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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90화 (9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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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5장. 혼자 행하고 움직이는 자, 독행류(獨行流)(3)

도학경이 돌아가고 은소청이 홀로 남았다.

은소청이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뭐가?”

“숙부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숙부라면 의선문의?”

“응!”

“그분이 왜?”

“아저씨 때문이야.”

“형?”

“그래!”

은소청의 대답에 방진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저씨 때문이야.”

“…….”

“모르고 있었구나. 지금 밖은 아저씨의 소문으로 떠들썩해. 특히 이곳 호남성은 난리도 아니야. 몇몇 문파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왜?”

“아저씨를 영입하면 그만큼 문파의 힘이 커질 테니까.”

“휴! 정말 형을 모르는구나. 형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갈 사람이 아니야.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형이 아니지.”

방진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은소청도 방진보의 의견에 동의를 했다. 겨우 두어 번을 봤을 뿐이지만, 담호가 누군가의 밑에서 명령을 듣는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완벽한 독불장군.

은소청이 본 담호의 모습은 그와 같았다.

그러나 숙부인 심우원의 생각은 그녀와는 달랐다. 이미 담호에게 한번 망신을 당했으면서도 그를 영입할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그 연결 고리가 바로 너야. 그래서 숙수님이 찾아온 거고. 하지만 너의 요리 솜씨를 인정한 것도 분명하지.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그렇구나.”

방진보는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도학경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기뻤는데, 그것이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것이라니 힘이 쫙 빠졌다.

은소청이 그런 방진보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길 거야. 아저씨의 명성은 이미 천하를 울리고 있고, 그와의 연결 고리는 너뿐이니까.”

“휴!”

“지금은 힘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

“고마워!”

“별말씀을. 우린 친구잖아.”

“친구?”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너는?”

“나, 나도 친구라고 생각해.”

방진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까지 빨개진 방진보를 보며 은소청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은소청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어서 아저씨가 왔으면 좋겠다.”

“왜?”

“지금 동정호 인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 얼마 전부터 많은 무인들이 유입되고 있어.”

“동정호는 원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잖아.”

“이번엔 조금 달라.”

“뭐가?”

“현재 동정호 인근에 있는 대부분의 객잔들을 무인들이 예약했어. 천하제일루 같은 경우 너무 비싸서 잘 나가지 않는 별채까지 무당파의 무인들이 통째로 빌린 상태야.”

“무당파라면 엄청 대단한 곳이잖아?”

“맞아! 소림사와 더불어 구대문파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 그런 곳에서 사람을 보내 미리 별채들을 예약했어. 그만큼 무당파에서도 대단한 사람들이 온다는 증거야.”

“으음!”

방진보가 침음성을 흘렸다.

강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방진보였지만 무당파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일반 사람들에게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같은 거대 문파의 무인들은 아득히 먼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동정호로 들어오고 있다니 절로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 때문에 은가보에서도 난리가 났어. 의선문도 그렇고, 악양검문도 발칵 뒤집혔지.”

“그들이 무엇 때문에 동정호로 들어오는지는 모르고?”

“그걸 알면 이 난리일까? 구대문파가 기침을 하면 전 중원이 몸살을 앓는다고.”

은소청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방진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참, 그 누나는?”

“누구? 아, 혜령 언니.”

“보이지 않네.”

“당분간 이곳에 없을 거야. 그 언니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것 때문에 나왔다가 잠깐 나를 보러 온 것뿐이야.”

“다들 바쁘게 사네.

“사는 게 원래 그렇지, 뭐.”

“휴!”

방진보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은소청이 방진보를 빤히 바라봤다. 방진보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소청은 그 후로도 한참을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혼자 남은 방진보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도학경과 은소청의 방문으로 괜히 생각만 많아졌다.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지?”

언제까지 담호만 따라다닐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담호가 데려다주기로 한 곳도 바로 이곳 동정호까지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는 순전히 방진보의 몫이었다.

방진보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뚝뚝!

피가 담호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두 방울씩 떨어진 피는 금세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붉디붉은 흔적만큼은 선명하게 남았다.

담호의 시선은 반쯤 무너진 벽을 향해 있었다. 돌을 쌓아 만든 담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처박혀 있었다.

“쿨럭!”

남자가 피를 토해 냈다. 한바탕 피를 토해 낸 남자가 겨우 고개를 들어 담호를 올려다보았다.

“그 꼬맹이가 괴물이 되었구나.”

남자의 이름은 고상경, 예전 흑호단의 일원이었단 자였다.

흑호단의 해산 후 이곳 악록산(岳麓山)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흑호단에 있으면서 꽤 많은 재산을 모았기에 나름 지역 유지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에게 사신이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반 시진 전의 일이었다.

온통 검은 일색의 복장을 한 절름발이.

처음엔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비웃음이 경악으로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딱 반 시진이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식솔들이 모두 주검으로 변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웃음과 생기가 넘쳐흐르던 저택엔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다.

고상경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꼭 그들까지 모조리 죽여야 했느냐? 네놈은 정녕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구나.”

“그러니까 말했잖아. 덤비지 말라고.”

“크윽!”

“경고를 무시한 것은 저들이었어.”

고상경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꽤 많은 무인들을 고용했다. 아무래도 찔리는 구석이 많다 보니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그들은 고상경을 지키기 위해 담호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처참한 결과가 나왔다.

담호가 고상경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고상경이 고개를 돌려 담호의 눈을 피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지만, 담호의 눈을 보는 것은 죽음보다도 두려웠다. 생애 마지막 순간에 담호의 눈빛을 담고 가는 것은 너무나 끔찍했다. 그 정도로 고상경은 담호가 두려웠다.

담호가 그런 고상경의 턱을 손으로 잡고 억지로 자신을 보게 했다.

“크윽!”

“조윤산, 어디 있지?”

“모른다니까. 그와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십 수 년이 지났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순간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퍼석!

“끄으악!”

고상경의 새끼손가락이 으스러졌다. 커다란 쇠망치에 맞은 것처럼 뼈가 부스러지고, 근육이 짓이겨졌다.

평생 처음 경험하는 고통에 고상경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담호는 그런 고상경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담호가 다시 고상경의 약지를 으스러트렸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극한의 고통에 고상경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담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그의 손가락뼈를 부숴 나갔다.

고상경은 죽어라 비명을 지르고 애원했다.

그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담호는 고상경이 마음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턱관절을 뽑아 혀를 깨물지 못하게 만들었고, 내공 또한 금제를 가해 심맥을 터트릴 수 없게 만들었다.

“끄억!”

결국 고상경은 죽어라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상경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의 손과 발은 마치 거대한 바위 사이에 낀 것처럼 압착되어 있었다.

이젠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떠한 감각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고상경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마치 머리만 존재하는 듯한 아찔한 부유감과 고립감에 고상경은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 죽여 줘.”

“조윤산, 어디 있지?”

“모, 몰라. 나는 정말 몰라.”

“놈을 찾을 방법은?”

“몰라! 흐어엉! 정말 모른다구.”

고상경이 눈물을 흘렸다.

담호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고상경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말할 내용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문제는 고상경을 끝으로 조윤산으로 연결되는 고리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담호가 중얼거렸다.

“운이 좋군.”

순간 고상경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 그의 두 눈엔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조윤산을 향해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담호의 눈빛에 어린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고상경이 애원했다.

“이젠 죽여 줘. 제발…….”

담호가 고상경의 목에 발을 올렸다. 그 차가우면서도 섬뜩한 감촉에 고상경이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죽을 수 있어. 난 죽을 수 있다구.’

우두둑!

자신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 그것이 고상경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담호는 혀를 길게 내민 고상경의 시신을 잠시 바라봤다.

이로써 조윤산과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겼다. 하지만 담호는 실망하지 않았다.

놈이 큰물에서 놀고자 한다면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강호(江湖).

무인에게 그보다 큰물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담호가 밖으로 나와 흑귀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흑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달린 지 두 시진 만에 망성(望城)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망성은 동정호 하류와 이어진 강가에 위치한 조그만 현이었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동정호가 금방이었다.

담호는 선착장에 서서 배가 오길 기다렸다.

한 반 시진 정도 기다렸을까? 선착장으로 배가 들어왔다. 동정호를 오가는 운마도강선이었다.

담호는 운마도강선의 일층에 흑귀를 매어 둔 후 갑판으로 올랐다. 갑판에는 이미 선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담호가 선객들을 지나쳐 갈 때였다.

“동정호의 풍경이 일품이라더니 과연 헛된 소문이 아니었구나. 오도천지시리(吾盜天地時利)라. 나는 하늘과 땅의 시간, 이로움을 훔쳐 즐기고 있구나.”

선객들 사이에서 문득 흥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낯설지가 않았다. 담호가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 역시 담호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게 누구야?”

담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샛별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는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은 바로 초연운이었다.

홍암산장에서 헤어진 이후 잊어버렸는데, 설마 수천 리 떨어진 이곳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초연운도 담호를 만난 것이 뜻밖이었는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담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반갑네, 친구.”

어느새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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