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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7장. 용과 호랑이가 한 곳에 모여 든다(3)
담호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 동정호 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부 일가도, 호피 가죽 옷을 입은 소녀도.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왠지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담호는 잠시 그들이 있던 공간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담호는 해가 지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풍객잔으로 돌아왔다. 서풍객잔 내의 식당을 지날 때였다.
“친구.”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담호를 향해 활짝 웃는 남자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그가 앉은 탁자 위에는 술병 두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취기 때문인지 초연운의 얼굴은 벌써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담호가 초연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초연운이 웃으며 술잔을 권했다.
“한잔하겠는가?”
담호는 말없이 술잔을 받았다. 그러자 초연운이 술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하하! 여기서 다시 친구를 보게 되니 기분이 좋군.”
“원강에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긴 벌써 다녀왔다네. 사람들이 징그럽게도 많더군. 어찌나 무인들이 많은지 마치 인력시장을 보는 것 같았어. 킥킥!”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초연운은 혼자 웃고 떠들어 댔다.
담호는 조용히 술잔을 들이켰다.
“청성파와 곤륜파의 무인들도 들어와 있더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물들이다 보니 원강 전체가 떠들썩해.”
“…….”
“이제 소림, 무당, 화산 같은 핵심문파의 무인들만 들어오면 모두가 모이는 셈이지. 정말 대단하지 않나? 구대문파 전부와 오대세가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거의 삼십 년 만이라네.”
담호는 혼자서 떠들고 있는 초연운의 주먹을 바라봤다. 그의 주먹엔 피딱지가 내려앉았다. 팽만영과 싸운 흔적일 것이다.
담호는 결과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팽만영은 애초부터 초연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취운룡이라는 별호로 불려 구무룡 아래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그의 무력은 결코 구무룡 못지않았다.
남학과 겨뤄 본 담호는 초연운의 무력이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팽만영은 아직 구무룡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했다.
담호가 술잔을 들이켰다. 초연운이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줄 때였다.
“형!”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방진보였다. 그가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음!”
담호가 고개를 끄덕일 때 초연운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방진보를 바라봤다.
초연운이 서천산장에서 담호를 만났을 때 방진보는 주방에서 일하고 있어 만나지를 못했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누구?”
“네?”
초연운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이 친구의 친구. 너는?”
“동……생요.”
“동생? 그럼 나한테도 동생이네. 반가워!”
“아! 예!”
방진보가 얼떨결에 대답한 후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뜻이었다.
“반가워! 내 이름은 초연운이야.”
“전 방진보예요.”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라.”
“하지만…….”
“쓰읍!”
“네! 형.”
“흐흐! 그래야지.”
초연운이 음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방진보가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초연운의 넉살이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방진보가 탁자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주도 없이 술 마시는 거예요?”
“이렇게 좋은 술을 마시는데 안주는 딱히 필요 없지.”
“그래도 그렇게 마시면 속 버려요. 제가 안주를 만들어 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요리도 할 줄 알아?”
“조금은요.”
방진보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초연운이 활짝 웃었다.
“그래? 동생이 요리를 만들어 주겠다는데 당연히 먹어 봐야지.”
초연운이 손바닥을 비비며 방진보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별채에 들어가자 은소청이 그들을 맞이했다.
“진보야, 아저씨. 어?”
은소청이 뒤늦게 초연운을 발견했다. 그러자 초연운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방진보와 은소청을 번갈아 바라봤다.
“오호! 요것들 봐라.”
“그런 것 아니거든요?”
은소청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초연운이 더욱 음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뭐라고 했냐?”
“하여간 아니라구요.”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참 빨리도 물러본다. 나는 저 친구의 친구. 그러니까 너에게도 오빠가 되겠지.”
“흥! 웃기지 말아요. 누가 오빠예요?”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오빠지, 그럼 네가 오빠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아아! 시끄럽고…….”
초연운이 귀를 후비적후비적 팠다. 그 모습이 은소청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이 정도까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은 초연운이 처음이었다.
방진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투닥거리고 있지만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방진보가 뒤따라오는 담호를 바라봤다.
“형은 따로 드시고 싶은 것 있으세요?”
“알아서 해 다오.”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헤헤!”
방진보가 특유의 웃음을 터트렸다.
초연운과 은소청은 아직도 다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별채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방진보는 지금의 소란스러움이 좋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덕에 불을 지피고 과자를 달궜다. 방진보가 분주히 움직일 때도 은소청과 초연운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여기 제가 빌린 곳이거든요.”
“잘됐네. 방도 많이 남을 텐데 신세 좀 지자.”
“누구 마음대로요?”
“나 진보의 형이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밖에서 노숙하면 진보가 좋아할 것 같아?”
“아! 진짜!”
“좀 나눠 쓰자. 이 넓은 곳을 설마 너 혼자 쓰겠다는 것이야말로 지독한 낭비 아니야?”
“여기서 낭비가 왜 나와요?”
“몰라! 나는 진보의 음식을 먹을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야.”
초연운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에 은소청이 방방 뛰며 뭐라 말했지만 소귀의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은소청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욱 귀엽게 보였다.
“헤헤!”
방진보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후 방진보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놨다.
“자, 동파육 나왔습니다.”
후각을 자극하는 강렬한 향기에 초연운과 은소청이 넋을 잃고 다가왔다.
“우와! 냄새가 장난 아닌걸.”
“그럼요. 누가 만든 건데요.”
“암! 누구 남자 친구겠지?”
“아! 진짜.”
“시끄럽고 어서 먹기나 하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나도 별로거든.”
“흥!”
“나도 흥이다.”
두 사람은 끝까지 말싸움을 했다. 하지만 악의를 가진 것이 아니었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초연운이 동파육 한 점을 집어 먹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끝내준다. 내가 먹어본 동파육 중 최고야.”
“헤헤!”
그에 방진보가 머리를 긁적였다.
초연운이 술 한 모금을 마셨다.
“좋구나. 좋은 술에 훌륭한 안주.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흥! 술고래 같으니라구.”
“하하! 내가 원하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술고래가 되어 술의 바다에 파묻혀 죽는 것.”
초연운의 웃음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은소청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 뭐라 하지는 않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 역시 강호를 살아가는 자. 초연운과 대화를 하면서 정체를 알아차렸다.
‘취운룡. 이 사람은 취운룡 초연운이 분명해.’
언뜻 술에 취한 듯 보이지만 초연운의 눈은 샛별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초연운이 잘 받아주기에 은소청도 이렇게 틱틱거릴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말을 걸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은소청이 담호를 슬쩍 바라봤다.
담호는 음식을 조금씩 먹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담호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다.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도.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은가보의 터전인 호남 강호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담호일진데.
‘권마에 취운룡까지. 진보의 주위엔 정말 대단한 사람들뿐이구나.’
은소청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방진보를 바라볼 때였다.
“동생아, 머리 굴리지 마라. 그리 좋지도 않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은소청의 속을 확 뒤집어놓는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 초연운이었다.
“아, 진짜!”
“흐흐! 술 마실래?”
“됐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초연운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은소청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찌르면 넘어오니, 참 놀려먹기 좋았다.
초연운은 당분간 심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술자리는 밤늦게 파했다.
초연운은 넉살좋게 별채에 눌러 앉았다. 은소청의 구박을 받긴 했지만, 꿋꿋하게 버텨 기어이 승리를 쟁취했다.
결국 은소청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진보도 피곤하다고 방으로 돌아간 후 마당에는 담호와 초연운만 남았다.
“좋구나.”
초연운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듯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별의 바다가 펼쳐진 것 같았다.
“좋은 술에 좋은 안주,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의 일상. 매일 이렇게만 보내면 정말 행복할 텐데.”
그의 말은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초연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초연운이 씨익 웃으며 담호를 바라봤다.
“덕분에 맛있는 안주를 맛봤네. 고마워.”
“음식은 진보가 했어.”
“진보에겐 당연히 고맙지. 아주 솜씨가 끝내주던걸.”
“음!”
“진보는 분명 훌륭한 숙수가 될 거야. 장래가 아주 기대돼. 저런 아이가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 와야 할 텐데.”
그 후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질식할 듯한 침묵을 깬 이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한 가지만 묻고 싶군. 솔직히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말해.”
“자네…… 혹시 마교와 연관이 있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신비의 고수. 무공도 고강한 데다가 손속은 더욱 잔혹하지. 그의 손에 죽은 이들의 수만 벌써 수백여 명. 평상시라면 강호의 공적으로 지목받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지.”
“내가 먼저 건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왜 묻지?”
“그래도 자네 입으로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싶으니까. 자네 같은 사람은 절대로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지.”
초연운의 말에 담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부인 현소 진인 이후 자신에게 이렇게 확고한 믿음을 보여 준 이는 초연운이 처음이었다.
담호가 입을 열었다.
“난 마교도가 아니야.”
“믿지.”
“내가 거짓을 말하는 거라면?”
“그랬다면 내 눈이 잘못된 것이겠지. 허나 난 자네를 믿어. 자네는 결코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친구가 아니야.”
“…….”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계속해서 자네와 친구이고 싶어. 내 진심이야.”
초연운의 목소리가 담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