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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5장. 오랜만의 해후지만 마음이 예전 같지는 않더라(3)
한소유가 담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확신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리를 저는 담호를 보면서 혹시 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짐작이 사실이 되자 그녀는 오히려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살아 있었구나. 그런데 왜 화산파로 돌아오지 않았니? 다들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이야?”
“뭐가?”
“정말 다들 걱정했을까?”
“…….”
담호의 서늘한 질문에 한소유는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이 지독히도 차가움을.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음을.
마치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인을 바라보듯 무감각한 눈동자. 그 눈빛이 이상하리만큼 무섭게 느껴졌다.
“천경아.”
“사부는?”
“사숙은 잘…… 지내고 계셔.”
한소유의 대답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다.
담호에게 그거면 충분했다.
무사히 있으면 됐다. 그러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테니까.
담호가 뒤돌아서며 은소청을 바라봤다.
“가자.”
“천경!”
그때 갑자기 창노한 목소리가 담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담호가 뒤돌아서니 현무 진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현무 진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악양검문 내에 울려 퍼졌다.
“천경 맞느냐? 그렇다면 어찌 사문의 존장을 보고도 예를 표하지 않는 것이냐?”
장내에 있던 대부분의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강호는 그 어떤 곳보다 사문 내의 배분 관계가 명확하다.
배분이 낮은 자는 사문의 존장에게 극진한 예를 표해야 한다. 일단 한 문파의 제자가 된 자는 절대로 배분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현재 화산파의 최고 기재라 평가를 받는 명경도 십이 년 전에는 속가제자에 불과했다. 화산파의 이대제자들보다도 못한 처지였었다.
하지만 현검 진인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그는 일대제자가 되었고, 이대제자들은 그를 사숙으로 부르게 됐다.
그것이 강호의 배분이었고, 문파의 질서였다.
그러니까 현무 진인이 노기를 표출하는 것이 당연했다. 담호가 정말 화산파의 제자라면 사문의 존장인 그에게 가장 먼저 예를 표해야 했었으니까.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순간 기세 좋게 소리쳤던 현무 진인은 알 수 없는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자라처럼 움츠리고 말았다.
현무 진인을 빤히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은 너무나 새까매서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현무 진인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사문의 제자라는 이야기에 기세 좋게 나서긴 했지만 담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자신도 모르게 위축이 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담호와 현무 진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들은 아직도 방금 전 담호가 보여 준 강렬한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잔향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권……마가 화산파의 제자였다니.’
‘역시 화산파 같은 명문이 아니고서는 저런 자를 누가 키워 내겠는가?’
만일 담호가 화산파에 합류한다면 그 파괴력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화산파의 저력에 감탄을 하면서도 돌아가는 상황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현무 진인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에 현무 진인은 더 심한 압박감을 받았다.
현무 진인에겐 그 짧은 침묵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소리쳤다.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냐? 너는 사문의 존장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냐?”
“사문이라…….”
마침내 담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모두가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의 다음 발언을 기다렸다. 뒤이어 흘러나온 발언은 장내를 혼돈에 빠트리게 하기 충분했다.
“나에게 사부는 있을지언정 사문은 없어.”
“그 무슨?”
“사문을 부정하다니.”
현무 진인뿐 아니라 장내 전체가 술렁였다.
현재 이곳에 잇는 자들은 강호 최고 명문인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 속해 있었다.
그들에게 사문이란 절대 배신해서는 안 될 요람이요, 무덤이었다. 시작과 끝이자 생의 모든 것인 것이다.
그들에게 사문을 부정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은 곧 강호에서 스스로의 설 자리를 없애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노 어린 시선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현무 진인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지금 네가 화산파를 부정하는 것이냐? 화산파에서 무공을 배우고서도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는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현무 진인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발언이었다.
그에겐 화산파가 생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화산파를 일개 제자가 부인하다니.
단순히 사문의 존장을 능욕한 것만이 아니라, 화산파와 강호 전체의 질서를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놈에게 화산파가 우습게 보였던 모양이구나. 화산파는…….”
“나에게 당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마.”
“네놈이 감히…….”
“나를 버린 것은 화산파야.”
“그게 무슨…….”
“모르는 모양이군.”
담호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스산했던지 현무 진인은 더 이상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 십이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새외에 다녀온 후 사형인 현소 진인은 칩거에 들어갔고, 무경과 운경은 침묵했다.
화산파의 존장들이 캐물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일의 상황이나 사정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담호가 고심하는 현무 진인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분명 조소였다.
“궁금해?”
“…….”
“그렇다면 저 양반에게 물어봐.”
담호의 시선이 한쪽에 망연히 서 있는 청허 진인을 향했다. 담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청허 진인이 몸을 움찔했다.
담호가 나타나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바로 청허 진인이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 중 오직 그만이 유일하게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자들 고수가 아닌 자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자신의 한목숨 살리는 일에 급급해 담호를 버렸었다.
그날의 기억은 그에게도 수치로 남아 있었다. 비록 제자인 연소하를 구해기 위해서였다지만 그래도 양심의 가책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간간이 생매장 당하던 순간 홀로 남겨졌던 담호의 꿈을 꾸곤 했다. 그만큼 그날의 기억은 그에겐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청허 진인을 향했다. 하지만 청허 진인은 속 시원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일을 말하면 화산파뿐 아니라 무당파와 종남파의 명예까지도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허 진인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런 청허 진인의 반응에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
담호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용무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든 상관없었다. 십이 년 전 홀로 세상과 격리되었을 때부터 그는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봐도 상관없었다. 뭐라고 말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고, 자신은 자신이니까.
사정을 모르는 현무 진인이나 화산파의 제자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현무 진인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감히 사문을 부정하다니, 사마외도가 분명하구나.”
종남파의 장로 진도경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는 종남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고지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비록 자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담호가 사문을 부정하는 꼴을 두고 보자니 절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담호의 발언은 단순히 사문인 화산파를 부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강호 전체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문을 부정하는 자 강호에 붙일 자리 또한 없다.”
“아무리 사문이 잘못했어도 어찌 제자 된 입장에서 부정을 한단 말인가?”
몇몇 사람들이 진도경의 발언에 동조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장내는 졸지에 담호를 성토하는 자리가 되었다.
진도경이 앞으로 나서며 삿대질을 했다.
“네놈이 생각이 있다면 어서 사문의 존장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네놈의 죄를…… 커헉!”
콰직!
순간 진도경의 입에 담호의 주먹이 꽂혔다.
이빨이 부서지고, 입술이 짓이겨졌다.
진도경은 두 손으로 입술을 가린 채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얼굴은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장로님!”
종남파의 제자들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쾅!
그 순간 담호의 주먹이 청석으로 된 바닥에 내리꽂혔다.
콰콰쾅!
손목까지 파고든 주먹을 중심으로 청석이 폭발을 일으켰다.
동심원의 파장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가는 강력한 기운과 청석의 파편들.
마치 벽력탄이 터진 것 같았다.
“컥!”
“으헉!”
종남파의 제자들이 청석에 얻어맞고, 기파에 휩쓸려 꼴사납게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담호는 그들을 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명, 진도경에게 꽂혀 있었다.
진도경은 고통과 수치심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설마 담호가 예고도 없이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는 담호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담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부르르!
온몸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덤비면 죽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그는 담호가 그들이 그토록 고전하던 금마사자와 혈련귀들을 홀로 도륙하다시피 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 말은 곧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협공을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란 뜻이었다.
자신은 그런 존재를 향해 도발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졌고, 굴욕감에 수치심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움직였다가는 확실히 죽는다.
그것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담호가 그런 진도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멋대로 떠들어 봐. 그때는 머리통을 뽑아 버릴 테니까.”
“으힉!”
진도경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자라처럼 움츠렸다.
진도경과 종남파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처한 현실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들.
어떤 이들의 눈빛에는 경멸의 빛이, 어떤 이들에게는 공포의 빛이 어려 있었다.
확실한 것은 그에게 호의적인 눈빛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은소청이나 초연운, 해소월 정도가 담호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담호가 현무 진인을 바라봤다.
순간 현무 진인이 움찔했다.
종남파의 장로인 진도경이 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후였다.
그에게는 기존의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화산파 출신이라는 것도, 강호의 배분이라는 틀로도 그를 얽맬 수는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담호의 사부인 현소 진인이 나서는 것뿐. 하지만 현소 진인은 근 십 년 동안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담호를 강제할 그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호 스스로 고개를 숙이지 않은 한은.
그 순간 담호가 선언했다.
“내 이름은 담호. 나는 혼자 걷는 자. 나는 그 어떤 문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다.”
그의 외침이 악양검문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