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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6장. 세상은 넓지만,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3)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배에서 내렸고, 그중에는 담호와 흑귀도 있었다.
담호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초연운과 팽만영 등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비무대로 강가의 공터를 선택했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관심도 없었다. 황보영천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 갑판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담호는 서둘러 서풍객잔으로 향했다.
“형!”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방진보가 두 팔을 벌려 맞아 주었다. 그는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잘 있었느냐?”
“보다시피 끄떡없어요. 형은 갔던 일 잘되었어요?”
“잘됐다.”
“다행이다. 헤헤!”
방진보가 애써 웃었다.
담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느냐?”
“아니요.”
“말하거라.”
하루 이틀 봐 온 사이가 아니었다. 방진보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담호였다.
담호의 강렬한 눈빛에 방진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그는 도학경의 제안과 은소청이 했던 말까지 모두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방진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담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도학경의 제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은소청의 말처럼 방진보를 찾아오는 이들이 더욱 꼬일 것이다. 어쩌면 좋은 의도보다는 좋지 않은 의도로 찾아오는 이들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이젠 방진보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때였다.
“너의 생각은 어떻느냐?”
“저는…….”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테니까.”
담호의 말에 방진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없는 동안 방진보는 많은 고민을 했다. 도학경의 방문은 그의 고민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방진보가 고개를 들어 담호를 바라봤다.
“그냥요…….”
“…….”
“그냥 형 따라다니면 안 돼요? 계속 형 따라다니고 싶어요.”
“보았다시피 내 곁에 있으면 위험하다. 그래도 좋으냐?”
“상관없어요. 그냥 전 형을 따라다니면서 요리를 배우고 싶어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담호는 말없이 방진보를 바라봤다.
무공을 익힌 고수들도 감히 마주치길 꺼려하는 담호의 눈빛을 방진보는 피하지 않았다.
담호는 방진보의 간절한 눈빛에서 굳은 결의와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보았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안 해요. 절대로……. 그냥 형 따라다니게만 해 줘요. 신경 쓰이지 않게 잘 처신할게요. 제발!”
“알았다. 같이 가자.”
“정말요?”
“그래!”
담호의 대답이 떨어지자 방진보의 불안하기만 했던 얼굴에 미소가 조금씩 피어났다.
그는 담호가 두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한 번 말을 내뱉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지키는 사람이 바로 담호였다.
“고마워요, 형.”
담호는 말없이 방진보의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그러자 방진보의 미소가 웃음으로 번졌다.
“참, 형 배고프지 않으세요?”
“약간은…….”
“헤헤! 잘되었네요. 마침 별채에 가서 요리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거든요.”
“별채?”
“소청이 사 먹는 밥은 맛이 없다고 자꾸 해 달라고 해서…….”
방진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앞장섰다. 담호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별채에 들어서자 은소청이 맞이했다.
“어서 와! 늦었잖아. 배가 고파서…… 아, 아저씨!”
은소청이 뒤늦게 방진보의 뒤를 따라오는 담호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돌아오셨어요?”
“방금!”
“잘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진보가 불안해했었는데. 지금 이곳은 매우 불안하거든요.”
“왜지?”
“근래 들어 강호인들의 유입이 눈에 띄게 늘었거든요. 개중에는 거물들도 다수 있어요. 그래서 호남 무림인들은 불안해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거물?”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라면 충분히 거물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요?”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는 현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문파의 정점에 선 세력들이었다. 그런 거대 문파에서 무인들을 보내왔다면 호남의 무인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구대문파 전체가 오는 건가?”
“남궁세가가 먼저 들어왔으니, 나머지 문파들이 들어오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봐요.”
담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구대문파 전체가 들어온다면 분명 화산파의 무인들도 끼어 있을 것이다.
화산파(華山派).
이젠 그 어떤 감흥도 없는 이름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화산파라는 이름에 현소 진인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담호는 이곳에 조금 더 머물기로 했다. 동생의 행방을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혹시 현소 진인을 만나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한편 은소청은 신기하단 눈빛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 자신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호남성에서 담호보다 유명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권마, 혹은 신강혈성이라고 불리는 자.
담호의 실제 무력이 어떻든 간에 그의 잔혹한 손속은 이미 강호의 경계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은소청 역시 은가보에서 수많은 무인들을 봐 왔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담호만큼 강했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연 담호를 바라보는 은소청의 눈빛에 호기심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방진보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맛있는 음식 해 드릴게요.”
방진보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덕에 불을 지피고,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식재료는 모두 은소청이 준비한 것이었다. 재료가 풍족하자 방진보는 신이 나서 요리를 했다.
이곳에서는 하고 싶은 요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방진보는 행복했다.
담호는 말없이 방진보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에선 빛이 난다. 지금 방진보의 모습에선 빛이 나고 있었다.
비록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지만.
남궁창과 남궁수, 그리고 해소월 세 사람이 악양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단 세 사람이서 걷는 듯했지만, 비밀리에 그들을 따르는 무인들의 수만 서른 명이 넘었다. 그들 모두 남궁세가의 정예들로 남궁창을 호휘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남궁창이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곳이야.”
“그렇습니까?”
“큰일을 하려면 인적, 물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위치도 매우 중요하지. 그런 면에서 보면 이곳은 무척 완벽한 곳이야.”
남궁창이 손으로 동정호를 가리켰다.
“일단 수로가 뒷받침되고, 육로 또한 빠지지 않지. 이런 곳에 성을 지으면 백 명으로 천 명을 막을 수 있는 그런 천혜의 요새가 완성되지. 우리가 원하던 그런 곳이야.”
“다행입니다.”
해소월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남궁창과 남궁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요새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아직 자네는 몰라도 되는 일일세.”
“예?”
“자네 사숙이 오면 자연 알게 될 터이니 조급해하지 말게.”
남궁창의 대답에 해소월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간의 회합이 열린다는 것만 알지, 모이는 이유까지는 모르는 해소월이었다.
화가 나고 답답했지만,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묵묵히 남궁창 숙질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선착장이었다.
남궁창이 선착장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곳이 좋을 것 같군.”
그가 손가락으로 근처의 언덕을 가리켰다. 동정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객잔들이 많이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확실히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긴 하군요.”
남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남궁창이 미소를 지었다.
“너도 이젠 사물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긴 모양이구나.”
“다 숙부님 덕분이지요.”
“가문에서 너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선착장에 커다란 운마도강선이 도착했다.
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배가 정박하고 발판이 내려졌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동정호구나.”
“휴우! 뭍에 오르니 좋구나.”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오랜만에 맛보는 육지의 느낌에 환호를 했다.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해소월의 얼굴에 언뜻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사숙!”
그녀가 뒤늦게 배에서 내리는 중년의 검객을 향해 달려갔다.
얼굴을 온통 뒤덮는 검은색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검객이 해소월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게 누구야? 소월이 아니더냐.”
“사숙!”
“하하! 반갑구나, 소월아.”
중년의 검객이 해소월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의 이름은 오군의, 백경검객(白鯨劍客)이 그의 별호였다.
해남파 제일의 고수는 당연히 문주인 능천월이었다. 오군의는 능천월의 사제이자 해남파의 장로였다.
능천월은 해남파의 운영에만 신경을 쓰느라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군의는 능천월을 대신해 해남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하곤 했다.
그 때문에 해남도에 사는 사람들은 능천월보다 오히려 오군의를 더욱 두렵게 생각했다.
해남도의 모든 사람들이 오군의를 두려워했지만, 해소월에겐 그저 마음 좋은 사숙에 불과했다.
“중원을 주유하더니 더 예뻐진 것 같구나. 하하!”
“사숙도 참…….”
“그래! 경험은 많이 쌓았느냐? 하긴 구무룡의 일원이 되었으니 많이 쌓았겠지. 내가 참 멍청한 소리를 했구나. 고생 많았다.”
오군의가 해소월의 등을 토닥거릴 때였다.
“하하! 사저, 저희들도 왔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사저.”
오군의의 등 뒤에서 낯익은 음성들이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해남파의 제자들 스무명가량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해남파의 이대 제자들이었다.
오군의가 빙긋 웃었다.
“강호의 경험을 쌓아 주기 위해 특별히 데리고 왔다. 네가 그들을 잘 이끌거라.”
“예! 사숙!”
오군의와 해소월의 해후가 끝나길 기다려 남궁창이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일세, 군의.”
“이게 누군가? 자네가 직접 마중 나오다니. 이거 영광이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오는데 내가 직접 나와 봐야 하지 않겠나? 또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으니.”
“쯧!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할 텐가? 그때는 나 아니라 누구라도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자네가 길을 잃고 헤맨 덕분에 우린 죽을 뻔했다구. 당연히 더 오래도록 우려먹어야 하지 않겠나?”
“거참!”
오군의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남궁창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궁수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남궁수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 대협. 숙부님의 조카인 남궁수라고 합니다.”
“오! 반갑네. 그렇지 않아도 저 친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네. 앞으로 남궁세가를 이끌 기재라고.”
“과찬이십니다.”
“저 친구는 자기 조카라고 쉽게 칭찬할 인간이 아니야. 얼마나 깐깐한데.”
오군의의 말에 남궁창이 코끝을 찡그렸다. 하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남궁창이 말했다.
“어서 가세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하긴! 맹(盟)을 만들려면 서둘러야지.”
“이 친구야. 말조심하게나.”
“이런! 미안하네. 내 반가운 마음에 실수를 했구먼.”
“이런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네.”
“내 명심하겠네.”
오군의의 대답에 남궁창이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나직했지만, 해소월은 이미 모든 대화를 들은 후였다.
‘맹이라니?’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는 맹이라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무림맹(武林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