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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99화 (9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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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8장. 여러 사람이 모이면 각자 목소리를 높이게 마련이다(3)

은일명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력이라면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남궁세가와 해남파였다. 그런 이들이 무력이 필요해 자신과 은가보를 찾아왔을 리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단 한 가지뿐.

‘재물을 원하는구나.’

남궁창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뒤로 오군의의 강렬한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은일명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호남 제일의 재력을 가지고 있는 은가보였다.

말이 호남 제일이지, 천하제일이라는 진주언가와도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은가보의 재물을 탐했는지 몰랐다. 수많은 이들의 사기와 모략, 그리고 약탈의 위험에서 은가보를 지킨 이가 바로 은일명이었다.

이제부터는 냉정해져야 할 때였다.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싶군요.”

“그런가요? 저는 이곳이 마음에 듭니다만. 오히려 탁 트여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제격인 것 같습니다.”

남궁창이 별채를 둘러보며 웃었다.

그의 시선이 문득 은소청과 방진보에게서 멈췄다.

남궁창은 방진보가 별 볼 일 없는 숙수라고 판단했다. 국자를 들고 있는 초라한 행색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반면 은소청은 화려한 의복을 입었을 뿐더러 명가의 기품이 느껴졌다.

“따님인가요?”

그에 은일명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소청을 이렇게 저들에게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은일명이 손짓으로 은소청을 불렀다.

“인사드려라. 남궁세가와 해남파의 장로님들이시다.”

“은가보의 은소청이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은소청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허허! 반갑구나. 눈빛이 참으로 맑고 깊구나.”

“감사합니다.”

은소청이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그녀의 명민한 두뇌는 지금의 만남이 결코 평범한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행동거지 하나,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했다. 그 어떤 것도 책을 잡혀서는 안됐다.

그사이 은일명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남궁창과 오군의.

한 명도 버거운 판국인데 두 명이나 함께 왔다. 힘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시간적인 여유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저들의 갑작스러운 통고에 준비라고는 하나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을 노렸는지 몰랐다.

문득 은일명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예상치 못한 고수가 두 명이나 있었다.

‘그들을 끌어들인다면?’

그가 슬쩍 초연운과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는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으로 동정호를 바라보고 있었고, 초연운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일명은 담호를 포기했다.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자칫하다가는 명문 은가보가 마인인 권마와 연관이 있다고 소문이 날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한 치 앞을 모르는 시기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컸다.

담호와 반대로 초연운은 끌어들여도 괜찮을 듯싶었다. 비록 취운룡이라는 약간은 조롱기 담긴 별호로 불리지만 그래도 구무룡에 버금간다는 소리를 듣는 초연운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사문은 백전문. 강호의 모든 문파들이 이름을 담아 바친 백전전승기가 존재한다.

남궁세가와 해남파도 백전전승기에 이름을 올린 문파들이었다. 당연히 백전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은일명은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아, 제가 이분들을 소개해드리는 것을 잊었군요. 이쪽은 백전문의 초연운 소협입니다.”

초연운은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는 은일명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남궁창 등에게 포권을 취했다.

“백전문의 초연운이 여러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늦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오! 자네가 이곳에 있었는가? 이거 반갑구만. 난 남궁창일세.”

“오군의일세. 반갑네, 초 소협.”

인사를 하면서도 남궁창과 오군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은가보가 백전문과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남궁창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빛을 되찾았기에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초연운이 신분을 밝히자 한쪽에 물러서 있던 남궁수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남궁수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남궁 소협. 불초 초연운이라고 하오.”

초연운이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초연운이 남궁수 등과 인사를 하고 있을 때 해소월의 시선은 한쪽에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담호를 향해 있었다.

흑발에 검은 장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한 오연한 모습.

그 모든 것이 낯익었다.

해소월은 언젠가 그를 만났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동정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객들이 그녀를 습격했을 때 그도 그곳에 있었다.

“해 소저, 이쪽은 초 소…….”

초연운에게 해소월을 소개하려던 남궁수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사이 해소월은 담호의 앞에 도착했다.

“우리 한 번 만난 적이 있죠?”

“…….”

“전 해소월이라고 해요.”

담호는 대답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한없이 맑은 해소월의 눈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가라앉은 담호의 눈동자 속에는 서로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담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해소월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눈빛에서부터 영혼이 압도당하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담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해소월을 바라보던 담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담호다.”

“반가워요, 담 소협.”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사뭇 오만하게 보였다. 남궁수가 살짝 인상을 쓴 채 담호를 바라봤다.

구무룡 중의 하나인 해소월이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가 해소월에게 저렇게 오만하게 대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심히 거슬렸다.

“난 남궁세가의 남궁수라고 하오. 실례지만 담 형의 사문을 알 수 있겠소?”

남궁수의 음성엔 조롱기가 담겨 있었다.

담호의 고개가 남궁수를 향해 돌아갔다. 그는 말없이 빤히 남궁수를 바라봤다.

쿵!

순간 남궁수는 가슴 한쪽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담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역도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익!”

남궁수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순간 담호의 입술이 열렸다.

“사문 따윈 없어.”

“으득!”

남궁수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담호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담호와 같은 기운을 풍기는 자가 사문이 없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좋은 스승과 사문을 두지 않은 무인은 결코 일정 선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남궁수의 상식이었고, 강호를 살아가는 자들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시오. 괜히 엄한 사문 욕 먹이지 말고.”

“남궁 소협.”

보다 못한 해소월이 남궁수를 불렀다. 하지만 남궁수의 격앙된 감정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담호의 무언가가 남궁수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수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담호를 향해 이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 남궁창이 다가왔다.

“담 소협이라고 했나? 반갑네! 나는 남궁창이라고 하네. 보다시피 남궁세가에서 나왔지. 이곳에 있는 곳을 보니 은가보와 친분이 돈독한 모양이군.”

“아닙니다. 그는 은가보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은일명이 기겁해 담호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그에 남궁창의 눈이 빛났다.

‘무언가 있군.’

은일명이 관계를 부인할 정도로 거북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는 곰곰이 머리를 굴려 봤다.

‘호남성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은가보에서 거북하게 느낄 정도의 무인이 누가 있을까?’

천하에 모르는 일이 없다고 자부하는 남궁창이었지만, 그런 존재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을 뒤지던 남궁창은 문득 이곳에서 들었던 소문의 한 자락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소문에 묘사된 모습과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일치했다.

“얼마 전 쉽게 믿기 힘든 소문을 들었지. 한 무인이 홀로 새외에서 서천산장을 멸문시켰다는 이야기였지. 그는 홍암산장에서도 풍운을 일으켰고, 최근에는 호남성에 들어와 혈겁을 자행하고 있다고 했지.”

“…….”

“아마 가장 최근의 악행이 형산파의 문주를 죽인 일이었지. 맞나? 신강혈성. 아니, 권마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까?”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남궁창이 미소를 지었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자네는 이유 없는 살육을 저질렀네. 강호의 공분을 사기 충분한 일이지.”

“이유 없는 살육?”

“그래! 지금까지 자네의 행보를 살펴보면 마인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이들을 죽였네. 만일 지금이 비상시국이 아니었으면 강호 공적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네.”

“마치 이 시기가 끝나면 강호 공적으로 몰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것은 자네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렸지.”

남궁창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쯤 했으면 담호가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만 해도 알아서 고개를 숙였으니까.

한편 오군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남궁창은 무인이라기보다는 책사에 가까운 존재였다. 무공도 강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감각이 상대나 정황을 분석하고 대책을 내놓는 데 발달이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오군의는 순수한 무인이었다.

그것도 검의 극의를 추구하는.

그의 눈에 비친 담호의 육체는 완벽 그 자체였다.

덩치가 크다고 모두가 힘이 좋은 것은 아니다. 같은 덩치라도 어떻게 단련했느냐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도 달라진다.

옷깃 사이로 드러난 담호의 근육은 그야말로 한계까지 단련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근육 한 올 한 올이 탄성 있는 실로 짜인 듯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오군의는 몸이 근질근질함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남궁창을 따라다니느라 몸을 제대로 풀 시간조차 없었는데, 담호를 보고 있자니 피가 들끓어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끓어오르는 피를 애써 식혀야 했다. 아직 남궁창의 용건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호 공적이 되기 싫다면 자네의 힘을 옳은 일에 쓰면 된다네.”

“…….”

남궁창의 눈에 강한 힘이 실렸다. 그의 눈빛은 별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곧 강호에 큰 변화가 일어날 걸세. 많은 이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 생길 거고.”

“그래서?”

“나는 자네가 그 일에 자원해 주었으면 좋겠네. 자네가 가진 무력을 좋은 일에 사용하게. 그러면 자연 자네를 보는 의심의 눈길도 사라질 걸세. 그러면 강호의 공적이란 소리도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당신의 개가 되란 이야긴가?”

“감히!”

담호의 말에 남궁수가 발끈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잡고 있었다.

여차하면 출수할 기세였다.

하지만 남궁창이 손을 들어 남궁수를 자제시켰다.

“그만하거라.”

“숙부님.”

“이곳은 피를 보기 위해 온 자리가 아니다.”

남궁수가 결국 앓는 듯한 신음성을 내뱉으며 검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담호를 노려보는 눈길을 거두진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사나운 폭풍이 일렁이는 듯 했다. 하지만 담호는 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담호의 시선은 남궁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 남궁창이 미소를 지었다.

“대가 무척이나 센 친구군. 좋아! 그 정도의 강단이 있어야 험한 강호를 헤쳐 나갈 수 있겠지. 허나 젊은 친구, 조심하게나. 강호라는 곳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이 급변하는 곳이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호의를 보이던 사람이, 내일은 적의를 보일 수 있음이니 항상 조심하게.”

“그러지.”

담호의 반말에 남궁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노회한 강호인답게 본래의 여유로운 표정을 순식간에 되찾았다.

남궁창이 은일명을 바라봤다.

“은 보주.”

“말씀하십시오.”

“아무래도 이곳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죄송하지만 안에서 이야기하였으면 합니다.”

“그러시지요.”

은일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담호와 남궁창의 대립 아닌 대립을 본 은일명이었다. 자칫했다가는 담호 때문에 은가보가 남궁세가와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은일명이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걸음을 옮기려는 남궁창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다.

―숙부님, 이대로 놈을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자칫하다가는 남궁세가가 우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세가의 그림자들을 놈에게 붙여라.

남궁창 역시 전음으로 답을 했다.

전음은 소리[音]를 압축해서 전달하는 고도의 공부였다. 이런 식으로 나눈 대화를 타인이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척살합니까?

―당분간 감시만 해. 나중에 따로 이용할 곳이 있으니까.

―어떤?

남궁수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진천뢰에 이어 피에 미친 마인이 나타났다. 제법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느냐?

―그럼?

―무림맹을 설립하는 훌륭한 원동력이 되어 줄 거야.

남궁창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여전히 남궁수의 얼굴엔 불만스러운 표정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남궁창은 남궁수와 해소월을 남겨 둔 채 오군의, 은일명과 함께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이 무림맹을 돕는군. 때마침 적당한 희생양이 나타나 주다니.’

담호는 남궁창이 은일명을 따라 별채에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형?”

방진보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담호가 말없이 그의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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