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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88화 (8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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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5장. 혼자 행하고 움직이는 자, 독행류(獨行流)(1)

좌문효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한 생명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좌문효는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절명하고 말았다.

“장문인!”

채규가 숨이 끊어진 좌문효를 부둥켜안았다.

살아남은 형산파의 무인들이 좌문효와 채규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크윽!”

“장문인!”

그들은 좌문효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담호를 노려봤다.

가벼운 마음으로 형산을 내려온 그들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장문인과 동문들을 잃을 줄 몰랐기에 그들이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다.

“놈을 죽여라.”

“장문인의 복수를 해야 한다.”

형산파의 무인들이 다시 담호를 향해 덤벼들려고 했다. 하지만 채규가 그들을 제지했다.

“모두 멈춰라.”

“장로님!”

“하지만 그는 장문인의 원수입니다.”

당연히 무인들이 반발했다. 하지만 채규는 완고했다.

“장로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명을 어기면 모두 파문하겠다.”

“크윽!”

극단적인 채규의 명령에 형산파의 무인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 하나 파문만큼 두려운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인들이 진정을 하자 채규가 좌문효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혈기왕성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하게 변한 좌문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장문인.”

채규는 좌문효의 눈을 감겨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차가운 분노가 담겨 있었다.

가슴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성은 참아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곳에 끌고 온 형산파의 제자 절반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고, 장문인조차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상대는 자신이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고수였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결코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분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냉철해야 했다.

자칫했다가는 장문인의 복수는커녕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제자들의 목숨도 잃을 수 있기에.

그에겐 현재 살아남은 제자들을 무사히 형산파로 돌려보낼 의무가 있었다.

“우리는 형산파로 돌아가겠소. 보내 주겠소?”

채규는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도 비굴하지 않았다. 그런 채규의 모습이 담호의 눈에 이질적으로 비쳤다.

“보내 주면?”

“전력을 재정비해 언젠가 당신에게 복수하겠소.”

“그런데 내가 왜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하지? 그냥 이곳에서 모두 죽이는 게 편할 텐데.”

“그러면 우리는 반항하지 않고 죽음을 달게 받을 테니까.”

“…….”

“반항하지 못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당신도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오. 당신과 같은 성격을 가진 자라면 더더욱.”

이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채규는 자신과 오십 명의 제자들, 그리고 형산파의 운명을 걸고 담호를 자극하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지만, 채규는 내색하지 않고 담호를 노려봤다.

지옥 같은 정적이 끝나고 마침내 담호의 입이 열렸다.

“형산파에는 당신 같은 장문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보내 주겠단 말이오?”

“보내 주지.”

“우리가 복수를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대했지만 예상을 벗어난 담호의 대답에 채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당신은 광인이 분명하구려.”

“그럴지도 모르지.”

담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일 채규가 아닌 다른 누군가 이런 말을 지껄였다면 단숨에 머리통을 부숴 버렸을 것이다.

채규는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자는 결코 흔치 않았다.

최소한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온 이후 그런 자를 본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 한 번은 채규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채규가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담호!”

“기억하겠소. 우리 형산파는 결코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오.”

“그래!”

“내 이름은 채규요. 꼭 기억하시오. 언젠가는 당신의 가슴에 검을 박을 테니까.”

“기대하지.”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다리를 절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기에 형산파 제자들이 양쪽으로 비켜섰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 담호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혼자 걷는 자…… 독행류.”

채규는 몰랐다.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이 담호의 암형권을 대신하는 이름이 될 것을.

독행류(獨行流).

담호는 혼자 걷고 있었다.

***

믿을 수 없는 소문이 호남성을 강타했다.

권(拳)을 쓰는 희대의 마인이 나타났다.

그는 악가장을 전멸시켰고, 형산파의 장문인도 죽였다.

공동파의 장문 제자인 남학이 그에게 패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눈 밖에 난 자를 살려 두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다.

신강혈성(新疆血星).

신강에서 나타난 핏빛 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별호로 불렀다.

권마(拳魔).

강호 역사상 그처럼 빠른 기간에 피 내음이 물씬 풍기는 별호를 얻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담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담호를 주제로 이야기하기 일쑤였다. 특히 담호가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호남성에서는 그의 이야기가 끊일 사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형산파의 혈사 이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

악양검문의 문주 사마경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손님들 때문이었다.

그의 앞엔 연남색 문사복을 입은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얼굴선과 눈매, 그리고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듯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그 모든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중년인의 이름은 남궁창, 남궁세가에서 나온 인물이었다.

사마경원은 남궁창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대세가의 일원인 남궁세가에서 나온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막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오대세가(五大世家).

산동성의 북경에 자리를 잡고 있는 황보세가.

안평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진주언가.

하북성의 맹주인 팽씨세가.

호북성의 제갈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휘성의 남궁세가.

천하에 산재한 수백, 수천 개의 무가(武家)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력과 영향력을 가진 다섯 개의 가문을 뜻했다.

하나하나가 수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 힘과 영향력은 결코 구대문파에 뒤지지 않았다.

구대문파 대부분이 중원 내륙에 위치한데 반해 오대세가는 동쪽 해안가에 치우쳐 존재했다.

그것은 중원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구대문파가 태동했던 시기에는 중원의 중심이 내륙이었다. 하지만 왕조가 몇 번을 바뀌면서 지금의 북경으로 천도를 했고, 인근의 해안 도시들이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오대세가들은 왕조의 북경 천도와 함께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고, 지금의 성세를 이뤘다.

그 때문에 구대문파를 전통의 강자, 오대세가를 신흥 강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남궁세가가 안휘성에 자리를 잡은 것은 삼백 년 전이었다. 그때도 무시 못 할 재력과 무력을 소유했었지만, 지금처럼 천하를 아우를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지금의 남궁세가는 구대문파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성장했고, 그들의 세력은 악양검문이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마경원이 남궁창을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궁창은 스스로를 남궁세가의 장로라고 소개했다.

그의 곁에는 준수한 외모의 젊은 청년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문사라고 믿을 만큼 새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남궁수, 강호에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기에 사마경원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사마경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궁세가의 장로께서 본문엔 어인 일로 오신 겁니까?”

“그 전에 이곳에 해남파의 해 소저가 머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남궁창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조근 조근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마경원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렇습니다만…….”

“그럼 어느 정도 언질을 받았겠군요.”

“그건?”

“해 소저의 말처럼 조만간 이곳에서 중요한 회합이 열릴 겁니다. 저는 미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온 것뿐입니다.”

“회합이라면?”

“그건 아직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남궁창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악양은 우리 악양검문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내 집 앞마당에서 회합을 하면서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워낙 사안이 중대해서 그럽니다. 사마 문주님께서 조금만 양해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사마경원은 남궁창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건 손님이 주인집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마당을 마음대로 사용할 테니 너희는 상관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격이었다.

문제는 강호가 힘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오대세가의 일원인 남궁세가에서 사전 작업을 하러 올 정도라면 회합에 올 다른 이들은 또 얼마나 거물이란 말인가?

“그럼 누가 오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오대세가.”

“으음!”

“구대문파.”

“헉!”

남궁창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마경원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갔다.

오대세가와 구대문파의 회합이라면 그가 어떻게 비벼 볼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 중 하나에만 밉보여도 악양검문은 그날로 세상에 사라진다.

“그리고 해남파까지. 일단은 이곳에 중요 인사들이 온다고만 알고 계시면 될 겁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전체가 온단 말입니까?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맞습니다. 워낙 큰 사안을 의논해야 하는지라 중립지대인 이곳에서 회합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으음!”

사마경원은 할 말을 잃었다.

말이 중립지대였지, 이곳에도 문파들은 존재한다. 악양검문이 대표적이었고, 의선문 같은 호남 오대문파도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도 저들이 중립지대 운운하는 것은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 기존의 문파들을 우습게 보기 때문이다.

남궁창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악양검문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꼭 도움을 주실 거라고 믿고 부탁드립니다.”

말이 부탁이었지, 그 안의 내용을 보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악양검문이 저들의 협박을 거절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으음!”

사마경원이 침음성을 흘렸고, 남궁창은 미소를 지었다.

남궁창은 알고 있었다.

사마경원이 절대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강호는 힘이 가진 자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지금 강호를 아우를 정도의 힘을 가진 자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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