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97화 8장. 여러 사람이 모이면 각자 목소리를 높이게 마련이다(1)
시간이 흐를수록 동정호 주변으로 많은 무인들이 들어왔다.
처음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무인들이 전부였지만, 소문을 듣고 다른 중소문파의 무인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강호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동정호에서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비록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객잔마다 무인들로 가득 찼고, 거리엔 긴장감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숨을 죽였다.
그 와중에 무당파의 무인들이 원강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근에서 소림사의 승려들을 보았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 증거로 천하제일루 주변에 삼백여 장에 걸쳐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강호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도 천하제일루 근처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장 속이 타는 이는 원강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의선문이었다.
의선문의 문주 심우원은 침중한 표정으로 전면을 바라봤다. 그의 맞은편에는 쉽게 볼 수 없는 거물들이 앉아 있었다.
연남색 문사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와 검은 수염이 얼굴을 뒤덮은 중년의 검객.
바로 남궁창과 오군의였다.
그들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면담을 청했다. 당연하게도 심우원에게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힘이 없었다.
“두 분이 어쩐 일로 의선문을 찾아오신 겁니까?”
“평소 의선문이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나 나누고자 찾아왔습니다.”
남궁창의 칭찬에도 심우원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상대는 남궁세가의 장로였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런 거물의 말을 순순히 믿을 만큼 심우원은 순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혼자 온 것도 아니다. 그의 곁에 있는 오군의는 해남파의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극강의 무인이었다. 불행히도 의선문에 그를 감당할 수 있는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우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기탄없이 말씀하시지요.”
그의 말에 남궁창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머리 좋은 자는 이래서 상대하기 편했다. 알아서 형국을 계산하고, 알아서 접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쪽은 분위기만 잡아 주면 된다.
남궁창이 입을 열었다.
“심 문주께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조만간 이곳에서 큰 회합이 있을 겁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전체가 모이는 큰 모임이.”
“으음!”
심우원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인물에게 직접 들으니 느껴지는 충격의 강도가 달랐다.
자신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원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더군다나 회합의 장소는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천하제일루였다.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이곳에서 회합을 하시는 겁니까?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정도라면 다른 좋은 곳에서 얼마든지 모일 수 있을 텐데요.”
“참 좋은 곳이지요.”
“예?”
“동정호 말입니다. 사통팔달의 위치에 아름다운 풍광까지. 천하에 이렇게 완벽한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거야 그렇지요.”
무언가 떨떠름함을 느끼면서도 심우원이 수긍했다.
의선문이나 악양검문이 동정호 주변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악양 쪽에 땅을 살까 합니다.”
“예?”
남궁창의 뜬금없는 말에 심우원이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남궁창이 부드럽게 웃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저 땅을 사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이니까요.”
“아, 아니 남궁세가에서 왜 악양에 땅을…….”
“남궁세가가 사는 게 아닙니다. 무림맹이 사는 거지요.”
“무림맹?”
“예! 무림맹.”
“그게 무슨?”
“조만간 동정호에 무림맹이 들어설 겁니다. 우리는 최적의 위치로 악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심우원이 침음성을 흘렸다.
무림맹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야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왜 이곳에서 회합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림맹은 단순히 강호 무림의 연합체가 아니었다.
정말 무림맹에 만들어진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될 것이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주축이 된다면 현 강호에서 무림맹을 막거나 견제할 수 있는 세력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남궁창의 말은 악양에 무림맹이 들어설 거라는 뜻이었다. 누가 있어 그들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까?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천하제일루에 모이는 것은 무림맹을 창설할지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창설은 기정사실.
문제는 무림맹에 참여하는 문파들의 지분을 어떻게 나누느냐였다. 동정호에서 모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엔 구대문파도, 오대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중립지대. 무림맹을 세우고 커다란 이권을 공평하게 나누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은 존재하지 않지.’
호남성에도 오대문파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정도는 구대문파 중 하나만 나서도 정리할 수 있었다.
호남 오대문파 중 누가 감히 무림맹을 빙자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행사에 반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심우원의 등은 식은땀으로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의선문의 운명이 갈린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심우원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의선문이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심 문주는 역시 현명하시군요.”
남궁창의 눈빛이 심유하게 빛났다.
심우원은 남궁창의 망막 안에서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심우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도울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심 문주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습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남궁창의 말에 오군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심우원은 모를 것이다. 지금 그와 의선문이 어떤 지경에 처했는지. 의선문 같은 중소문파는 감당하기 힘든 거친 바람이 동정호에 불어오고 있었다.
***
거대한 운마도강선이 장강을 타고 남하하고 있었다.
운마도강선 갑판엔 수많은 이들이 앉아 있었다. 각각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머리엔 남화건(南華巾)을 쓰고, 평범한 득라의를 입은 이십여 명의 도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세상엔 많은 도사들이 존재했다. 각 지역마다 이름이 있는 산에 가면 반드시 도관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운마도강선에 타고 있는 도사들은 정말 특별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도관에 속해 있는 도사들이 아닌, 화산파의 도사들이었으니까.
도사들은 화산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화산파에서 나온 도사들이란 사실을 금방 알아봤다.
무당파와 함께 도가의 양대 산맥인 화산파의 도사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도사들의 중앙에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도사가 서 있었다. 다른 도사들처럼 평범한 득라의를 입고 있는 도사의 눈에는 현묘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노도사의 도호는 현무.
장문인인 현천 진인의 사제이자 화산파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였다. 그가 바로 악양으로 향하는 화산파 도사들을 이끄는 책임자였다.
현무 진인의 주위에 있는 도사들은 화산파에서 뽑힌 제자들로 이대 제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일대 제자들도 몇 명이 동행하고 있었다.
일대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여도사였다. 다른 도사들처럼 남화관을 쓰고 득라복을 입었지만, 여인 특유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제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도사의 이름은 한소유.
화산파에서 흔치 않은 여도사였고, 일대 제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취를 이룬 무인이었다. 그녀는 화산파의 모든 제자들이 들기를 원하는 매화삼십육검수의 일원이기도 했다.
세월은 한소유의 눈빛을 더 깊게 만들었고, 매화와 같은 기품을 갖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화산파의 제자들치고 한소유를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한소유가 중얼거렸다.
“삼 년 만인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나왔던 것이 삼 년 전이었다. 당시 산서성에 복룡혈마(伏龍血魔)라는 마인이 나타났다.
그는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 산서성에서는 그를 막을 문파나 무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섬서성에 있는 화산파에 도움을 청했다.
당시 한소유는 매화삼십육검 중 다섯 명을 데리고 복룡혈마의 척살에 나섰다.
복룡혈마는 격렬히 저항했지만 한소유와 다섯의 매화검수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복룡혈마는 한소유의 검에 목숨을 잃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소유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매화선자(梅花仙子).
그것이 한소유의 별호였다.
그때 현무 진인의 창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유야.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숙.”
“동정호가 가까워지니 너도 감상적이 된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괜찮다. 우리가 도사라고 하지만, 오욕칠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현무 진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따스했다.
화산파 제자들에겐 더할 수 없이 인자한 사람이지만, 화산파의 적들에겐 누구보다 잔인할 수 있는 이가 바로 현무 진인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제가 뭘요?”
“무경과 운경,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화산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들이야말로 화산의 미래라 할 수 있지.”
현무 진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찬이었다.
화산의 부흥을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쫓기듯 지난 십여 년을 전력을 다해 달려왔다. 덕분에 화산파는 이십 년 내 최고의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전성기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쉴 수가 없었다.
“명경은?”
“다음 선착장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금방 볼 수 있겠구나.”
현무 진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명경을 이야기할 때면 화산파 모든 장로들의 표정이 그와 비슷하게 변했다.
십이 년 전 현검 진인이 본산 제자들을 제치고 속가 제자에 불과한 명경을 제자로 받아들일 때만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졌었다.
과연 속가 제자가 현검 진인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의심부터 갔던 것이다. 하지만 명경은 현검 진인이 선택한 기재답게 무서운 성취를 보였다.
화산파의 모든 무공을 빠른 속도로 익혀가면서 한계를 돌파했다.
화산파 제일의 고수인 현검 진인. 화산파 제일의 기재인 명경. 두 사람의 조합은 불가능을 없게 만들었다.
이번 악양행은 단순히 무림맹의 창립을 위해 가는 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명경의 경험을 쌓게 해 주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
명경은 화산파의 미래였다. 그가 얼마나 더 강해지느냐에 따라 화산파의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다.
지금 명경은 화산파 도사들과 떨어져 따로 남하를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명경의 경험을 쌓게 해 주려는 현무 진인의 배려였다.
“이번에 또 얼마나 발전했을지 기대가 정말 크구나.”
“사숙!”
“생각해 보면 그동안 참 운이 좋았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화산파의 제자들을 단 하나도 잃지 않았으니.”
현무 진인의 말에 한소유가 눈을 감았다.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니? 그 아이는 죽어서도 화산파의 제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구나.’
화산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한소유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천경.’
그녀의 목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