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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85화 (8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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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4장. 혈성이 움직이니 피바람이 불어온다(1)

누군가 웅얼거렸다.

“내가 왜 여기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공감을 표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다.

“허윽!”

핏덩이가 겨우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치 육지에 올라온 문어처럼 전신의 뼈란 뼈는 모조리 부서진 채 겨우 숨만 몰아쉬고 있는 그를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도박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담호가 행한 끔찍한 행사에 진저리를 쳤다. 대상만 달랐다 뿐이지, 담호가 행사한 무자비한 폭력은 그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 사람을 인간이라 불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지만, 담호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각했다.

차라리 분노하고, 광기를 터트렸으면 인간다울 만도 하건만 담호에겐 그런 인간적인 감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기계처럼 인간을 분쇄하는 그의 모습은 섬뜩함을 넘어서 엄청난 공포감을 사람들에게 안겨 주었다.

노철은 미친 듯이 떠들었다.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공포와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턱 관절이 박살 났으니 제대로 된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그래도 떠들었다. 노철에겐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담호는 그런 노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담호는 오직 노철을 망가트리는 것만이 지상과제인 듯 섬세하게 힘 조절을 했고, 그 결과 노철은 죽지도 못했다.

“제……발 죽여…….”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제발…….”

“날 믿어. 넌 결코 쉽게 죽지 않을 거야.”

“나를 죽여…… 주시오. 그럼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줄 테니.”

“관심 없어.”

“아니, 분명 관심 있을 겁니다.”

담호의 눈빛이 변했다. 노철은 필사적이었다.

그가 담호의 귀에 무어라 말했다.

턱관절이 부서졌는데도 말을 한다. 비록 발음이 뭉개졌지만, 그래도 담호는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담호의 표정이 변했다.

눈빛은 차가워지고, 그를 둘러싼 공기가 한없이 무거워졌다. 방금 전에도 무서웠는데, 지금은 감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감히 캐물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말 내가 어떻게 믿지?”

“정말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합니다.”

“…….”

담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노철이 죽고 싶어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말이 담호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 사실이었다.

담호가 노철에게 물었다.

“죽고 싶어?”

“예!”

노철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정말 필사적이었다.

“너는 그래도 첫 번째라 이 정도에서 끝내는 거야. 다른 이들은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흐윽! 감사…….”

자신을 죽여준다는 것에 노철은 감격했다. 도박장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런 노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만일 자신들이 저와 같은 고문을 받았다면 마찬가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담호가 노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노철의 단단한 두개골이 마치 두부처럼 부서지며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됐어! 난 죽을 수 있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속에서도 노철은 담호의 방문을 받게 될 동료들을 걱정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자신이 먼저 죽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노철의 살아생전 마지막 생각이었다.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검은 장포는 노철이 흘린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상천의 눈알이 뒤루룩 굴러갔다.

그는 지금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도망갔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만들었다.

담호가 도상천을 바라봤다. 그 순간 도상천이 숨을 들이켰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담호의 눈동자엔 사람의 심혼을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도상천은 담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담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발을 절면서 담호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담호가 절름발이라고 비웃지 못했다.

쾅!

마침내 담호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아아!”

털썩!

그 직후 곳곳에서 안도 섞인 한숨과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제기랄!”

도상천도 다리에 힘이 빠져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담호가 나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놀랐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며 이성이 돌아왔다.

“노철 녀석이 한참을 떠들었던 것 같은데 뭐라고 한 거지?”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 노철의 말을 자세히 들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바탕 폭풍 같은 시간이 흐르자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대체 저 인간 백정은 누구지?”

“그 눈빛을 보았을 때 나는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다니까.”

사람들이 담호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하지만 도상천은 이미 담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얼마 전 극비리에 총타에서 전달된 강호인명록에 담호와 같은 자가 있었다.

‘신강혈성.’

다리를 저는 극강의 무인.

혼자의 힘으로 새외의 서천산장을 멸문시킨 자.

그 모든 것이 신강혈성을 수식하는 말들이었다.

솔직히 처음 그에 대한 정보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코웃음을 쳤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엔 담호의 극명한 특징을 보고도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담호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젠장! 이건 총타에서 준 정보가 오히려 반도 표현하지 못한 거잖아.’

종이에 쓰인 몇 글자만으로는 담호의 무서움을 표현할 수 없었다. 담호의 무서움은 직접 맞닥트려야만 알 수 있었다.

도상천은 이번 기회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차!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악양지부에 보고를 해야…….”

신강혈성의 무위가 사실이라고 드러난 이상 어서 총타에 보고를 해야 했다.

그가 급히 전서구가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밖으로 나온 담호가 흑귀에 올라탔다.

“가자.”

담호의 말을 알아들은 흑귀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흔들리는 말위에서 담호는 생각에 잠겼다.

노철을 죽인 사실 따위는 이미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불행히도 노철은 다른 이들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담호는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름 하나가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담가령.

그의 유일한 여동생. 항상 오빠를 따라 기어 다니던 조그만 아이.

이젠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예뻤던 것 같았다. 그리고 담호 자신도 그 아이를 무척이나 아꼈던 것이 분명했다.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사람들이 흔히 심장이라고 말하는 그 부분이었다. 인간의 감정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

서른일곱 명의 도적들이 마을에 들이닥치고, 집이 불에 탔다. 그리고 담가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불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오늘 노철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가령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아이가.’

흑호단을 이끌던 조윤산이 담가령을 끌고 갔다고 했다. 어린아이를 원하는 곳에 팔아넘기기 위해.

고통 없이 죽고 싶어 하는 거짓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노철의 말이 담호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십이 년 만에 그의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노철도 그 이후 담가령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 담호가 살던 마을을 약탈하고 얼마 후 조윤산이 흑호단을 해산했기 때문이다.

조윤산이 왜 흑호단을 해산했는지는 노철도 알지 못했다. 다행히 해산 직전 조윤산이 넉넉하게 돈을 나눠 줬기에 그동안 별 부족함이 살았다. 물론 도박을 하면서 그 돈을 모조리 날려 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새끼들아 잘 있거라. 난 더 큰 물에서 놀 테니까. 따라올 놈들만 따라와.

조윤산이 흑호단을 해산하는 자리에서 한 마지막 말이다.

더 큰 물이 무엇인지는 담호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것이다.

노철의 죽음은 겨우 그 시작에 불과했다.

담호의 심정을 느낀 것인지 흑귀가 미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거친 바람이 담호를 향해 몰아쳤고, 덕분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담호를 태운 흑귀가 향한 곳은 호남성 중부에 있는 형산(衡山)이었다. 동정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고, 상음현에서도 사흘을 더 말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흔히들 중원오악이라고 말한다. 중원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큰 산.

동악(東嶽) 태산(泰山).

서악(西嶽) 화산(華山).

북악(北嶽) 항산(恒山).

중악(中嶽) 숭산(嵩山).

마지막으로 남악(南嶽) 형산(衡山).

중원오악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형산은 수려한 풍경과 깊은 산세를 자랑했다.

형산의 수려한 풍경과 영기는 많은 이들을 끌어 모았다. 많은 이들이 형산 아래 터전을 잡았고, 그들 중에는 상당히 부유한 자들도 있었다.

안가장(安家莊)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십여 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안가장은 꽤나 안정적으로 발전을 해 왔다.

안가장의 주인은 안교익이라 했다.

이제 사십 대 후반의 장년인으로 넉넉한 인품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칭송이 자자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 줄 알았고, 그 덕에 대협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안교익의 명성 덕분에 안가장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안교익은 기꺼이 그들과 어울리기를 원했고, 장원 안에는 항상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안가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안교익은 기꺼이 그들과 어울렸다.

“그래서 천하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을 비우고, 시류에 휩쓸리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허허! 소대협의 식견에 이 안 모는 경탄을 금치 못하겠구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식객의 말에 안교익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내리치며 감탄했다.

안교익은 넉넉한 풍채와 후덕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와 마주한 채 열변을 토해내는 이의 이름은 소진풍.

형산 일대에서는 지자로 이름이 높았다.

소진풍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안 장주님과 이렇게 말이 잘 통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진즉에 찾아와 이렇게 술잔을 나눴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쭉 교분을 나누면 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술 석 잔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사양치 말고 받아주십시오.”

“어찌 제가 소대협의 술잔을 거부하겠습니까? 기꺼이 소 대협의 술잔을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진풍이 안교익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안교익은 연거푸 석잔을 마신 뒤 소진풍의 잔에도 술을 가득 따랐다.

“하하! 마음이 맞는 지기를 만났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쏜가?”

안교익이 큰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콰앙!

갑자기 안가장 정문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안가장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큰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무슨?”

안교익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무슨 일이냐?”

“치, 침입자입니다. 장주님.”

정문 쪽에서 수하가 달려와 보고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침입자라니, 무슨…….”

그 순간 담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누군지 모를 이들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양 주먹에서 선혈을 뚝뚝 흘리며 걸어오는 담호의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넌 누구냐?”

안교익보다 소진풍이 먼저 분노해 소리쳤다.

지자로 이름이 높았지만, 무공도 제법 높은 수준에 이른 소진풍이었다. 그는 안교익이 교분을 나눌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안교익을 해하려는 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담호의 눈은 소진풍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안교익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랜만이야.”

“우리가 본 적이 있던가? 나를 보러 왔으면 조용히 와도 되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나 보군.”

안교익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굳이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담호가 좋지 않은 의도로 왔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곧 기억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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