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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95화 (9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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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7장. 용과 호랑이가 한 곳에 모여 든다(2)

뜻밖의 말에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기예화가 더욱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미리 대가를 받거나 중간에 말을 바꾼 게 아니니 상관없겠죠?”

그녀의 뇌리 속엔 먼젓번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원래의 대가에 하나를 더 얹었을 뿐인데도 담호는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했다.

자신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지만, 상대가 약속한 것을 어기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응한다.

한마디로 애초의 약속만 잘 지킨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듯이다. 그래서 돈이 아닌 부탁을 대가로 원하는 것이다.

담호가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우리가 원할 때 딱 한 번만 도와주세요.”

“왜지? 하오문의 전력이 약하지는 않을 텐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 동정호 주변은 폭풍이 불기 직전이나 다름없어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회합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고수들이 들어오고 있어요. 최근 백 년 내 이랬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어요.”

그 때문에 지금 하오문에는 비상이 걸렸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서 들어오는 무인들의 수만 해도 벌써 오백 명이 넘는다.

악양의 패자라는 악양검문 정도는 하룻밤이 지나기 전에 전멸시킬 수 있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당연히 악양은 물론이고 호남 강호 전체가 발칵 뒤집혀졌다. 하오문의 악양지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아무리 하오문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구대문파와 같은 거대 문파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대비책이 필요했다.

기예화는 그 대비책으로 담호를 선택했다.

담호는 여러모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가공할 무력과 단호한 손속, 그리고 냉혹한 심성까지.

계속해서 거래하는 것은 부담이 되겠지만, 필요할 때 한 번쯤 도움을 받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담호는 대번 기예화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여차하면 버려도 탈이 없을 거란 계산도 작용했겠지.’

담호와 하오문은 거래로 이어진 사이, 그 안엔 어떤 의리도 친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떡하시겠어요.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공평한 제안이에요.”

“…….”

“저희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악양에 있는 동안 단 한 번의 도움뿐이에요. 당신은 조윤산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고, 저희는 든든한 방패막이를 하나 가지게 되는 셈이지요. 어떡하시겠어요?”

“거절한다면?”

“직접 조윤산의 행방을 찾아야겠죠.”

말을 하면서도 기예화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만일 이번에도 담호가 거절을 하고 날뛴다면 하오문으로서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담호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기예화는 입술이 바싹 타고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담호의 대답에 따라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이 달라졌다.

그 어떤 감정의 변화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담호는 침묵을 지켰다. 속이 타는 것은 기예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담호가 입을 열었다.

“좋아! 거래하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제야 기예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기예화였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기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호로서도 그리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는 세상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악업을 쌓을 대로 쌓았다. 거기에 하나쯤 더 얹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약속할게요. 그 어떤 일보다도 우선해 조윤산의 행방을 찾겠어요.”

“기다리지.”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난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기예화는 방문을 나가는 담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탁!

마침내 방문이 닫히고 담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참 제멋대로구나.”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

한 여인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호피로 만든 조끼 사이로 드러나는 다갈색 피부가 야생마를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황혜령, 녹림십팔채의 총 채주인 황경문의 딸이 그녀의 신분이었다.

어려서부터 녹림에서 자랐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무모한 것은 아니었다.

황경문은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가르쳤다. 녹림에서 이름난 고수들을 사부로 붙여 줬고, 황혜령은 그들의 가르침을 흡수해 높은 성취를 보였다.

그 덕에 그녀의 무공은 녹림십팔채 안에서도 상위에 속할 정도로 높은 성취를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녀가 꽤나 미인이란 것이고, 또 머리가 무척 좋다는 것이다.

“정말 많이도 들어왔네.”

악양 곳곳을 둘러보는 그녀의 얼굴엔 심각한 빛이 가득했다.

오늘따라 거리엔 유독 많은 무인들이 보였다. 그녀가 파악한 바로 악양에 이제까지 유입된 무인들의 수만 이백 명이 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무인들이 이곳에 들어올 것인지 짐작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녹림은 결국 도적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관병이 아니라 구대문파로 대변되는 거대 문파들이었다.

마교가 멸망한 이후 구대문파와 같은 거대 문파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주기적으로 녹림을 토벌해 왔다.

만일 황경문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녹림을 규합하지 못했다면 녹림은 벌써 지리멸렬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녹림은 거대 문파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런 대규모의 회합이 벌어지면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모이는 거지?”

황혜령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황혜령은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이젠 눈을 감고도 악양의 거리를 모두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에구! 이렇게 걷는 것도 힘드네.”

황혜령은 동정호 변에 멈춰 섰다.

해가 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수면이 그녀의 망막을 어지럽게 자극했다.

황혜령은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산에서 노을이 지는 광경은 많이 바라봤다. 그래서 별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수에서 해가 저무는 광경은 그녀에게 색다른 감흥을 선사하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릴 때였다. 그녀의 눈에 동정호를 걷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흑발에 검은 가죽 장포를 걸친 사내였다. 이상하게 그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그가 다리를 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내는 그녀를 무심히 지나쳐 갔다.

“저…….”

황혜령은 그를 부를까 하다가 멈췄다.

고깃배 한 척이 그녀가 있는 동정호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와아! 배가 들어온다.”

“아부지.”

동정호변 언덕에 있던 중년의 여자와 아들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달려왔다.

“하하!”

어부가 고깃배에서 내려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남자 아이가 폴짝 뛰어 어부의 품에 안겼다. 어부는 그런 남자 아이를 힘껏 안아 주었다.

“이놈의 자식. 그렇게 뛰다가 다친다.”

“고기 많이 잡았어요?”

“그럼! 볼래?”

“볼래요.”

남자아이가 어부의 품에서 나와 고깃배에 올라탔다. 조그만 고깃배 안에는 제법 많은 양의 물고기가 있었다.

“와아!”

남자 아이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 광경을 보며 어부와 중년 여인이 웃었다.

평범한 일가의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황혜령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부 일가가 물고기를 바구니에 담아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

어부의 한쪽 어깨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옆을 아내가 따르고 있었다.

황혜령은 한참 동안이나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 외에도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방금 전 보았던 그 남자였다.

흑발에 검은 장포, 그리고 발을 저는 남자였다.

마치 나무가 된 것처럼 그는 미동도 없이 어부 일가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혜령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왜 이러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에 황혜령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마침내 황혜령이 눈물을 모두 닦아 냈을 때는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황혜령이 의문을 가질 때였다.

“아가씨!”

갑자기 등 뒤에서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황혜령이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칠 척 거구에 거대한 도끼를 등에 짊어진 거한이었다.

거한이 등장하는 순간 황혜령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헉!’

‘무슨 놈의 눈빛이…….’

험상궂은 얼굴에 살기 어린 눈빛이 사람들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거한이 혹여 자신을 바라볼세라 급히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황혜령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그래서 그렇게 떼어 놓고 오려고 했는데.”

거한의 이름은 묵일광. 황경문이 그녀에게 붙여 준 호위였다.

황경문은 총표파자가 된 후 녹림십팔채에서 젊고 유능한 기재들을 뽑아 하나의 무력집단을 만들었다. 등룡대(登龍隊)가 바로 그것이었다.

처음에 황경문이 등룡대를 만든다고 했을 때 모든 산채가 반대를 했었다. 각 산채에서 젊고 유능한 기재를 차출해 가면 빈껍데기만 남을 거란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경문은 차출해 간 기재들만큼 전력을 보충해 주었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무도 그때의 결정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십여 년 이상을 고된 수련을 한 등룡대는 녹림 최고의 전력으로 성장했다. 녹림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등룡대가 먼저 나서서 일을 해결했기에 이제는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묵일광은 바로 등룡대 출신의 무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등룡대의 대주는 그였다. 하지만 묵일광은 등룡대의 대주가 되는 대신 황혜령의 호위를 자처했다.

겉모습은 흉신악살이나 다름없지만, 기실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착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묵일광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오직 묵일광의 겉모습뿐이었다.

살기 어린 그의 눈빛만 보고도 자지러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마음 약한 어린 아이들이나 여인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디를 같이 갈 수가 없었다. 확 튀는 외모와 살기 어린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움직이고 싶어 하는 황혜령으로서는 그런 묵일광의 외모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될 수 있으면 악양으로 들어오지 말랬잖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가씨.”

평소라면 얼굴을 붉히면서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묵일광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황혜령은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무슨 일이야?”

“흑수채(黑水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설마?”

“예!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금호채(金虎寨)와 백록채(白鹿寨)가 노골적으로 그에게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산채들이 흑수채에 넘어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묵일광의 설명에 황혜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는 것 같아?”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겁니다. 최대한 빨리 산채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았어.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허나 최대한 빨리 끝내셔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알았어.”

황혜령이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묵일광이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들은 금세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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