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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4장. 혈성이 움직이니 피바람이 불어온다(2)
방진보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눈앞에서 푸른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푸른 불길은 과자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지금!”
방진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듬어 놓은 각종 야채를 과자에 집어넣었다.
손목으로 과자를 움직이며 커다란 국자로 안에 담긴 야채를 휘저었다. 미리 칠해 놓은 기름이 야채와 섞이면서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잘게 다져 두었던 고기가 들어가자 냄새는 더욱 강렬해졌다. 방진보는 시간의 흐름도 잊고 무아지경에 빠진 채 요리를 했다.
방진보가 요리를 하던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들이 있었다.
다갈색 피부를 가진 여인이 코를 벌름거리면서 감탄사를 금치 못했다.
“후아! 정말 대단한데.”
“끝내주죠? 언니. 그런데 진짜는 지금부터예요.”
그녀의 곁에서 은소청이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호피 조끼를 입은 다갈색 피부의 여인은 바로 황혜령이었다.
“솔직히 네 말을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네.”
“그치? 천하제일루의 수석 숙수도 인정한 실력이라니까.”
은소청이 마치 자신이 인정을 받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에 황혜령이 미소를 지었다.
‘청매는 여전히 밝구나.’
은가보의 금지옥엽답지 않게 소탈한 풍모를 풍기는 은소청이었다. 그런 은소청의 모습에 반해 신분을 초월해 교분을 나누는 황혜령이었다.
지금 그녀들이 있는 곳은 바로 서풍객잔의 별채였다. 은소청이 별채 전체를 통째로 빌린 것이다. 그러고는 방진보를 납치하듯 별채로 데려왔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배고파!”
그것이 방진보가 별채에서 요리를 하는 이유였다.
“헤헤!”
은소청이 턱에 손을 괸 채 방진보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황혜령이 그런 은소청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밝고 활달한 은소청의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지만,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마음을 활짝 열고 있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흐음!”
황혜령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은소청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언니 혼자 이렇게 함부로 다녀도 되는 거예요?”
“상관없어.”
“하지만…….”
“괜찮아! 다들 정신이 없어서 내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을걸.”
황혜령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웃음이 짓궂게 느껴졌다.
그에 은소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전 녹림이 또 뒤집어지는 것 아니에요?”
“일광이 같이 왔으니까 괜찮아.”
황혜령이 말하는 일광은 그녀의 호위무사였다. 녹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인 것이다.
“하여간 언니도…….”
은소청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황혜령이 어떤 존재인지.
흔히들 강호라고 하면 구대문파나 오대세가로 대변되는 문파들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꼭 세간에 알려진 문파에서 무공을 익혀야만 강호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칼 밥을 먹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강호인이었고, 그 범주에는 녹림도들도 속했다.
흔히들 녹림도라고 하면 산에 있는 도적들을 떠올리고 우습게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일만 명이 넘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녹림십팔채(綠林十八砦).
현재 녹림을 지배하고 있는 산채들의 집합체였다. 열여덟 개의 산채는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각 산채마다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천 명이 넘는 인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비록 무공은 강호를 지배하는 문파들의 제자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압도적인 숫자를 무시할 수 있는 문파는 없었다.
무엇보다 녹림십팔채엔 총채주인 황경문이 존재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녹림에 투신한 황경문은 수십 년을 투쟁한 끝에 총채주 자리에 올랐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과 무공으로 일만 명 녹림도들을 문제없이 이끌었다.
황경문의 무공은 구대문파의 장로들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그에게 패왕도(覇王刀)라는 별호가 붙었을까?
녹림도를 우습게 보는 명문정파의 무인들도 황경문은 감히 비웃지 못했다.
황경문에겐 늘그막에 얻은 딸이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황혜령, 바로 은소청과 같이 있는 여인이었다.
황경문은 황혜령을 끔찍이도 아낀다고 했다. 만일 황혜령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황경문은 녹림십팔채 전체를 움직여 그녀에게 위해를 가한 자를 응징할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혜령은 은소청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방진보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 접시를 내왔다.
“자, 음식 다 만들었어요.”
“와아!”
접시에 가득 담겨 있는 음식에 은소청이 활짝 웃었다.
“맛있게 먹을게. 진보야.”
“고마워!”
두 여인이 젓가락을 들고 방진보가 만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 고기 연한 것 좀 봐.”
“이건 어떻게 맛을 낸 거지? 이런 건 처음 먹어 봐.”
방진보가 내온 음식은 바로 동파육이었다.
동파육이라면 황혜령도 질릴 만큼 먹어 본 음식이었다. 그 맛도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진보가 내놓은 동파육은 달랐다.
“어떻게 평범한 동파육이 이런 맛을 내지?”
“그야 숙수가 평범하지 않으니까.”
황혜령의 질문에 은소청이 간단히 답을 내놨다.
“그렇구나.”
“내가 후회하지 않을 거랬잖아.”
“정말 그렇네. 네 말대로 이곳에 머물길 잘한 것 같아.”
“응!”
은소청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저씨가 보이지 않네?”
“아저씨?”
“아, 진보와 함께 다니는 아저씨가 있거든. 근데 그 아저씨가 엄청 무서워.”
“그래?”
황혜령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녹림총채주의 딸로 워낙 거친 사람들과 함께 자라다보니 그녀는 두려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몰랐다.
실제로 그녀의 무공실력은 매우 뛰어나서 녹림도들 중에서도 당할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담호의 무력을 직접 본 은소청은 달랐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담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절실히 느꼈다.
“아저씨는?”
“일이 있다고 나갔어. 며칠 걸리실지도 모른대.”
“무슨 일?”
“그건 나도 몰라.”
방진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담호는 머지않아 돌아올 거라고 했지만, 처음으로 혼자 남게 된 방진보는 모든 것이 불안했다.
혹시 이러다가 담호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여러모로 심란했다.
은소청이 그런 방진보의 생각을 눈치채고 어깨를 두들겼다.
“걱정하지 마. 아저씨는 금방 돌아오실 거야.”
“그렇겠지?”
“그럼!”
방진보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형, 어서 돌아와요.’
형산에는 호남 오대문파 중 하나인 형산파(衡山派)가 존재했다.
최전성기에는 구대문파 못지않은 성세를 자랑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호남 오대문파에 들 정도로 세력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형산과 호남성 중서부의 패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이 일대에서 형산파를 무시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나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형산파의 문주 좌문효는 성격이 열화와 같기로 유명했다. 그는 특히나 자신의 사람을 끔찍이 챙겼는데, 일단 한 번 깊은 인연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커다란 대전 안엔 좌문효와 형산파의 장로들이 함께 모여 격렬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장문인, 지금과 같은 시기에 꼭 태황전(太皇殿)을 지으셔야겠습니까?”
“지금이 절호의 기회요. 태황전을 완성하면 본문의 건재함을 과시할 수도 있으니 더욱 많은 제자들을 모집할 수 있을 거요.”
“허나 재정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형산파의 장로 채규가 고개를 저었다.
채규는 형산파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 형산파의 재정은 거의 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좌문효는 새로 대전을 지을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대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대전을.
형산파의 위세를 과시함으로써 새로운 제자들을 대거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채규와 몇몇 장로들의 눈에는 그런 좌문효의 의지가 걱정스럽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재정은 걱정하지 마시오.”
“어떻게?”
“내 이미 우리를 지원하는 몇몇 유력 가문과 이야기를 해 두었소. 그들이 우리를 지원할 것이오.”
“하지만…….”
“재정적인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으니 여러 장로들은 더 이상 태황전을 짓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나 혼자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잖소. 모두가 형산파를 위한 일이오.”
“알……겠습니다.”
“휴!”
채규를 비롯한 장로들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좌문효의 말대로 재정적인 부담이 해결된 이상 무작정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거대한 전각을 지어 세를 과시하겠다니? 도대체 이 무슨 황당한 발상이란 말인가?’
문파의 흥망성쇠는 전각의 크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바로 문파를 이끌어가는 문주의 지도력과 철학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형산파가 이렇게 몰락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역대 문주들의 잘못된 정책 탓이 컸다. 무공이 가장 강한 자를 문주로 뽑다 보니 생긴 문제였다.
현재 형산파에서 가장 강한 자는 바로 문주인 좌문효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머리는 육체만큼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것이 형산파의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그렇게 채규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대전의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문주님.”
“무슨 일이냐?”
“지금 소진풍 대협이 와 있습니다.”
“소진풍이?”
좌문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진풍이라면 그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무공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강호에서의 평판이 좋아 능히 친분을 쌓아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좌문효는 소진풍과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왔다.
대전의 문을 열자 소진풍과 형산파의 무인이 보였다.
먼 길을 급히 달려온 듯 소진풍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연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진풍.”
“크, 큰일 났네. 안가장이 습격을 당했네.”
“안가장이?”
좌문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가장의 장주 안교익은 형산파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였다. 좌문효가 뜬금없이 태황전의 개축을 들고 나온 것은 안교익이 제법 큰돈을 후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 놈들이 감히 겁도 없이 안가장을 습격했단 말인가?”
“그게 한 명일세.”
“한 명?”
“그 한 명 때문에 안가장 전체가 초토화되었네. 겨우 나만 빠져나와 자네에게 알리러 온 것일세.”
“감히!”
좌문효의 눈에서 불길이 이는 듯했다.
이 일대에서 안가장이 형산파의 비호를 받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고서도 그러는 거라면 형산파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문도들을 소집하라. 바로 안가장으로 간다.”
“문주님! 하지만 좀 더 알아보고 움직이는 게…….”
“안가장을 무시하는 것은 곧 형산파를 모욕하는 것. 강호를 살아가는 자로서 어찌 이런 모욕을 참고 산단 말인가?”
좌문효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채규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휴!”
그의 한숨소리가 허망하게 울려 퍼졌다.
좌문효는 급한 대로 백여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형산파를 나섰다.
형산파에서 안가장까지의 거리는 불과 삼십여 리, 경공을 펼치면 반 시진도 안되어 도착할 거리였다.
실제로 좌문효와 형산파의 무인들은 반시진이 되기 전에 안가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안가장을 본 형산파 무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이 아는 안가장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정착한 이후 장주인 안교익이 심혈을 기울여 가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안가장은 예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장원 곳곳에는 마치 거대한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짓이겨진 시신들이 즐비했다.
호남 오대문파 중 하나인 형산파에 있었지만, 막상 그들이 시신을 직접 보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몇몇 무인들은 차마 시체를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렸다.
“놈은?”
좌문효가 급히 안가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한 구의 시신을.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네놈은 누구냐?”
좌문효의 노성이 안가장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