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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91화 (9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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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6장. 세상은 넓지만,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1)

겨우 단 한 번의 만남이었고, 그마저도 꽤 오래전의 일이라 서먹할 만도 하건만 초연운은 마치 어제 헤어지고 금방 만나는 사람처럼 담호에게 편하게 다가왔다.

초연운이 담호에게 술병을 건넸다.

담호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자 초연운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쭉 들이켜. 독은 들어 있지 않으니까.”

담호가 초연운을 빤히 바라봤다.

보통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워서 마주치지 못할 눈빛을 초연운은 태연하게 받아 냈다. 그런 초연운의 눈빛엔 한 점의 사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초연운이 다시 한 번 술병을 권했다.

“자네 몸에서 피 냄새가 진동해. 마시면 조금이나마 희석될 거야.”

그제야 담호가 술병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에 초연운이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도 남을 믿지 않는 친구군.’

담호의 성향은 예전에 홍암산장에서 만났을 때 이미 파악했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담호의 그런 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참 한결같다고 할 수 있었다.

담호가 술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

독한 술이 식도를 짜릿하게 자극했다.

“안주는 이걸로 하고.”

초연운이 품에서 육포를 하나 꺼내 담호에게 건넸다. 담호는 말없이 육포를 받아 들었다.

초연운이 묵묵히 육포를 씹는 담호를 보며 웃었다.

“좋지 않나?”

“…….”

“하늘엔 구름이 떠가고, 강에는 우리가 탄 배가 떠가고 있어. 맛 좋은 술이 있고, 함께 마실 친구가 있으니 이것이 천상의 즐거움이지.”

초연운이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흥얼거렸다.

담호는 그런 초연운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감성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뭐라 말하지 않았다.

“저 흐르는 강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으니.”

초연운이 허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그가 어찌나 술을 맛있게 마시는지 곁에 있던 담호도 쓰기만 한 술이 맛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담호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좀 전보다 순하게 느껴졌다.

문득 현소 진인이 떠올랐다.

초연운과 사부인 현소 진인은 여러모로 달랐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분위기까지 하나도 닮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초연운을 보면 이상하게 현소 진인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단 한 가지, 바로 술을 좋아한다는 것뿐이다.

담호가 물었다.

“동정호가 목적지인가?”

“정확히는 원강이라 할 수 있지.”

“원강?”

“천하제일루가 있는 곳이야. 조만간 그곳에서 중요한 회합이 벌어질 예정이라서 말이지.”

“무슨 말이지? 회합이라니?”

“아, 자네는 모르겠군. 조만간 그곳에서 무림 명문의 중요 인물들이 모일 거야.”

“왜?”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야. 그곳에서 꽤 중요한 안건이 다뤄질 예정이라는 것. 그 때문에 원강뿐 아니라 동정호와 호남성 전체가 들썩이고 있어. 뭐, 친구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중요 인물이 온다고?”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서도 사람들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어. 그 정도면 강호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오는 셈이지.”

담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구대문파의 주요 인물들이 온다면 화산파에서도 사람을 보내올 것이다.

십이 년 전에 인연이 끊어진 화산파였지만, 그래도 현소 진인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이었다.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 담호였지만 이번엔 가슴이 조금은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마음일 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여전히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초연운이 그런 담호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자네도 참 어지간하군.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어도 좋을 텐데 말이야.”

“…….”

“뭐, 상관없겠지. 천성이 어디로는 가는 것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자네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더군.”

“명성?”

“모르고 있었나? 지금 호남성은 자네 때문에 꽤 시끄러운데.”

“…….”

“신강혈성, 권마. 모두 자네를 가리키는 단어야.”

그래도 담호가 모르는 듯하자 초연운이 쓴 웃음을 지었다.

“원래 주위 사람만 떠들썩하고, 본인은 모르는 것이 소문의 주인공이지. 지금 자네는 호남성을 넘어서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네. 뭐, 썩 달가운 소문은 아니겠지만.”

초연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본 담호는 결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의지를 꺾을 남자가 아니었다. 또한 주위의 평가에 신경을 쓸 사람도 아니었다.

일단 한번 행로를 정하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가는 그런 부류였다.

필연적으로 적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담호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피를 보다가는 강호의 공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당장이야 중요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어서 담호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지만, 분명 언젠가는 문제 삼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여론이 형성되면 강호의 공적으로 몰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기 십상이지.’

초연운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초연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호는 말없이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을 태운 배는 다음 선착장에 도착했다. 담호가 탔던 곳과 달리 다음 선착장에는 꽤 많은 이들이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선착장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독 돋보이는 세 명이 있었다.

하나같이 훤칠한 용모에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이 남 일 녀.

남자들 중 한 명은 덩치가 무척 컸고, 그에 걸맞은 솥뚜껑같이 큰 주먹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주먹에 맞았다가는 뼈조차 추리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한 명의 남자는 다부진 체격에 허리에 찬 커다란 도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그의 눈매는 매서웠고, 꽉 다문 입술은 고집스럽게 보였다.

마지막 여인은 자주색 경장을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제비처럼 늘씬한 몸매에 상큼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덩치 큰 남자가 배에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쯧! 한나절을 기다려서야 배를 타다니.”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큰 목소리였다. 마치 동종이 울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배에 타고 있던 선객들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뒤따라 올라온 도를 찬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추게. 배에 탄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가?”

“쳇! 원래부터 목소리가 이따윈데 어쩌라구?”

거한이 눈을 부라리자 배에 타고 있던 선객들이 분분히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두어 개는 큰 덩치와 우렁찬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무인이라는 사실을.

자주색 경장을 입은 여인이 마지막으로 배에 오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황보 오라버니의 목소리 우렁찬 것은 알아주어야 한다니까요. 귀 아파 죽겠네.”

“원래부터 타고난 걸 어떻게 하라고?”

“알아요. 안다구요. 그래도 조금만 낮춰 보도록 노력해 보라고요.”

“하여간 나만 죽일 놈이지.”

거한이 투덜거렸다.

그에 자주색 경장을 입은 여인과 커다란 도를 허리에 찬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거한의 이름은 황보영천이었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황보세가의 직계 혈족 중 한 명이었다.

황복세가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강맹한 권공으로 유명했는데, 황보영천 또한 황보세가의 진신절기를 익혀 매우 튼튼한 육체와 강력한 권을 익히고 있었다.

허리에 도를 찬 남자의 이름은 팽만영. 그 역시 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직계 혈족이었다.

팽가는 대대로 남자들이 많이 태어났다. 팽가의 혈족은 대부분 성격이 급하고 호전적이었다. 그들의 성향은 무공에도 영향을 끼쳐, 팽가의 무공 대부분은 살상력이 매우 강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였다. 팽가의 직계 혈족이라면 무조건 익혀야 하는 도법이 바로 오호단문도였다.

팽만영 역시 오호단문도를 꽤 높은 수준으로 익힌 무인이었다.

황보영천, 팽만영과 동행하는 여인의 이름은 언수화였다.

그녀 역시 오대세가 중 하나인 진주언가의 일원이었다. 황보세가와 마찬가지로 산동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진주언가는 단순한 무가가 아니었다.

진주언가가 다른 오대세가들과 가장 차별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천하제일의 거부라는 것이다.

진주언가는 대대로 상단의 운용에 주력을 했고, 그 결과 천하에서 가장 큰 상단과 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보광상단과 보광표국, 천하에서 제일 크다는 상단과 표국이었다. 그들이 한 해에 벌어들이는 돈은 가히 천문학적이었고, 그렇게 번 돈은 모두 진주언가로 유입된다.

비록 무공으로는 다른 오대세가들에게 뒤질지 모르지만 재력만큼은 천하제일인 곳이 바로 진주언가였다.

언수화는 그런 진주언가의 직계 혈족이었다.

하북팽가와 진주언가, 그리고 황보세가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왕래가 잦았다.

세 사람 또한 가문끼리 교류가 잦다보니 절로 친하게 된 사이였다. 그들 역시 이번에 동정호에서 열리는 중요한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가문의 어른들, 그리고 수행원들과 함께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랜만의 자유를 즐길 수 없기에 세 사람만 따로 빠져나온 것이다.

비슷한 또래끼리 움직이다 보니 즐겁기도 했지만, 문제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황보영천이었다.

황보영천은 커다란 덩치를 자랑이라도 하듯 다른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었다.

그런 황보영천과 함께 먼 길을 가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곳으로 오는 동안 팽만영과 언수화가 느낀 피로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배 위에 오른 후에도 황보영천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에 팽만영과 언수화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그들도 지친 것이다.

‘앞으로는 황보세가의 무인들과 여행하는 것은 사양해야겠군.’

팽만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갑판에 앉았다.

그래도 동정호가 머지않았다는 것이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그들이 동정호에 도착할 때쯤이면 가문의 어른들도 비슷하게 도착할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회합이기에 이렇게 극비를 유지하는 거지?’

팽만영도 회합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정작 왜 이렇게 은밀하게 회합을 하는 것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팽만영이 한참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입을 닥치고 있으라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 주십사 하고.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 하셔서……”

“그게 그 말이 아니냐? 건방지게!”

머지않은 곳에서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팽만영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또 시작이군.’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있어 왔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모두 팽만영의 몫이었다.

고개를 드니 황보영천이 선원의 멱살을 잡고 쥐 잡듯 닦달하는 모습이 보였다. 꽤 거칠어 보이는 선원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선원도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에겐 평범한 사람보다 못했다. 하물며 상대는 황보세가의 고수였다.

선원의 말이 먹힐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황보영천의 커다란 주먹이 눈앞에서 아른거릴 때마다 선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솥뚜껑보다 큰 손에는 굳은살마저 단단히 박여서 커다란 망치를 연상케 했다.

그런 주먹에 한대 맞으면 뼈조차 추리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내가 우습게 보였냐? 엉!”

황보영천이 인상을 팍 쓰자 선원의 얼굴이 불쌍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의 죄라면 선장을 대신해 말을 전한 것뿐이다.

그때 그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게, 영천.”

“그래요. 황보 오라버니.”

팽만영과 언수화였다.

두 사람이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황보영천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들었잖아? 저 자식이 지금 나를 무시했다고.”

“그는 자네를 무시한 게 아니네. 그저 자신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지.”

“맞아요. 그러니까 불쌍한 사람의 멱살은 놓아주라구요.”

팽만영과 언수화의 말에 황보영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선원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었지만, 팽만영과 언수화의 말을 이대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 너,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결국 황보영천이 선원의 멱살을 풀어 주었다. 그제야 선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칠비칠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러자 황보영천이 꽥 소리를 질렀다.

“뭘 봐? 이 개새끼들아. 어디 구경났어?”

웅웅!

동종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분분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반응은 달랐다.

“개새끼라.”

초연운이 황보영천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뿐 아니라 부모까지 싸잡아하는 욕이었다. 비록 그 대상이 불특정다수를 향한 것이라지만, 그 안에 자신이 속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초연운이 들고 있던 술병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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