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98화 (98/500)

 98

98화 8장. 여러 사람이 모이면 각자 목소리를 높이게 마련이다(2)

담호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바로 서풍객잔의 별채 앞마당이었다. 원래는 객실에 머물렀어야 했지만, 방진보 때문에 이곳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별채에서 바라보는 동정호의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담호의 가슴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이니까 보는 것뿐이다.

담호가 동정호를 보고 있는 사이 방진보는 한창 음식을 준비 중이었다. 그 옆에서 은소청이 칼을 들고 대기 중이었다.

이제는 방진보에게 음식을 배우겠다고 저러는 것이다. 그 모습이 웃긴지 초연운이 연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칼로 재료나 다듬을 수 있겠어? 괜히 다치지 말고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이나 하는 게 어때?”

“흥! 웃기지 마요. 나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다 다친다니까. 다치고 나서 울지 말고 이리 와.”

“됐거든요.”

은소청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 초연운이 이죽거렸다.

“쳇! 자존심은 있다는 거지? 그래! 마음대로 해 봐. 그러다가 괜히 다쳐서 울지 말고.”

“아,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은소청이 아예 귀를 틀어막았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싸우면서도 붙어 있었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화를 내면서 떠날 법도 한데 말이다.

방진보는 그런 시끌벅적함이 좋았다.

초연운과 은소청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왠지 활기찬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일이 즐겁게 느껴졌다.

‘이곳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방진보는 이 행복이 오래가길 빌면서 슬쩍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동정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석상처럼 미동도 없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주위의 그 어떤 풍경과도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 오직 담호만이 다른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저러다가 또 언젠가 훌쩍 떠나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약속을 하면 절대 어기지 않는단 사실을 알기에 방진보는 한시름 놓았다.

방진보의 앞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놓여 있었다. 오늘 아침 동정호에서 갓 잡아 온 생선이었다.

방진보는 생선으로 수자어(水煮漁)를 할 생각이었다.

수자어는 생선을 편으로 떠서 기름에 살짝 튀긴 후, 각종 양념과 고추기름에 삶아 먹는 요리였다.

“헤헤!”

방진보가 주도로 생선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슥 슥!

주도가 몇 번 지나가자 생선의 껍질이 벗겨지고 뼈가 발라졌다. 이어 순식간에 포가 얇게 떠졌다.

“우와!”

곁에서 지켜보던 은소청이 탄성을 내뱉었다.

초연운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방진보의 요리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칼 솜씨마저 이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다.

‘도법을 배우면 그만이겠는걸.’

다른 아이들보다 몸이 뚱뚱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무공을 배우면 살은 빠지게 마련이었다. 중요한 것은 감각과 재능이었다.

지금 방진보가 주도를 다루는 감각이라면 어지간한 도법 정도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빨리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초연운이 슬쩍 담호를 바라봤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담호는 똑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저렇게 한 자세로 오래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인간이라도 무리였다. 그런데 담호는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담호에 대해 아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담호라는 이름 두 자와 권마, 혹은 신강혈성이라는 별호로 불린다는 것 정도.

“정말 흥미로운 친구라니까.”

초연운이 피식 웃을 때였다.

“아가씨!”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별채 마당에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은소청이 반색을 했다.

“은검.”

나타난 이는 은소청의 호위무사인 종리수였다.

종리수가 급히 은소청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 밖에 보주님이 오셨습니다.”

“아빠가?”

은소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아버지 은일명은 쉽게 은가보를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하하! 소청아.”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넉넉한 체구의 남자가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이중으로 접히는 턱살과 두툼한 뱃살, 그리고 몸에 걸친 화려한 의복이 잘 어울리는 중년의 남자였다.

“아빠!”

은소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가 바로 호남 오대문파 중 하나인 은가보의 주인인 은일명이었다. 은일명은 양팔을 벌려 품에 안기는 은소청을 꼭 안아 주었다.

“아빠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일이 있어서 나왔다. 잘 있었느냐? 욘석.”

은일명이 은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은일명은 한동안 은소청을 품에 안고 해후를 즐겼다.

“그런데 진짜 어쩐 일이에요? 아빠.”

“그보다 먼저 같이 있는 분들을 소개해 주지 않으련?”

“아!”

그제야 은소청이 제정신을 차리고 은일명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진보예요. 방진보.”

“아, 안녕하세요. 은 대협.”

은소청의 소개에 방진보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은일명의 눈이 반짝였다.

‘이 녀석이 그 뚱보…….’

종리수가 그랬다.

요즘 은소청이 마음을 주는 소년이 있다고.

지난 십이 년 동안 금이야 옥이야 키운 은소청이었다. 그런 은소청이 외간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고 했을 때 그가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방진보를 바라보는 은일명의 눈빛이 험악할 수밖에 없었다.

“으득! 네가 진보로구나.”

“처,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다.”

은일명의 목소리에 왠지 살기가 느껴졌다.

은소청이 다음에 소개한 이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이쪽은 별 볼 일 없는 식충 아저씨.”

“야!”

초연운이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은소청은 코웃음만 칠뿐 자신의 말을 수정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초연운이 스스로를 소개해야 했다.

“반갑습니다, 은 대협. 저는 백전문의 초연운이라고 합니다.”

“내 어찌 천하의 취운룡 초 소협을 모를까? 영사께서는 강녕하시지요?”

“그 양반이야 여전하시지요. 아마 저보다 더 오래 사실 겁니다.”

“이런 곳에서 초 소협을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일간 꼭 은가보에 들러 주십시오. 그때 제대로 된 대접을 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저 녀석의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초연운이 슬쩍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러자 방진보가 얼굴을 붉혔다. 그에 은일명이 슬쩍 인상을 썼다.

초연운이 그런 은일명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딸이나 아비나 똑같군.’

그렇다고 속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잠시 방진보를 노려보던 은일명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그럼 저쪽은…….”

“담호 아저씨에요. 진보의 형이에요.”

“담호?”

은소청의 대답에 은일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진보의 형이라고 하니 일단 기분부터 나쁜 것이다.

“강호에선 아저씨를 신강혈성, 혹은 권마라고 불러요.”

“헉!”

하지만 은소청의 설명이 이어지자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펴졌다.

담호의 악명은 은일명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호남성에 몸을 담고 있는 무인이라면 담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은일명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최근에 나타나 혈겁을 자행하는 담호를 우려의 시선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딸이 어울리는 방진보의 형이 담호일 줄은 정말 몰랐다.

‘은가보의 전력을 동원하면 놈을 죽일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유혹이 찾아왔다. 하지만 은일명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비록 호남 오대문파 중 하나로 불리지만, 은가보는 기본적으로 무가보다는 상가에 가까웠다. 모든 일을 무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금력으로 해결하는 것에 익숙했다.

상대는 호남에서 최고의 악명을 날리는 무인, 괜히 섣불리 건드려서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은일명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담호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만일 다른 이들이 그랬다면 은일명은 분명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담호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불붙기 전의 화약고 같다고나 할까? 담호의 몸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물씬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말조차 붙일 수 없었다.

담호는 여전히 동정호를 바라보고 있을 뿐 은일명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그때 침묵을 깬 이가 바로 초연운이었다.

“저 얼음장 같은 친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체 말이 없어서 저희도 하루에 한마디 이상 듣기 힘드니까요.”

“과연…….”

은일명이 애써 수긍했다.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빠!”

“으, 응?”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일이 있어서 왔다.”

“일이라면?”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했다.”

“누구요?”

“곧 알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서풍객잔에서요?”

“그렇다.”

은일명이 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는 담호에 대한 관심을 껐다. 비록 담호라는 인간 자체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대체 누구를 만나기에?’

은소청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은일명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은가보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없었다. 호남 오대문파 중 하나인 은가보의 주인이라는 자존심도 있는 데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은소청이 주위를 둘러봤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주위에는 은일명의 호위인 철검대가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은일명은 그들의 호위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으니까.

은일명이 은소청에게 말했다.

“잠시 이곳을 빌리자꾸나.”

“예?”

“다른 곳은 그들을 만나기 적합하지 않아.”

“아빠, 하지만…….”

은소청이 뭐라 말을 할 찰나였다. 문을 열고 철검대 무인 한 명이 뛰어와 은일명에게 보고했다.

“그들이 왔습니다.”

“으음! 벌써?”

은일명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올랐다.

아직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저들이 벌써 왔다니 난감했다.

그가 부하들에게 명을 내리기도 전에 방문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 은 보주님.”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별채 안으로 들어오는 연남색 문사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 그의 뒤를 세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바로 남궁창과 오군의, 남궁수, 해소월 등이었다.

“으음!”

“소생은 남궁세가의 낭궁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은 보주.”

“은가보의 은일명이 남궁 대협을 뵙소이다.”

은일명이 포권을 취했다.

‘이것 봐라.’

초연운의 눈이 반짝였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무인들이 악양에 모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설마 이 자리에 오대세가에서 중추라 할 수 있는 남궁세가의 장로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그사이 오군의가 나서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해남파의 오군의요.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남궁창에 이어 오군의의 소개는 은일명을 혼란에 빠트리게 하기 충분했다.

남궁세가에 이어 해남파의 등장이었다.

은가보의 명성은 능히 호남을 아우를 만하지만, 남궁세가와 해남파의 명성은 천하를 뒤흔들 만 했다.

어느 쪽이든 은가보가 감당하기 힘든 거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뒤를 이어 남궁수와 해소월이 포권을 취했다.

“남궁세가의 남궁수가 은 보주님을 뵙습니다.”

“해남파의 해소월이 은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반갑소이다. 내 집이 아니라서 거하게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하오.”

그들이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눴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은일명이 먼저 물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어쩐 일로 이 은 모를 찾아오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에 남궁창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인사차 들렀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