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104화 2장. 호수에 용과 호랑이가 모여들다(1)
담호가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도륙한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목격자라고 해 봐야 초연운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전부였다. 그들은 담호로 인해 벌어진 참사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침묵을 지켰다.
사건은 그렇게 무마되었지만, 아직 분란의 불씨는 남아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남궁세가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금검대가 몰살을 당한 사건이었다. 남궁세가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숙부님, 그냥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궁수가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대고 흰 천을 감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남궁창이 그런 남궁수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귀밑머리가 새하얗게 세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흰머리가 귓가를 뒤덮은 것이다.
“남궁세가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놈을 이대로 두면 사람들은 남궁세가를 비웃을 것이 분명합니다.”
남궁수가 열변을 토했다. 그의 두 눈은 온통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남궁창은 그런 남궁수의 반응을 이해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성공 가도를 달려오다가 난생처음으로 좌절을 겪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반면 남궁창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담호의 믿을 수 없는 무위를 직접 경험한 남궁창이었다. 만일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담호와 같은 무인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담호에겐 소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무서움은 직접 부딪쳐 본 사람만이 안다. 그에겐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원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결코 글이나 말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감은 아련한 기억 속에서 한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신제(四神帝). 혹시 그는 그들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이미 삼십 년이 넘었다. 이제 와서 그들과 연관이 있는 자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 보는 것은 비약이 너무 심했다.
“숙부님!”
남궁수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남궁창이 고개를 들어 남궁수를 바라보았다. 이를 꽉 문 남궁수의 얼굴이 보였다.
남궁창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참아야 한다.”
“남궁세가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어찌 참는단 말입니까?”
“그래도 참아야 한다.”
“숙부님!”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무조건 참아야 한다.”
“어떻게 참는단 말입니까?”
“수야.”
남궁창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에 남궁수가 흠칫했다. 남궁창이 남궁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라고 지금 속이 좋은 줄 아느냐? 나는 너보다 더 참담하다. 금검대는 나에게도 친조카 같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참는다. 왜 그런 줄 아느냐?”
“왜이십니까?”
“무림맹의 창설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기정사실이란 말이지. 수많은 문파들이 무림맹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겠지. 우리 역시 그럴 거고.”
“하지만 그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관이 없지 않다. 만일 우리가 담호 단 한 명에게 금검대를 잃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
“상상은 해 봤느냐?”
“그건?”
“그들은 본가가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우습게 볼 것이다. 한두 문파라면 상관없지만, 그 대상이 무림 전체라면 어떡하겠느냐?”
남궁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남궁창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참아야 한다. 본가가 무림맹의 주도권을 잡을 때까지. 복수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크윽!”
“너도 보지 않았느냐?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 최소한 본가의 검왕대(劍王隊) 정도는 나와야지 어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입니까?”
남궁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검왕대는 남궁세가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조직이었다.
남궁세가의 전전 대 가주인 남궁선월은 기존의 조직 구성만으로는 가문을 지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여겼다.
그는 비밀리에 기재들을 뽑아 특별한 방법으로 수련을 시켰다. 그들에겐 남궁세가의 수많은 영약과 비급들이 투입되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과 노력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것이 검왕대였다. 그들은 대를 이어 남궁세가에 충성했고, 누란의 위기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벌써 삼십 년도 전의 일이었다. 바로 마교의 겁난 때였다.
당시 그들은 남궁세가의 담을 넘은 마교의 정예 무인 천여 명을 도륙함으로써 엄청난 무위를 세상에 드러냈다. 붉은 복면을 써서 개개인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검왕대라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마교의 침공이 끝나자 그들 역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남궁세가를 수호하는 것이다.
검왕대의 구성원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가주 한 명뿐이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일 권한을 갖고 있는 이도 가주뿐이었다.
검왕대가 움직인다 함은 곧 남궁세가와 강호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다는 뜻.
남궁창과 남궁수가 제아무리 남궁세가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고 해도 그들을 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궁수가 이를 꽉 물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담호는 검왕대가 움직여야 할 만큼의 강자.
이제까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나 잘났다고 저마다 외치는 신진 기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인이었다.
일단 상대를 명확하게 인지하자 피가 싸늘히 식고 이성이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참겠습니다.”
“그래! 지금은 참아야 한다. 무림맹의 주도권을 잡을 때까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의 수치를 절대 잊지 말거라.”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나가 보거라.”
“예!”
남궁수가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남궁창이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고이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담호는 그의 가슴에 절대 지워지지 않을 공포를 각인시켰다. 남궁창의 육체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담호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이와 같은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남궁창이 고개를 저었다.
남궁수 앞에서는 애써 강한 척했지만, 누구보다 두려운 이는 바로 그였다.
담호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꺼풀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키고, 손발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제기랄!”
***
이제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도사가 길을 걷고 있었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능라의의 소맷자락이 부드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미소에 여유로운 걸음걸이, 그는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의 허리엔 평범한 철검이 걸려 있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덜커덕 소리를 냈다.
“좋구나.”
젊은 도사가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야산이라기엔 무척이나 높고, 명산보다는 작은 산. 이름조차 모르는 그런 곳이었지만 풍경만큼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 산은 마치 화산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구나.”
아닌 게 아니라 험준한 암봉과 날카롭게 뻗어 있는 능선이 화산을 연상시켰다.
젊은 도사는 가만히 멈춰 서서 한참이나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다.
급할 것도 없었고, 서두를 것도 없었다.
사부는 그에게 세상을 직접 경험하라고 했다.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성취가 일취월장할 거라고 말했다.
사부의 말처럼 젊은 도사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다. 덕분에 일정이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경공을 펼쳐 얼마든지 정해진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젊은 도사가 한참 산세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어허! 팔자 좋은 도사로다. 이런 시국에 한가하게 유람이나 하다니.”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남자들의 손에는 칼과 도끼 같은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젊은 도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적들인가?”
“어허! 녹림이라는 좋은 말 놔두고 도적이라니?”
“녹림? 그럼 도적들이 분명하구려.”
젊은 도사의 대답에 험상궂게 생긴 녹림도가 코웃음을 쳤다.
“젊은 도사가 겁도 없구나.”
“흐흐! 원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법 아니겠소?”
“원래 세상 물정 모르는 자일수록 겁이 없지. 흐흐!”
녹림도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었다. 젊은 도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험상궂은 녹림도, 장광이 앞으로 나섰다.
“이봐, 도사 양반. 우리가 배가 고파서 그러니 적선 좀 하고 가시게나.”
“적선하고 싶어도 가진 게 없어서.”
젊은 도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장광이 히죽 웃었다.
“그럼 그 철검이라도 내놓고 가시던가?”
“그건 곤란한데. 사부님께 하사받은 녀석이라서 말이오.”
“허참! 재물도 없다, 검도 내놓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한다?”
“좋은 방법이 있지 않소?”
“그게 뭐요? 도사 양반.”
“나를 그냥 보내 주면 되오.”
“그건 곤란하지. 그러면 우리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거든. 체면이 떨어지면 이 산을 지나는 인간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지. 그러면 영업 실적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고.”
장광의 말에 젊은 도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면 어쩌면 좋겠소?”
“도사의 목숨이라도 빼앗아야 우리의 체면이 유지되지 않겠는가?”
“허!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내 목숨을 빼앗겠다?”
“이해해 주게. 그게 우리의 영업 방침이라서 말일세.”
“후회하지 않으시겠소?”
젊은 도사의 질문이 이상하게 여운을 깊게 남겼다.
장광이 잠시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내 히죽 웃으며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도사님에게 교훈이 필요할 듯싶구나. 손 좀 봐 주어라.”
“예!”
녹림도들이 대답과 함께 젊은 도사를 향해 다가왔다.
건들거리면서 다가오는 모습이 오합지졸 같았다. 하지만 젊은 도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란 사실을 눈치챘다.
안정적인 걸음걸이와 길게 이어지는 호흡. 그리고 무기를 잡은 자세와 기세.
‘평범한 녹림도가 아니군.’
젊은 도사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전혀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야아!”
녹림도가 기합을 내지르며 젊은 도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아악!
검풍과 도풍이 젊은 도사에게 몰아쳤다.
순간 젊은 도사가 가볍게 대지를 박찼다. 그의 손엔 어느새 예의 철검이 들려 있었다.
쉬쉭!
젊은 도사가 가볍게 검을 내질렀다.
순간 이름 없는 야산에 매화꽃이 피어났다.
“크아악!”
“어억!”
기세 좋게 달려들던 녹림도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그들의 가슴에 피로 만든 매화가 피어났다.
세상에 수많은 무공이 존재했지만, 이렇게 매화를 선명하게 피워 내는 무공은 오직 화산파에만 존재했다. 도사가 화산파의 제자라는 증거였다.
가볍게 펼친 듯하지만 그 위력은 충분히 사람을 죽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제, 젠장! 역시 화산파의 도사가 맞구나.”
순식간에 수하를 잃은 장광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에 젊은 도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빈도가 화산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격했단 말이구려.”
“크윽!”
“누구요? 당신에게 지시를 내린 자가. 왜 나를 공격한 거요?”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위에서 확인하라고 했으니 명에 따를 뿐.”
“흠!”
젊은 도사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자 장광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뒈져랏!”
그의 손에 들린 거치도가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목표는 젊은 도사의 가슴이었다.
푸확!
순간 허공에 혈화가 피어났다.
“커억!”
장광이 눈을 치떴다. 그의 가슴엔 젊은 도사의 철검이 박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혈매화검(血梅花劍).”
젊은 도사가 중얼거리며 장광의 가슴에 박힌 검을 뺐다. 장광의 몸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장광의 시신을 잠시 내려다보던 젊은 도사가 고개를 저었다.
“사부의 검공은 다 좋은데 살기가 너무 짙단 말이야.”
일단 펼치면 반드시 피를 봐야 하는 것이 혈매화검이었다.
젊은 도사는 혈매화검의 유일한 전승자였다.
화산파에서는 그를 명경이라 불렀다.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을 바라보던 명경이 잠시 후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수풀에서 호피를 입은 사내가 기어 나왔다.
그가 명경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산파의 도사가 저리 무시무시한 살검을 펼치다니. 역시 채주께서 주시하라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호피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이름은 곽거철,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흑수채의 부채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