다.
이곳에 있었던 일들을 발설하는 그 순간 그들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휴!”
은소청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종리수가 그런 은소청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 역시 마음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은검.”
“예!”
“아저씨랑 싸우면 어떨 것 같아?”
“…….”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종리수가 머뭇거렸다.
그런 종리수의 반응에 은소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숙이 꼼짝도 하지 못했어. 호남 오대문파 중 하나인 의선문이라는 문파의 주인이. 바꿔 말하면 호남 오대문파 정도로는 그 아저씨를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야.”
“그건…….”
“그 아저씨,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네.”
비록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종리수도 심정적으로는 은소청의 말에 동의했다.
‘아니, 단순히 무서운 정도가 아니야. 그가 가진 파괴력은 상상, 그 이상이야.’
의선문의 문주 앞에서 문도를 죽이고도 그 어떤 후환도 남기지 않았다. 보통의 무인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강혈성이라고 했지? 은검은 들어 본 적이 있어?”
“죄송합니다.”
“하긴 은검도 나와 다니느라 강호와 동떨어져 있었지. 지금이라도 아저씨에 대해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에휴!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그냥 진보가 해 준 음식이 맛있어서 만난 것뿐인데.”
은소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호남성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은가보의 무남독녀라고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는 거야?”
“어?”
갑자기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은소청이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봤다.
“그러다 바닥 꺼지겠다.”
“언니?”
은소청이 언제 인상을 쓰고 있었냐는 듯이 활짝 웃었다.
특이한 복장의 여인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상체엔 호피로 만든 조끼를 입고, 하체엔 착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은 여인이었다. 다갈색 피부에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초원을 자유롭게 뛰노는 야생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언니!”
은소청이 양팔을 활짝 벌려 여인을 맞이했다.
여인의 싱그러운 미소가 짙어졌다.
“오랜만이야.”
“혜령 언니.”
여인의 이름은 황혜령, 은소청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