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105화 2장. 호수에 용과 호랑이가 모여들다(2)
초연운은 서풍객잔의 일 층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오군의가 앉아 있었다.
초연운은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원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라 오군의가 만든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배 된 입장에서 강호 선배가 만든 자리를 피할 수도 없기에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오군의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그 이유가 담호 때문이란 것을 모를 초연운이 아니었다.
‘하여간 그 인간 때문에…….’
초연운이 은밀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강호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날의 사건은 초연운뿐만 아니라 오군의와 해소월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른 곳도 아닌 강호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단 한 명에게 몰살을 당했다. 평상시라면 강호를 진동시킬 일대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것은 오군의와 초연운이 입단속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만일 금검대가 담호에게 몰살을 당한 소식이 외부로 흘러나가게 되면 남궁세가도 좌시할 수 없게 될 터였다.
남궁세가와 담호의 전면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일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에 견줄 수는 없었다.
남궁세가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순간 담호는 분명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금검대를 몰살시킨 담호의 무력을 감안할 때 남궁세가가 입을 피해도 결코 적잖을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비밀을 지켰다.
오군의의 표정은 그야말로 심각했다.
그가 느낀 충격은 초연운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담호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에 불과했다. 무인으로서 절정을 달릴 나이지만, 이미 강호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남궁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의 선입견을 깨고 금검대를 몰살시키고 남궁창에게도 씻을 수 없는 굴욕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남궁창은 담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가 과연 담호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오군의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던 오군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가 초 소협의 친구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정말 대단한 친구를 두었군.”
“감당하기 힘든 친구지요.”
“그렇겠군.”
오군의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내 말 돌리지 않겠네. 도대체 그는 누군가?”
“그건…….”
초연운이 머뭇거렸다.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담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아는 것이라곤 담호의 이름 두 자뿐. 그의 신세 내력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에효! 친구라고 떠벌린 것이 부끄럽구만.’
오군의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무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네. 그가 보여 준 무위는 도저히 후기지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네. 구무룡도 감히 그에 비할 바는 아닌 듯하네.”
“그거야…….”
“그런 고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네.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있기 힘든 일이지요.”
“제대로 된 고수 한 명을 키워 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자와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지 자네가 잘 알고 있을 걸세.”
고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체계적인 지원과 수많은 투자가 이뤄질 때 비로소 강호에서 고수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도 있지만, 최소한 강호라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현 강호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그들에겐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무공 비급과 심득, 그리고 엄청난 재화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 제자들을 고수로 키워 낼 수 있었다. 괜히 그들을 명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명문이 아닌 곳에서 제대로 된 고수가 나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간혹 예외의 존재가 등장해 의외의 즐거움을 안기기도 하지만, 담호처럼 상식을 벗어난 존재가 등장한 적은 없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강호의 명문정파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네.”
초연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군의가 무엇을 의심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혹시 그가 마교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오군의의 대답에 초연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교(魔敎).
수십여 년 전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대명사였다.
당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인들이 마교와의 싸움에서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강호인들은 마교인이라면 치를 떨었고,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고 의심되면 강호의 공적으로 몰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는 마교도가 아닙니다.”
“확신하는가?
“그의 행적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비록 그의 손속이 과격하고, 어떤 면에서는 흉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것만으로 그가 마교도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남궁 소협이었습니다. 그가 시비를 걸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알고 있네. 분명 시비는 남궁 소협이 먼저 걸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대응은 너무 과하네.”
“남궁세가의 반응도 지나쳤지요. 아닙니까? 남궁 소협의 손목이 부러졌다고 금검대를 이용해 죽이려 했으니까요.”
“으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비록 손속이 잔혹하다고 해도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초연운의 말에 오군의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오군의와 초연운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오군의였다.
“자네는 끝까지 그와 친구로 남을 자신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그와 헤어지는 것이 나을 걸세. 이건 강호의 선배로서 하는 충고일세. 그는 분명 강호에 큰 평지풍파를 일으킬 것이고,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살 걸세. 그와 함께해서 좋을 일은 별로 없을 걸세.”
“죄송합니다.”
초연운은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그런 초연운의 모습에 오군의가 미간을 찌푸렸다.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뜻이군.”
“저는 이미 그를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상황이 조금 불리하다고 친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백전문이 큰 불이익을 당해도 괜찮다는 건가?”
“아직도 백전문을 잘 모르는군요.”
“무슨 말인가?”
“제 사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관계를 제일 싫어합니다.”
초연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의 사부 장일산은 늘 남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장일산은 의리를 중시했고, 그 어떤 경우에도 친구를 버린 적이 없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
그가 마교와의 전쟁에서 선두에 섰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가장 친한 친구가 마교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으음!”
“강호의 평판을 걱정해 제가 친구를 버린다면 제일 먼저 사부에게 죽을 겁니다.”
“바보 같군. 자네도…… 자네 사부도…….”
“알고 있습니다.”
초연운이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군의가 그런 초연운을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정말 확신하는가? 그가 마교도가 아니란 것을.”
“확실합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
“저와 사부는 오래전부터 마교를 추적하고 그들이 다시 준동할 때를 대비해 왔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요.”
“으음!”
“끝까지 친구로 남을 자신이 있냐고 물어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이 초연운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친구가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초연운의 신념 어린 말에 오군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자리에 부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충고라는 단어로 포장한 이간질 따위는 듣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포권을 취한 초연운이 객잔 밖으로 나갔다.
오군의는 한동안 말이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초연운이 남긴 신랄한 말이 깊은 여운을 남기며 그의 가슴을 비수처럼 후벼 파고 있었다.
***
담호는 동정호를 걷고 있었다. 방진보가 그의 곁을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한동안 담호의 눈치를 보던 방진보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형!”
담호가 말없이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날 제가 주제넘게 나서서 혹시 화나신 것은 아니죠?”
“화나지 않았다.”
“정말이죠?”
“그렇다.”
“휴! 다행이다.”
그제야 방진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방진보는 담호의 광기와 살기를 보았다. 모두를 두렵게 만들었던 담호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방진보가 두려워한 것은 그런 외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담호의 결정에 자신이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담호가 자신을 미워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 방진보의 최대 걱정이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해야 했는데, 담호의 대답을 듣자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
방진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담호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담호가 문득 동정호를 바라봤다.
저 멀리 조그만 배 한 척이 보였다. 수면 위에 홀로 떠 있는 모습이 외로워 보였다.
담호는 우두커니 서서 한참이나 배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방진보도 걸음을 멈춰 섰다.
방진보는 담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방진보는 담호의 얼굴이 무섭다기보다는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담호가 갑자기 걸음을 옮겼다. 방진보가 뒤질세라 담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담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덩달아 방진보도 말이 없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방진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나!”
방진보가 손을 흔들었다.
담호의 시선도 자연 방진보가 보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 호피로 된 조끼를 입은 생기발랄한 인상의 여인이 있었다. 담호는 여인의 인상이 무척이나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담호는 얼마 전 동정호변에서 그녀를 보았단 사실을 떠올렸다.
여인이 방진보를 보고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진보야.”
방진보를 반갑게 부르는 여인은 바로 황혜령이었다.
“누나,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요즘 좀 뜸했네. 아직도 서풍객잔에 머물고 있니?”
“예!”
“진보가 만든 음식 맛보러 가야 하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나네.”
“당분간은 계속 그곳에 있을 테니 생각나면 언제든 오세요.”
“그러면 좋겠는데 내가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황혜령의 눈가에 살짝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방진보는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분은?”
황혜령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그러자 방진보가 활짝 웃었다.
“전에 말했던 우리 형이에요.”
“형? 아!”
잠시 기억을 더듬던 황혜령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곧 담호에게 포권을 취했다.
“반가워요, 전 황혜령이라고 해요.”
“담호다.”
담호가 황혜령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황혜령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방진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형.”
“아니다.”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황혜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