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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83화 (8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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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3장.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2)

담호와 방진보는 서풍객잔으로 돌아왔다.

“으아! 죽겠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방진보가 침상에 누워 앓는 소리를 냈다. 겨우 한나절 동안 너무 큰 사건이 있었다. 아직 어린 방진보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방진보는 침상에 눕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담호는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창틀에 곱게 접힌 쪽지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새벽에 객잔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담호는 창문을 열고 쪽지를 집어 들었다.

쪽지에 적혀 있는 단 두 글자.

천상(天上).

담호가 주먹을 꽉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진보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담호가 밖으로 나갔다.

서풍객잔을 나와 그가 향한 곳은 바로 기루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였다. 그중에서도 천상루가 그의 목적지였다.

천상루의 입구에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서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호객했던 운정이었다.

담호가 나타나자 운정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루주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운정이 앞장서서 천상루로 들어갔다.

담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운정의 뒤를 따랐다.

“어서 오세요.”

기예화가 담호를 맞이했다.

담호가 손에 든 쪽지를 보였다.

“이걸 보냈더군.”

“맞아요. 제가 보냈어요.”

“성과가 있었나 보지?”

“어느 정도는요. 일단 앉으세요.”

“됐어. 얘기해.”

“급한 성격은 여전하시네요. 그래도 앉으세요. 이야기가 제법 길어요.”

“그럼 빨리 말해.”

“역시 예상한 대로네요. 당신이라면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면사에 가려진 기예화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담호는 말없이 기예화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부담이 갈 만도 하건만 그녀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십칠팔 년 전 섬서성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도적들. 인원은 서른 명 정도 되고, 우두머리는 왼쪽 뺨에 큰 흉터가 있는 오십 대의 남자. 당신이 찾아달라고 한 사람들이에요. 맞나요?”

“찾았나?”

담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동시에 방안의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예화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무거워진 공기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술을 침을 적시며 말했다.

“당신이 찾는 사람들은 아마도 흑호단(黑虎團)일 거예요.”

“흑호단?”

“그 당시에 섬서성 일대를 주름잡던 도적들이에요. 민가 약탈과 부녀자 납치, 강간을 일삼던 악명 높은 패거리들이에요. 그들이 들른 마을은 마치 역병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아무 것도 남아나지 않았다고 해요.”

“단주는?”

“단주의 이름은 조윤산. 당신의 말처럼 왼쪽 뺨에 큰 흉터가 있어요.”

기예화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예화는 그런 담호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마치 목석처럼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던 담호가 처음으로 심정의 동요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조……윤산, 조윤산.”

담호는 기예화가 말한 이름을 곱씹었다.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그 모습이 어찌나 스산했던지 기예화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지?”

“그의 행방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어요.”

“왜지?”

“십오 년 전 그는 흑호단을 해산하고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

“네! 말 그대로 홀연히 해산하고 종적을 감췄어요. 그 후의 모습이 전혀 포착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찾을 수 없단 말이야?”

순간 기예화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말속에 담긴 살의가 그녀의 살을 떨리게 만들었다.

지금 담호가 원하는 답을 해 주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섬뜩한 느낌에 온몸의 솜털이 다 쭈뼛 일어섰다.

기예화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다행히 흑호단 중 한 명의 행방을 알고 있어요.”

“말해! 그는 어디 있지?”

“말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대신…….”

“대신?”

“당신이 한 가지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그 일만 해 주면 그의 행방을 알려줄게요.”

기예화가 거래를 제안했다. 그는 담호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담호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무슨?”

“난 이미 대가를 지불했어.”

“그건…….”

“난 약속을 어기거나 단서를 붙이는 자들을 제일 싫어해.”

실내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어 바람 한 점 들어올 구멍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기예화의 얼굴을 가린 면사가 펄럭였다.

면사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설마 담호가 대번에 이렇게 살기를 드러낼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해요. 담 소협!”

“마음대로 해. 단서를 달려면 달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싶으면 그렇게 해. 대신 나도 마음대로 할 테니까.”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윽!”

기예화의 입술을 비집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담호가 발산하는 살기만으로도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그녀가 질린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이 안에 몇 명이 있지? 오십 명? 백 명?”

“그걸 왜?”

“하나하나 찾아서 모조리 죽여 주지. 어린 계집이든, 나이든 계집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다. 네가 아는 사실을 모조리 털어놓을 때까지.”

“그, 그래도 소용없어요. 우리 하오문은 어떤 위협에도 절대 굴하지 않으니까요.”

비록 담호의 기세에 짓눌리긴 했지만 기예화 역시 하오문의 지부장으로 잔뼈가 굵은 여인이었다. 결코 타인의 위협에 쉽게 굴복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가 나빴다.

그녀의 상대는 담호였다. 일단 한 번 의지를 정하면 절대 뒤를 돌아보거나 물러서지 않는 남자였다.

“상관없어. 이곳에서 답을 얻지 못한다면 다른 하오문 지부로 가지. 그곳에서도 아무 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곳에 있는 인물 역시 모조리 죽여 주지. 그리고 다시 다른 지부를 찾을 거야.”

“그게 가능할 것 같나요? 본문에서 척살령을 내릴 거예요. 그러면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견디지 못해요.”

“말했잖아. 상관없다고. 그러다가 죽어도, 사지가 잘려 나가도 상관없어. 단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너희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움직일 거야.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아아!”

기예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담호에겐 어떤 협상안도 거래도 통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담호의 검은 눈동자 안에 자신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낯선 모습이 담호의 눈을 통해 보였다.

그 모습이 꼴사납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 담호의 살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이제까지 은신해 있던 설희가 보다 못해 뛰쳐나와 기예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에게선 어떻게 하든 기예화를 지키겠단 의지가 발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굳센 의지도 담호라는 괴물을 상대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였다.

담호의 시선이 설희를 향했다.

“너부터 시작하지.”

오싹!

설희가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교차해 전면을 막았다.

쾅!

“크윽!”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설희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파성추가 작렬한 것이다.

뒤로 날아가는 그녀의 양팔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나마 팔에 내공을 집중을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양팔은 물론이고 가슴뼈까지 모조리 박살날 뻔했다.

설희는 어떻게든 멈춰 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담호가 더 빨랐다.

쉬익!

담호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고 있었다.

흑발이 휘날리고, 그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섬뜩하게 빛나는 눈동자 안에 겁에 질린 설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담호가 발산하는 폭풍 같은 살기를 견디기엔 그녀의 몸이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흑!”

설희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턱!

담호의 손이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두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천격이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요. 말할게요. 말할 테니까 제발 멈춰요.”

기예화의 처절한 외침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후웅!

살갗을 엘 듯 몰아치던 강렬한 바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동시에 설희의 두 다리도 다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말할게요.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제야 담호가 설희의 멱살을 풀고 기예화를 바라봤다. 기예화가 담호의 마음이 변할까봐 급히 말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상음(湘陰)에 본문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이 있어요. 그곳에 스스로 흑호단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 떠드는 남자가 자주 출입해요. 그를 찾으면 나머지 사람들의 행방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상음이란 말이지?”

“서두르면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기예화는 도박장을 찾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녀는 행여라도 담호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했다.

담호의 무공도 두려웠지만, 더욱 무서운 건 담호라는 인간 자체였다. 하오문의 악양 지부장으로 몇 년을 이곳에 있었고, 그 이전에도 기녀로 수많은 인간군상을 봐 온 그녀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담호만큼 사람을 두렵게 만든 자는 없었다.

대화와 협상이 통하지 않는 인간.

그녀처럼 복잡한 인간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자에겐 최악의 상대였다.

“내가 없는 동안 진보의 안위를 지켜 줘.”

“그건…….”

“부탁이 아니야.”

“알았어요.”

결국 기예화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 말았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담호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쿨럭!”

그제야 설희가 마른기침을 토해 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예화가 담호가 사라진 곳을 망연히 바라봤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전면 재수정해야겠어. 무력, 성격, 행동력, 지력, 모든 것이 위험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하오문 최악의 적이 될 수도 있어.”

“아가씨!”

“위에서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일단은 그에게 전면 협조해.”

“그래도 되겠어요?”

“어쩔 수 없잖아. 총타는 먼 곳에 있고, 그는 지척에 있으니. 천상루 백이십 명의 목숨을 보존하려면 협조하는 수밖에.”

“알겠어요.”

“그와 적이 되는 것은 확실한 제압수단을 확보한 후의 일이야. 그런 수단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기예화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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