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112화 4장. 불청객이 잔치에 재를 뿌리다(3)
다른 것은 몰라도 백전문을 폄하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방금 전에 직격당한 팔에서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초연운이 내공을 전신에 돌렸다. 그러자 그의 기세가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딘가 빠진 것처럼 모자라 보였다면, 지금은 하나의 빠짐도 없이 꽉 찬 듯한 단단함이 느껴졌다.
“흐음!”
초연운의 기세가 변하자 이염라의 눈동자에도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순간 초연운이 대지를 박찼다.
그의 주먹에 백색 기운이 어렸다.
팔황신권의 삼 초식인 격멸천하(擊滅天下)를 펼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파직! 파지직!
백색 기운이 뇌전을 방출했다.
이염라의 손바닥이 활짝 펼쳐졌다. 마치 방패처럼 펼쳐진 손바닥에 공력이 집중됐다.
초연운의 주먹이 이염라의 손바닥에 내리꽂혔다.
쾅!
“크윽!”
이염라의 입을 비집고 답답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쩌릿하고, 내장이 울렁거렸다. 초연운의 주먹에 실린 막대한 역도(力濤)가 그의 전신을 진탕시킨 것이다.
이염라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초연운은 순순히 그가 물러서게 두지 않았다.
슈우우!
마치 날개가 달리기라도 한 듯 초연운의 신형이 대지에 살짝 떠서 이염라에게 근접했다.
백전문의 독문보법인 비매보(飛鷶步)가 펼쳐진 것이다.
마치 매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창공을 활공하는 것처럼 초연운 역시 양팔을 활짝 펼친 채 이염라에게 근접했다.
초연운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감히 팔황신권을 상대로 물러서다니.”
팔황신권은 강격의 권.
제대로 된 힘을 펼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과 내력이 필요했다. 거기에 속도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
이염라가 물러서고, 초연운이 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속도가 더해진 셈이었다.
팔황신권의 오 초식 뇌령명멸(雷靈明滅)이 펼쳐졌다.
빠직! 빠지직!
백색뇌전이 초연운의 주먹뿐 아니라 팔 전체를 뒤덮었다.
이염라의 망막 가득 백색의 뇌전이 명멸하고 있었다.
콰아앙!
“크흑!”
굉음과 함께 이염라가 뒤로 훌훌 날아갔다. 그런 이염라의 가슴 섶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대주님.”
이염라의 위기에 근처에 있던 혈련귀들이 달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일색인 습격자들은 초연운을 합공했다.
“제길!”
초연운의 입술을 비집고 욕설이 터져 나왔다.
팔황신권은 모두 칠 초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초식 하나하나가 막대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엄청난 공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후 삼 초식은 그야말로 미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내공을 잡아먹었다. 한번 펼치면 탈진할 정도였다.
실제로 초연운은 내공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초식을 펼치고도 이염라를 죽이지 못했으니 이번 장사는 손해였다.
“칫!”
초연운이 입술을 질겅 깨물며 주위를 둘러봤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어디서 그렇게 끌어 모았는지 혈련귀들의 전력은 악양검문에 모인 정파 무인들을 훨씬 웃돌았다.
처음엔 버틸 만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전력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이 안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을 터였다.
초연운의 시선이 문득 은소청을 향했다.
종리수가 이끄는 은가보의 무인들이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달한 듯 외곽에서부터 무너져 가고 있었다.
“제기랄!”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은소청만큼은 보호해야 했다. 은소청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방진보를 볼 면목이 없었다.
매일같이 티격태격하지만 그래도 방진보를 가장 잘 챙기는 사람이 초연운이었다.
하지만 은소청에게 가기 위해서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적들부터 쓰러트려야 했다.
‘조금만 견뎌라. 제발!’
초연운은 간절히 바람과 달리 은소청의 눈동자는 격렬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피 보라가 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체가 양단된 무인의 몸에서 튄 피가 그녀의 얼굴에 점점이 흩어졌다.
“아!”
비명이 입안에 가득 찼다. 하지만 은소청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겨우 비명을 집어삼켰다.
“소청아.”
은일명이 은소청을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평소 은일명을 든든히 지키던 은가보의 무사들 중 절반이 벌써 혈련귀의 철련겸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도 세간에서는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의 제자들에 비할 수는 없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무인들조차도 혈련귀들에게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상당수의 무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지금도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하물며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은가보의 무인들이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은소청의 호위인 종리수가 전면에 나섰기에 이 정도로 버티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전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한계에 달했다.
“크헉!”
다시 은가보의 무사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검을 꼬나 잡은 종리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곽아.’
무사의 이름은 장곽, 평소 그와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였다.
친인의 죽음에도 종리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종리수는 은검귀수(銀劍鬼手)라고 불릴 정도로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였지만, 지금은 은일명 부녀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점점 쓰러지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무인들이었다.
‘이건 지옥이야.’
할 수만 있다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목불인견의 참상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그녀의 눈과 귀를 붙잡고 있었다.
“아아!”
그녀의 고운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으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눈물샘이 망가진 것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쉬악!
“으악!”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다시 은가보의 무인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은소청의 아비 은일명이 치를 떨었다.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은가보의 무인이 구대문파의 제자들과 비교해 격이 떨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꿈을 꿨다. 무림맹을 등에 업고 은가보가 호남 제일 문파로 거듭나는 꿈을.
하지만 이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무림맹이 결성되는 이유는 바로 마교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수십 년 전에도 마교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전 무림이 힘을 모아야 했다. 그리고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수많은 문파가 멸문을 당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교와의 정마대전 때문에 무림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 모든 것이 마교라는 단일 세력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마교가 가진 힘이 그만큼 강대하다는 뜻이다. 전 무림이 힘을 모아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무림맹에 합류한다는 것은 그렇게 강대한 힘을 가진 마교를 상대하는 제일선에 서야 함을 의미했다.
“크윽!”
자칫했다가는 달콤한 과실을 얻기는커녕 은가보가 멸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은일명은 이제야 그런 사실을 실감했다.
지독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제 마교의 등장은 기정사실이었다. 눈앞에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가?
촤아앙!
그때 유난히 청명한 검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강렬한 기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으음!”
“아!”
기파에 휩쓸린 은일명 부녀가 동시에 비틀거렸다. 두 사람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청허 진인과 금마사자가 격돌하면서 발생한 기파는 마치 폭풍처럼 악양검문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금마사자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수강이 일어나 청허 진인을 덮쳐 왔다.
청허 진인의 하얀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보통의 수법으로는 강기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청허 진인은 애검에 전 공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희미한 검 형상을 갖췄다.
“검……강(劍罡)인가?”
황금 면구에 가려진 금마사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설마 청허 진인이 검강을 발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는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쩌어엉!
금마사자의 수강과 청허진인의 검강이 격돌했다.
쿠르르!
그들의 격돌에 대전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먼지로 변해 흩날리고, 장정 두어 명이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기둥이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검강을 휘두른 청허 진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안색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고, 입가에서는 죽은피가 흐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수강이나 검강이나 모두 같은 강기다. 하지만 깨달음의 깊이, 익힌 햇수, 공력의 깊이에 따라 위력은 천양지차였다.
청허 진인이 검강을 깨달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간신히 깨달은 것이어서 불완전했다.
형태는 검강의 그것이었지만, 위력 면에서는 많이 부족한 것이다.
“우웩!”
결국 청허 진인이 참지 못하고 시커먼 피를 토해 냈다.
금마사자가 그런 청허 진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비장의 한 수를 숨겨 두고 있었군, 말코. 이기성강의 경지에 이르고서도 감쪽같이 속였다니. 자칫 잘못했으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군.”
청허 진인이 비록 호북제일검이라 불리지만 아직은 검강을 형성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세상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청허 진인은 세상의 선입견을 뛰어넘어 이기성강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비록 깨달음이 불완전해 위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말이다.
“무량수불! 아직 끝나지 않았소.”
열세가 분명한데도 청허 진인은 다시 금마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 같았다.
하지만 청허 진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그가 포기하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몰살을 당할 것이기에.
청허 진인은 이를 악물고 검강을 운용했다.
한소유는 그런 청허 진인의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모두가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 역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벌써 이대제자 몇 명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명경이 선두에서 복면인을 상대했기에 이 정도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전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숙 현무 진인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한계가 명백했다.
한소유 역시 화산파의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이젠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헉! 헉!”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단내 어린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집, 제법이구나.”
그때 적들 중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난히 강한 기도가 느껴지는 무인, 세 명의 염라 중 한 명인 삼염라였다. 그가 한소유에게 검을 겨눴다.
한소유는 내공이 거의 바닥이 난 반면 그는 땀 하나 흘리지 않았다. 이 정도의 싸움은 그에게 식전 운동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죽어랏!”
그가 검을 휘둘렀다.
챙챙!
한소유는 필사적으로 매화삼십육검을 펼쳐 대항했다. 하지만 내공이 달리다 보니 얼마 못 가 손발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스걱!
“흐윽!”
결국 어깨에 일검을 허용한 한소유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사저!”
“소유야!”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명경과 현무 진인이 동시에 소리치며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적을 상대하고 있어 도저히 발을 뺄 수가 없었다.
특히 명경은 일염라에게 발이 묶여 몸을 뺄 방법이 없었다.
삼염라의 검이 한소유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안 돼!”
명경이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그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묵직한 진동이 악양검문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리에 사람들이 움찔했다. 그것은 청허 진인을 압도하던 금마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쿵! 스르륵! 쿵! 스르륵!
불길한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