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106화 2장. 호수에 용과 호랑이가 모여들다(3)
황혜령이 물었다.
“진보 형이시라구요?”
“그렇다.”
“두 분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네요.”
“친 혈육은 아니지만, 그와 다름없다.”
“그렇군요.”
황혜령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담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미소였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했다.
“녹림에 몸을 담고 있다고 했나?”
“예!”
황혜령은 순순히 대답했다.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이었지만 이상하게 담호에게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녹림 총채주인 황경문 대협이 제 부친이에요.”
“그렇구나.”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경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녹림의 총채주라는 신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담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사람 자체를 보지, 배경이나 신분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남궁세가와도 거침없이 부딪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큰 비밀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하는 담호의 모습에 황혜령은 살짝 충격을 받았다.
방진보야 워낙 어린 데다가 강호라는 세상에 대해 몰랐기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담호와 같은 무인이 그러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녹림 총채주의 딸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몇 가지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그게 뭐냐?”
“비밀이에요.”
“그렇구나.”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저희 같은 녹림도는 무림의 동향에 무척이나 민감해요.”
“동정호의 회합 때문에 온 거군.”
“맞아요. 혹시 그들이 녹림의 토벌을 의논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게 제가 이곳에 온 이유 중 하나예요. 나머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죄송해요.”
“아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비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오라버니.”
“…….”
“아참!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되죠?”
황혜령의 말에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호와 황혜령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방진보는 적잖이 놀랐다.
그가 아는 담호는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황혜령과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혜령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그녀가 마음을 터놓는 대상은 은소청이 전부였다. 방진보와도 친하게 지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소청과의 인연, 그리고 뛰어난 음식 솜씨 때문이었다.
지금 그녀가 담호에게 보여 주는 격의 없는 태도는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적어도 방진보가 느끼기엔 그랬다.
이번엔 황혜령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고향이 어디에요?”
“섬서성 태백산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이름도 없고,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저 그런 마을이었지. 특별할 것도 없고, 다를 것도 없는 그냥 평범한 시골 마을. 남자들은 논농사를 짓고, 여자들은 밭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런 곳이란다.”
“평범한 곳……. 저도 그런 곳에서 살아 보고 싶네요. 산채에서의 삶은 너무 척박하거든요.”
황혜령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왠지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황혜령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왠지 이곳에 더 있다가는 감상적이 될 것 같았다.
그녀가 담호를 바라봤다.
세상은 그를 권마, 혹은 신강혈성이라고 불렀다.
어떤 이들은 희대의 마인이라고 불렀고, 어떤 이들은 피에 굶주린 자라고 했다.
들려오는 소문 모두가 하나같이 흉악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본 담호는 과묵할지언정 흉포하지는 않았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어둡고 말이 없을 뿐, 제 성질을 못 이겨 난동을 피우는 자는 아닌 것이다.
잠시 담호를 바라보던 황혜령이 입을 열었다.
“이만 가야겠어요.”
“산채로 가려는 것이냐?”
“아직은요. 할 일이 남아 있거든요.”
“알겠다.”
“혹시……. 저를 찾을 일이 있으면 패왕채를 찾아오세요. 안휘성 황산에 있어요.”
“그래!”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혜령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묵일광이 보였다.
“갈게요. 다음에 또 봐요, 오라버니.”
황혜령이 특유의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담호는 한참 동안이나 황혜령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방진보가 그런 담호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금 담호가 보이는 모습이 그만큼 낯선 것이다.
“형?”
“어이, 친구.”
방진보가 담호에게 무어라 말하려 할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진보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연운 형.’
사람들 사이로 초연운이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한참을 찾았잖은가? 나만 빼놓고 둘이서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거야?”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목소리로 떠드는 것이 초연운다웠다.
“형! 목소리 좀…….”
방진보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초연운이 그의 어깨에 팔을 턱하니 걸쳤다.
“요 귀여운 녀석. 형 많이 보고 싶었지?”
“목소리 좀 낮추라구요.”
“흐흐! 알아. 나도 보고 싶었다니까.”
초연운이 방진보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에효!”
방진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초연운이 담호를 보며 술병 두 개를 흔들어 보였다.
“해도 지는데 술 한잔 어떤가? 친구.”
“…….”
초연운은 담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담호에게 술 한 병을 내밀었다.
담호가 술병을 받자 초연운이 자신의 술병을 앞으로 내밀었다.
“건배.”
챙!
두 사람의 술병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밤늦은 시각 악양의 선착장으로 큰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말과 사람을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운마도강선이었다.
커다란 발판이 내려지고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차례로 내렸다.
“드디어 뭍이구나.”
“아이구! 죽겠다.”
오랜만에 뭍에 내린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배를 내린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불야성을 이룬 악양의 밤 풍경이었다. 화려한 악양의 밤풍경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서둘러 악양의 밤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착장을 빠져나가고 마지막 손님들이 뭍에 올랐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굳은 몸을 이리저리 풀면서 중얼거리는 도사는 바로 명경이었다. 명경의 뒤로 현무 진인과 한소유 등의 모습이 보였다.
화산파의 도사들이 드디어 악양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의 얼굴엔 후련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중간에 명경을 만나서 왔기에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악양에 도착했다.
매우 오랜 시간을 배를 타고 오느라 몸은 매우 피곤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깨어나 있었다.
“이곳이 악양?”
한소유는 눈앞에 펼쳐진 불야성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평생을 화산에서만 보내온 그녀에게 눈앞의 불야성은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그것은 다른 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검박하게만 살아온 그들에게 눈앞의 풍경은 너무 낯설어서 괜스레 기가 죽었다.
놀라기는 명경도 마찬가지였다. 현검 진인의 제자가 되기 전에 속가제자로 있었지만, 그래 봤자 섬서성의 촌구석이 그가 봐 온 세상의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눈앞에 펼쳐진 불야성은 너무나 낯설었다. 과연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으니까.
제자들의 모습에 현무 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겨우 이 정도에 놀라서 쓰겠느냐? 앞으로 이보다 더한 광경도 보게 될 터니 놀라는 것은 아직 이르다.”
“이보다 놀라운 광경도 있단 말입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보게 될 게다.”
현무 진인은 ‘무림맹이 만들어지면……’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무림맹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직 제자들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진실을 아는 것은 명경과 한소유 같은 일대제자들뿐이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이 그렇게 불야성을 이룬 악양의 풍경에 놀라고 있을 때 중년의 검객과 가벼운 경장을 입은 여인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중년의 검객이 현무 진인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문을 열었다.
“화산파의 현무 진인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전 해남파의 오군의라고 합니다.”
“아! 해남파의 오 장로님이셨구려. 노도가 화산파의 현무입니다. 무량수불.”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도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랄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직접 마중 나오신 겁니까?”
“원래는 남궁세가의 남궁 장로가 나오려고 했습니다만 사정이 있어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오군의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자 현무 진인이 손사래를 쳤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분이 아닙니까? 얼마나 바쁜지 짐작이 가는데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요. 괜찮습니다.”
“흔쾌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군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창은 아직 밖으로 나돌아 다닐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듯 보이지만 그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불안정했다. 담호에게 당한 정신적인 살인은 그의 심령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혼자 끌어안고 참아야 하기에 남궁창의 정신은 더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존재가 이런 곳에 웅크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당분간 담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다. 특히 남궁창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오군의가 남궁창을 대신해 화산파 무인들을 배웅 나왔다.
화산파는 구대문파 중 하나였다.
예전의 성세를 어느 정도 회복한 화산파의 전력은 구대문파 중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그들은 무림맹의 소중한 전력이 되어 줄 것이다. 호남성 내의 오대문파처럼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다.
오군의가 물었다.
“숙소는 정하셨습니까?”
“이제부터 잡아야지요.”
“마침 잘되었군요. 그렇다면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숙소는 저희가 잡아도 됩니다.”
“아닙니다. 이미 저희가 잡아 놓은 곳이 있습니다. 자리가 넉넉하니 머물기에 불편함이 없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잠시 신세를 지겠습니다. 무량수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현무 진인은 오군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무 진인이 한소유와 명경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오 장로님께 인사드리거라.”
“화산파의 한소유가 오 장로님께 인사드립니다.”
“무량수불! 소도 명경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인사에 오군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네. 화산파 제일의 기재들을 이리 보게 되니 나야말로 영광일세.”
이번엔 오군의가 뒤쪽에 서 있는 여인, 해소월을 불렀다.
“이 아이는 본문의 장문 제자인 해소월이라고 합니다. 현무 진인께 인사를 드리거라.”
오군의의 말에 해소월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해남파의 해소월이 화산파의 장로님을 뵙습니다.”
“허허! 기도가 대단하군. 반갑네, 화산파의 현무일세.”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늙은 도사를 만나는 것이 무슨 영광일까? 기왕 이리 만났으니 젊은 사람들끼리 잘 지내 보게.”
현무 진인의 말에 한소유와 명경이 해소월에게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해소저. 이렇게 구무룡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반갑습니다. 명경입니다, 해소저.”
해소월도 그들을 보며 예의를 차렸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해소월이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분위기와 달리 날카로운 눈빛이 오갔다.
명경과 해소월은 각기 구무룡에 속한 자. 하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경은 현검 진인의 당부를 떠올렸다.
‘구무룡을 모두 제압해 화산의 검이 최고임을 만천하에 알리거라.’
그것이 이번에 그가 악양에 온 진정한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