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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7장. 용과 호랑이가 한 곳에 모여 든다(1)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능선을 훑고 지나갔다. 나뭇잎이 바람에 쓸려 허공으로 흩어져갔다.
초로의 도사가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젠 완연한 여름이군. 올여름은 많이 뜨겁겠어.”
현천 진인.
그것이 도사의 도명이었다.
그는 평범한 도사가 아니었다. 구대문파 중 하나인 대 화산파의 장문인이 바로 그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현천 진인이 있는 상궁에서는 화산 전체가 보였다. 이곳에서 보는 화산의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만일 장문직에서 물러난다면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가장 그리울 거야.”
“장문인께서 물러나긴 아직 이릅니다.”
현천 진인의 맞은편 탁자에 앉아 있는 중년의 도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도호는 무경.
화산파의 대제자이자 조만간 장문인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 확실시 되는 도사였다.
세월은 무경을 더욱 완숙하게 만들었다.
그는 화산파를 물려받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무게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현천 진인은 그런 무경을 매우 신뢰했다.
그 증거로 이젠 화산파의 대소사 어지간한 일들은 무경이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곁엔 언제나 든든한 사제, 운경이 함께 하고 있었다.
무경을 향한 화산파 제자들의 신망은 무척이나 두터웠다. 일 처리 또한 매우 공정해서 화산파의 제자들치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에 반해 운경은 냉정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완벽하게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다. 두 사람이 건재한 이상 화산파의 미래는 밝을 거라는 것이 세상의 중론이었다.
무경과 운경이 있기에 현천 진인도 은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지금도 반 은퇴 상태나 다름없지 않느냐? 너와 운경이 잘해 주고 있기에 이나마 여유를 즐길 수 있지.”
“아직은 사부님의 그림자가 필요합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맙구나.”
현천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빈말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단다, 무경.”
“사부님.”
“내가 처음에 화산파를 물려받았을 때는 많은 것이 엉망이었지. 그때는 정말 암담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지.”
이젠 그 누구도 화산파를 구대문파의 말석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의 화산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현천 진인의 노력이 컸다. 그리고 무경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현천 진인을 존경했고, 믿고 따랐다. 그에게 현천 진인은 단순히 사부 이상이었다.
“화산은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산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 어떤 누구도 화산보다 더 큰 가치는 없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됐다.
현천 진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조금만 더 산을 오르면 된다. 고지가 머지않았다. 무림맹이 만들어지면 많은 것이 변할 거야. 이 고비만 넘기면 화산파는 다시 반석 위에 오를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 그 후엔 나도 너에게 장문인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할 것이다.”
화산 전체를 훑던 현천 진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운대봉, 화산파 무력의 상징이라 할수 있는 진무궁이 있는 곳이었다.
“현검이 갔으면 좋으련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더욱 발전할 심득을 얻었다는데.”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현무 사백이 가셨으니 잘 처리하실 겁니다.”
“그래! 현무 사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현무 진인은 현천 진인의 사제였다. 현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무공은 화산파 내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무엇보다 현무 진인은 이성적이면서도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결코 흔들림 없기에 타 문파와의 협상을 매우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명경이 갔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겁니다.”
“맞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명경’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자 현천 진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화산파 제일의 고수라고 불리는 현검 진인이 직접 발탁하고 키운 제자가 바로 명경이었다.
화산파 일, 이대 제자도 아니고 속가 출신의 평범한 제자를 받아들였을 때는 무척이나 말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가 알게 되었다.
명경은 진흙 속에 숨겨져 있던 원석이었다.
현검 진인이 정성껏 진흙을 닦아 내자 그 어떤 보석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재능이 드러났다.
검에 대한 그의 재능은 무서울 정도여서 무경이나 운경 같이 화산에서 오랫동안 수련해온 일대 제자들조차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훌륭한 스승에 재능이 뛰어난 제자의 조합은 믿기 힘든 성취로 나타났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단어는 오직 명경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겨우 십이 년 만에 명경은 화산파의 일대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자존심이 강한 무경과 운경조차도 그런 명경의 재능에는 두 손, 두발을 다 들고 말 정도였다.
현검 진인은 제자인 명경을 세상에 내보냈다.
경험을 쌓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세상의 경험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명경은 분명 화산파의 수호검이 될 수 있을 거야. 명경이 자리를 잡으면 네가 화산파를 이끌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게다.”
“알고 있습니다.”
“명경을 잘 다루거라.”
“예! 사부님.”
“이만 나가 보거라.”
“그럼…….”
무경이 현천 진인에게 포권을 취한 후 밖으로 나왔다.
“후!”
상궁을 나온 무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중년의 도사가 무경에게 다가왔다.
“사형.”
“오래 기다렸느냐? 운경.”
“아닙니다.”
고개를 젓는 도사는 바로 무경의 사제인 운경이었다. 무경이 현천 진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운경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매우 공평해서 운경의 귀밑머리도 조금씩 희끗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눈빛은 깊어지고 더욱 냉철해졌다.
“사부님은?”
“그분의 머릿속엔 오직 한 단어밖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화산!”
“그래! 화산파 생각뿐이시지.”
“무림맹 출범이 눈앞에 있어서 더욱 예민하실 겁니다.”
운경의 말에 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채 걸음을 옮겼다.
“대사형, 나오십니까?”
“대사백님을 뵙습니다.”
일대 제자들과 이대 제자들이 분분히 인사를 해왔다.
문득 무경의 눈가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운경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또 천경 사제 생각을 하십니까?”
“내 잘못이야. 내가 그를 버렸어.”
“사형의 잘못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너의 말을 들었더라면, 애초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무경의 목소리엔 회한이 가득했다.
지난 십이 년 동안 단 하루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혹독하게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무경의 시선이 운대봉을 향했다. 운대봉의 정상엔 진무궁이 존재했다. 하지만 무경이 보는 곳은 운대봉 정상이 아닌 중턱이었다.
“사숙은?”
“여전하십니다. 그날 이후 한 발짝도 거처에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후우!”
무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무거운 숨소리가 뜨거운 여름 하늘에 울려 퍼졌다.
***
담호가 객잔을 나와 향한 곳은 천상루였다. 바로 하오문의 악양지부였다.
운정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루주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담호는 말없이 운정을 바라봤다. 그러자 운정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세 번째 보는 것이었지만 담호의 무표정한 얼굴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어떤 감정도 없는 눈빛은 볼 때마다 그녀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가지.”
“예! 저를 따라오세요.”
담호는 운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이! 거긴 만지면 안 돼요.”
“호호호! 어쩜 이리 늠름하실까?”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천상루 안에는 기녀들의 교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기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방 안은 뜨거운 기운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혹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앞서가던 운정이 곁눈질로 담호를 슬쩍 바라봤다. 하지만 담호는 방 안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긴 저 아저씨가 저런 것에 눈길을 줄 사람은 아니지.’
운정은 왠지 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기예화의 방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기예화가 미소로 담호를 맞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기예화가 미소를 짓자 매혹적인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기예화의 웃음은 여자인 운정의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웃음으로 상대를 매혹시킬 수 있는 천향소(天香笑)라는 고도의 공부였다. 현재 하오문에서 천향소를 펼칠 수 있는 기녀는 오직 기예화 한 명뿐이었다.
운정은 살짝 놀랐다. 기예화가 천향소를 펼치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보통 남자라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기예화에게 사랑을 구걸했을 것이다. 하지만 담호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천향소라는 공부도 담호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다.
기예화가 은근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차가운 분이시군요.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우리의 거래는 이미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조윤산의 행방을 추적해 줘.”
“결국 그를 찾지 못했나 보군요?”
“…….”
“살짝 알아본 바에 따르면 조윤산은 무척이나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 같더군요. 그런 자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단 뜻이에요.”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어. 십 년, 백 년이 걸려도 돼. 반드시 찾아내기만 해.”
“휴우! 당신의 적이 된 사람은 결코 두 발을 뻗고 자지 못하겠군요. 그 어떤 원한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복수를 할 테니.”
기예화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담호의 차가운 눈동자를 흔들게 하진 못했다.
기예화가 담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전히 냉막한 데다가 감정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문득 이 남자에게도 인간의 감정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졌다.
이 남자에 관련된 소문은 하나같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신강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래 그의 손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가 가는 곳엔 늘 죽음이 함께했고, 수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마 단시간 안에 이토록 흉흉한 악명을 쌓은 무인은 담호가 처음일 것이다.
지금 당장이야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같은 거대 문파들이 호남성에서의 회합에 집중하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훗날 여유가 생긴다면 언제 강호 공적으로 지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가 걸려도 시간은 상관없다는 말이죠?”
“그래!”
“알았어요. 그렇다면야 해 볼 만하죠.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혹시…… 흑호단이 당신이 살던 곳도 약탈했나요?”
“…….”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때는 침묵이 천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전달해 주기도 하는 법이다.
‘그가 조윤산과 흑호단에 원한을 가질 만하구나.’
담호는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눈빛도 그대로였고,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이런 남자와 적이 되었다가는 단 하루도 편히 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예화는 조윤산이라는 남자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기예화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럼 대가는 어떻게 치를 건가요?”
“대가라…….”
“조윤산과 흑호단을 알아낸 것으로 묘안석의 가치는 다했어요. 새로운 거래를 하려면 새로운 대가를 치러야죠. 그게 상도덕이니까요.”
담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건?”
순간 기예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번에도 묘안석이었다.
먼저 번에 담호가 내놓은 것보다 훨씬 작은. 그런데 더 영롱하면서도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훨씬 더 상질의 보석이었다.
지하공동을 빠져나올 때 담호는 두 개의 묘안석을 챙겨 나왔다. 이게 마지막 묘안석이었다.
첫 번째 묘안석보다 훨씬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귀물이었다. 기예화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담호는 기예화가 자신과의 거래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담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묘안석은 됐어요.”
“…….”
“대신 다른 부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