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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5장. 혼자 행하고 움직이는 자, 독행류(獨行流)(2)
해소월이 고개를 들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청명한 하늘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악양검문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악양검문 내에서만 머물다 보니 어느 정도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곳에서만 지내다 보니 바깥세상의 소식에 어두웠다. 그녀는 조만간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있었으면 사마경원의 체면은 어느 정도 세워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 후원에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후원 입구에 낯선 두 사람이 보였다. 연남색 문사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와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해소월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예사롭지 않은 기도 때문이었다.
중년인의 기도도 범상치 않았지만, 젊은 청년의 기세는 그녀를 긴장시킬 만큼 날카로웠다. 마치 잘 벼려진 검처럼.
이런 기도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때 중년인이 해소월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네, 해 소저. 우린 남궁세가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네.”
“남궁세가?”
“그렇다네. 나는 남궁세가의 장로인 남궁창이라고 하네.”
“해남검문의 해소월이 남궁 장로님을 뵙습니다.”
남궁창의 소개에 화들짝 놀란 해소월이 급히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남궁창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해 소저를 만나서 반갑네. 이쪽은 본가의 기재인 남궁수라고 하네.”
“남궁세가의 남궁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해 소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남궁 소협.”
남궁수와 해소월이 포권을 취했다.
남궁창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소월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남궁창이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무게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부 능천월은 동정호에 가서 만날 사람들 중에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로 바로 남궁창을 꼽았다.
왜냐고 묻는 해소월에게 능천월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남궁창이 남궁세가 내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남궁창을 아는 자들은 모두 그를 좌망천리안이라고 부른다.
좌망천리안(座盳千里眼).
앉아서 천 리를 보는 눈을 가진 자.
어떻게 보면 현재 남궁세가가 이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남궁창 때문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는 남궁천이라는 대검호(大劍豪)였다. 그는 남궁세가에서 이백 년 만에 제왕검형(帝王劍形)을 완성한 위대한 무인이었다.
남궁천은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분명했지만,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무공일도(武功一道)뿐.
그런 남궁천을 대신해 남궁세가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이가 바로 남궁창이었다.
남궁세가의 이인자이자 살림꾼이면서 머리 좋은 책사. 그러면서도 세상엔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감춘 은둔자였다.
그런 남궁창이 세상에 나왔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해소월은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이곳에서 벌어진 회합이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해소월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자 남궁창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해 소저는 좋은 사람이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해 소저 정도의 무인이 사마 문주의 체면을 생각해 이곳에 머물기에 하는 말일세. 거절을 해도 사마 문주는 아무런 말을 못 했을 텐데.”
“그건…….”
“나에게 굳이 해명할 필요 없네. 해 소저 덕분에 그에게 지금의 사정을 쉽게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중요한 회합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줬다네. 그 사람의 체면을 충분히 살려 준 셈이지. 그러니 이제 굳이 해 소저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다네. 우리와 함께 가세나.”
“그래도 되나요?”
“자네가 진천뢰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증명해 줘야 하네. 이곳에선 할 수 없는 일이지.”
“알겠어요.”
“잘 생각했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자네 사숙과 만나기로 했으니.”
“사숙 말인가요?”
“그렇다네! 자네의 사숙인 오군의는 나의 오랜 친구이지.”
백경검객(白鯨劍客) 오군의.
해남파의 장로이자 중원 남부에서 이름 높은 검객이었다.
“사숙이 직접 오십니까?”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지. 어쨌거나 자네를 이곳에 놔두고 그 친구를 만나기가 뭐해서 말이야. 우리와 함께 가세. 아마 사마 문주도 더 이상 자네가 이곳에 있길 청하지 않을 걸세.”
“알겠습니다.”
해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창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충분히 사마경원의 체면을 챙겨줬으니까.
“짐은?”
“이 검 한 자루면 충분해요.”
해소월이 애검 벽상을 들어보였다. 그에 남궁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이상은 필요 없을 것 같군.”
남궁창이 문득 남궁수를 바라봤다.
“수야!”
“예! 숙부님.”
“너도 해 소저의 저런 마음가짐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남궁수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수긍했다. 그런 남궁수의 모습이 해소월의 눈길을 끌었다.
남궁수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결코 그녀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런 기도를 가진 자가 타인을 본받으라는 말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수긍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남궁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런 자라면 이름이 알려졌을 법한데 해소월은 단 한 번도 남궁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수는 매우 오랫동안 폐관수련을 했지. 때문에 본가에서도 그를 아는 자가 많지 않다네.”
“…….”
“나를 따라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보니 아는 게 많지 않다네. 그러니 해 소저가 많은 도움을 줬으면 좋겠군.”
“제가 도움이 된다면요.”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네.”
남궁창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자네들은 좋은 인연이 될 걸세. 자네 사숙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해소월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악양검문을 나왔다.
남궁창의 확신대로 사마경원은 더 이상 해소월을 붙잡지 않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동정호 근처에 있는 남강객잔이라는 곳이었다. 남강객잔 역시 서풍객잔 못지않게 규모가 크고 깨끗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남강객잔은 대낮부터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탁자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굳이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
“그러니까 신강혈성이 서천산장에서 혈겁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사실이고말고. 홍암산장의 장주도 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군.”
“거참! 신강혈성이라니. 피 냄새가 흠뻑 풍기는 별호로군.”
“형산파의 문주가 죽은 이후로는 권마라고도 불린다는군.”
“휘유!”
거의 대부분의 탁자에서 담호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지고 있었다.
들려오는 단어는 온통 신강혈성, 혹은 권마에 관한 것이었다.
남궁수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강호에 마인이 출현한 모양이군요.”
“가끔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가 나타나곤 하지.”
남궁창의 대답에 남궁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운이 나쁘군요. 하필 이곳에 나타나다니.”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회합이 멀지 않았다. 강호를 지배하는 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마인이 설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궁창이 남궁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경험 삼아 그를 상대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를 상대할 기회가 된다면 전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 기대가 되는구나.”
남궁창의 힘찬 대답에 남궁수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신제(四神帝)가 은거한 지 벌써 삼십여 년. 믿을 것은 오직 맹의 창설뿐.’
***
“휴!”
방진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호가 객잔을 떠난 지도 벌써 닷새째였다. 돌아올 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무사히 돌아오겠지.”
방진보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산책이나 해야겠다.”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방진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잠시 들어가도 될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진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목소리의 주인이 은소청이었기 때문이다.
“들어와.”
방진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은소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염소수염을 기른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 바로 천하제일루의 수석 숙수인 도학경이었다.
“어르신이 여긴 어떻게?”
방진보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비록 천하제일루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도학경은 대선배이자 존경할 만한 숙수였다.
“안에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어서 들어오세요.”
도학경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고, 은소청이 차분히 뒤를 따랐다.
은소청이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도 숙수님이 너를 보고 싶다고 해서.”
“아니야. 난 괜찮아.”
“아저씨는?”
“아직 안 돌아왔어.”
“그래? 네가 힘들겠구나.”
“아니야.”
방진보의 대답에 은소청이 미소를 지었다.
불안할 만도 하건만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는 방진보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방진보의 시선이 도학경을 향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거리도 먼데.”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직접 찾아왔다.”
“저에게요?”
“그래!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천하제일루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느냐?”
“예?”
방진보가 두 눈을 소처럼 끔뻑거렸다. 순간적으로 도학경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학경이 그런 방진보를 보며 혀를 찼다.
“쯧! 네놈에게 천하제일루에 들어오란 제안을 하는 거다. 이 도학경이 직접.”
“그, 그게…….”
“네가 돌아가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해 봤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예전 같지가 않아. 천향초를 사용한 것이 그 증거지. 한창때였으면 천향초 따위의 향신료에 의지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은퇴하려고 보니 천하제일루에 제대로 된 숙수가 없어. 다 고만고만한 녀석들뿐인 거야.”
본래 큰 나무가 자리를 잡으면 주위에 다른 나무가 제대로 자라기 힘든 법이다. 천하제일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학경이라는 거목이 존재함으로써 커다란 명성을 얻었지만, 반대로 그가 존재함으로써 다른 숙수들이 만족할 만큼 크지 못했다.
지금 도학경이 은퇴를 하면 천하제일루의 몰락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도학경은 고민 끝에 방진보를 찾아왔다.
천향초를 사용한 것을 알아챈 방진보의 재능이라면 분명 훌륭한 숙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초가 탄탄한 데다가 나이도 어렸다.
도학경의 밑에서 몇 년 만 제대로 수행하면 분명 훌륭한 숙수가 될 것이다.
“어떻게 생각이 있느냐?”
“그, 그게…….”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방진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천향초를 사용해서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도학경의 실력은 진짜였다. 그에게서 음식을 배운다면 방진보는 분명 크게 성장할 것이다.
아마 아비가 살아 있었다면 무조건 천하제일루에서 수행하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진보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형이 오면 한번 의논해 볼게요.”
“내 너에게 강요는 하진 않겠다. 하지만 천하제일루에서 수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에겐 분명 큰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부디 잘 생각해 보거라.”
“네!”
방진보의 가슴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